우리는 팔순 기념 가족 여행을 갈 수 있을까? 2편

지나간 '스물여섯'들

by 정양갱

(*2025.10 '우리는 팔순기념 가족 여행을 갈 수 있을까' 이어서) https://brunch.co.kr/@fca7b4e832c84cc/8


10월 말, 21명에 달하는 친정 가족은 아빠의 팔순을 기념하기 위해 제주도 여행을 떠났다.

'복이 끊기는 복단일이라 비행기를 타면 안된다'며 여행 일정에 반대했던 큰언니 1호는 형부와 조카가 언니를 버리고 여행에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서인지, 예상보다 쉽게 반대의 뜻을 굽혔다. 단, 조건이 있었다. 자신은 저가항공사의 비행기는 절대 탈 수 없으니 비행기는 반드시 K항공사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여행하려는 날짜를 하루 미뤄 토일월로 조정하고 K항공사의 티켓 21장을 예매했다.

드디어 여행 당일 우리는 비행기를 탔다.


감정은 전이된다는 말을 실감했다. 여행에 들뜬 마음 스물한 개가 모이자, 그 들뜸은 더 커졌고 우리는 그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일부러 더 오버했다. 주스를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굳이 미리 고민하지 않을 일들을 입 밖으로 꺼내며 수다스러워졌고, 비행기 탈 때 돌아올 때 누가 창가 쪽에 앉을지 같은 사소한 일에 꽤 진지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사이, 이런 게 가족이지'라고 하며 이륙을 기다리던 중 형부가 말했다.

"그런데 스튜어디스 분(?)들이 좀 나이가 있어 보이네?"


미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항공사 승무원. 우리가 탄 비행기의 승무원 분들은 내가 봐도 연륜이 느껴졌다. 나이가 40대 중반인 나와 비슷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 순간 나는 형부가 한 말이 나한테 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져 표정 관리가 안 돼 그저 웃었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방송작가 일을 시작하고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나는 항공사 승무원 채용 시험에 지원했다. 방송작가 일의 과도한 업무가 그 일의 보람과 자부심을 상쇄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2년이었다. 좋아하던 사람이 싫어지면 그의 모든 게 싫어지는 것처럼, 4대 보험이 되지 않고 임금이 크게 오르지 않고, 정해진 업무시간이 없을 뿐만 아니라 휴가를 내 마음대로 쓸 수 없다는 현실은 내 눈을 밖으로 돌렸다. 그 시절 나에게 가장 많이 면접 기회를 준 곳은 바로 K 항공사였다. 스물여섯의 나는 단정한 올림머리를 하고, 서툰 화장을 직접 하고, 흰 블라우스와 검정 스커트, 검정 구두를 챙겨서 고속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몇 번씩 갈아타면서 열심히 면접을 봤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화장을 자주 고쳐야 할 정도로 더운 날도 있었고, 스타킹 신은 다리가 추운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을 정도로 추운 날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내 나이가 문제였을지, 면접 답변이 문제였을지, 아니면 미용실에서 받지 못한 화장이나 머리 스타일이 문제였을지, 끝내 알지 못한 채 2년 정도 계속한 항공사 면접 보는 일을 포기했다.


결혼 후 아이들을 친정어머니에게 맡기고 일하면서 '승무원이라는 직업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항공사 직원들에 대한 대량 해고가 이뤄진다는 기사를 내일인 것처럼 귀 기울여 듣기도 했었다.

‘내가 스물여섯 무렵 항공사 승무원 최종 합격 통지를 받았다면 이 비행기에서 손님들을 맞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어떤 남자가 내 뒷통수에 '승무원이 나이가 들어보이네' 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었겠지’

연륜이 느껴지는 우리가 탄 비행기 안 승무원의 뒷모습에 과거 면접장에서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본 승무원들의 모습이 겹쳐 보여 나는 비행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행기에서 내린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동백나무가 많은 숲으로 향했다. 가을이라 동백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갈대와 핑크뮬리가 장관이었다. 여행의 좋은 점 중 하나는 함께 여행하는 사람과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진녹색 동백나무 숲길을 걷던 나는 옆에 계신 아빠에게 문득 물었다.

"아빠, 그런데 아빠는 왜 젊어서 부산으로 가셨어요? 부산에서 어떻게 엄마랑 만났는지도 궁금해."

(아빠의 고향은 전주이고, 엄마의 고향은 임실인데 부산에서 두 분이 만나 결혼하신 후 내가 유치원 다니기 전까지 부산에서 살았다는 게 늘 궁금했지만, 여쭤볼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아빠는 동백숲길을 걸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하셨다.

"젊었을 때 서독 광부를 모집한다고 해서 강원도 탄광에 갔었어. 탄광에서 1년 일하면 서독 광부를 지원할 수 있다고 해서 갔지. 돈 벌려고. 그리고 한 1년을 일했는데 그 모집이 끝나버린 거야...

그 때 니 작은 아버지가 부산에 있었거든. 그래서 부산으로 갔지. 거기서 건설일 배우고 그 때 니 큰 외삼촌도 만나고, 엄마도 만나게 됐지. "


전주에서 태어난 아빠가 부산에서 가정을 꾸리게 된 이야기를 물었던 나는 아빠 입에서 '서독 광부와 강원도 탄광'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파독 근로자: 박정희 정부가 1960~70년대 경제 개발을 위해 해외 원조와 외화 획득을 목적으로 파견한 광부, 간호사) 인터넷 검색이나 한국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을 그 시대상 속에 아빠가 계셨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이다. 전주를 떠나 강원도 탄광으로 간 아빠의 나이는 스물여섯, 일곱 정도였다고 했다. 그 시절 몇 개월만 더 서독 광부 파병이 진행됐다면 아빠는 평생 독일에 사실 수도 있었을까. 부산으로 가서 엄마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네... 라는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면서 결국 내 가슴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동병상련의 마음이었다.


새로운 직장을 위해 서울 땅을 헤매고 다니던 스물여섯의 나는

낯선 강원도 탄광촌에서 독일로 가기 위한 꿈을 키우며 고된 일을 했을 스물여섯의 아빠가

한없이 안쓰러웠다.


매거진의 이전글2026.03.28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