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팔순 기념 가족여행을 갈 수 있을까? -3편

살아온 기적

by 정양갱

21명인 우리 가족은 제주도 여행 기간 동안 7인승 승합차 3대를 렌트해서 다녔다. 얼핏 보면 해외 관광객처럼 보일 수 있을 인원. 가족 중 최고령인 아빠의 나이가 팔순이신데 가장 어린 조카 셋(남1, 여2)의 나이는 한국 나이로 일곱 살이다. 막내 조카들 위로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초등 잼민이들이 넷(모두 남)이 있고, 그 위로 외계인의 지구 침략을 주저하게 만들 정도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 중학생도 둘(남1, 여1)이 있다. 그나마 오 남매와 그 짝꿍들의 나이대가 모두 고만고만한 40대라 대가족 내에서 단합이 잘 되는 부분집합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도 최대 70년의 세대 차이가 나는 가족들의 기호를 맞출 여행지를 정하는 건 쉽지 않았다.

산, 바다, 꽃 같은 자연을 볼 수 있는 여행지는 부모님의 눈을 붙들었지만, 10세 이하 아이들의 눈길을 받지 못했다.(그래도 중2 사춘기 애들은 인스타에 올릴 뒷모습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폐품으로 멋진 로봇을 만들어 전시한 곳도 있었는데 이곳은 남자 잼민이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이 잼민이들은 유람선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거나 눕거나 귤만 까 먹었다. 그나마 21명 모두의 관심을 받은 적당히 여행지가 있었는데,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테마파크(?)였다. 여행지를 검색할 때는 테마파크로 나왔지만, 박물관이나 민속촌보다는 현대적인(?)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서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도록 꾸며둔 곳이었다. 그중 점빵과 의상실, 책방 같은 상점이 모여있는 동네의 모습을 꾸며놓은 곳도 있었는데, 보면서 어렴풋하게 남아있는 어릴 적 부산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고 있는데 쩌렁쩌렁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숙경이!!!"


아빠가 언니를 부르셨다. 그곳 관람객 대부분이 우리 가족이긴 했지만, 다른 관람객들도 몇 있었는데 아빠의 큰 소리에 다들 놀라 아빠 곁으로 모여들었다. 언니는 아빠가 개명 전 이름을 부르는 게 못마땅해 툴툴거리며 아빠 곁으로 왔다. (숙경이란 이름은 아빠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인데, 언니는 운수대통을 바라며 부모님과 상의없이 개명을 했다.) 언니를 본 아빠가 조금 다운된 톤으로 말하셨다.


"여기...

쪽자!"


아빠는, 지금 우리에게 '달고나'로 익숙한 '설탕 뽑기(띠기)"를 하는 마네킹들 앞에 서 계셨다. 그 시절 달고나는 지역마다 불리는 이름이 달랐는데 경상도 쪽에서는 국자에 달고나를 만들어 먹어서 국자나 쪽자로 불렸다고 한다.


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 부모님에게 첫딸이 태어났다. 서울에서 야간고등학교에 다니며 일과 학업을 병행했던 엄마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건강이 상해서였을까, 갓 태어난 언니는 건강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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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쓴 글에 있는 엄마의 이야기 일부)


언니의 머리 크기는 귤만 하다고 했다. 두개골도 다 여물지 못해 말랑말랑했다고도 했다. 지금이라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을 텐데, 엄마는 산파 아주머니와 우리의 외숙모, 큰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렇게 작은 언니를 병원에 데려갈 엄두는 못 냈던 것 같다. 모유건 우유건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첫딸을 키우는 엄마와 아빠의 심정이 어땠을지, 훗날 아이들을 낳아 키우고 보니 알 것 같다. 언니는 출생 이후 2-3년 동안은 사는 게 기적이었다고 했다.


사람 구실 할 수 있을까 내내 걱정하며 키운 첫딸은 다행히 야무졌고, 대여섯 살이 되면서는 낮잠 자는 아빠의 등을 밟고 올라가 벽에 걸어둔 아빠의 바지에서 동전을 꺼내 아랫 층 가겟집에 가서 콜라를 사 먹곤 했다.(이때 아빠는 아마 언니의 이런 만행을 몰라서 그냥 두지는 않았을 거다. 지금 생각하면 무탈하게 자라서 이런 꾀를 쓰는 것조차 예뻤을지 모른다.) 두 살 어린 동생인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동네 언니들과 고무줄도 하고 패싸움(언니의 편은 나와 언니 단둘뿐)도 하다가 내가 동네 언니들이 던진 돌에 눈썹을 맞아 피가 철철 나기도 했다. 그리고 언니는 그 무렵 당시 2층에 살던 우리 집 바로 아랫층 가겟집 앞에서 동네 언니들이 하는 달고나를 보는 게 큰 낙이었는데, 평범한 일상이 감사하게 여겨지던 어느 날 달고나 구경을 하던 언니가 사라졌다.


엄마, 아빠와 가겟집 할머니, 그 근처에 살던 외삼촌네와 큰아버지네가 다 같이 몇 시간 동안 동네를 뒤져도 언니를 찾지 못했다. 훗날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 시절에는 해외 입양을 보낼 아이들을 돈 주고 팔기 위해서 납치하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그날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다. 아빠는 해질무렵 우리 집과는 꽤 떨어진 동네에서 눈물, 콧물 범벅이 돼 있는 언니를 찾았다고 하는데, 그 심정은 또 어땠을까...


기적처럼 느껴졌을 것 같다.

언니는 세상도 쿨하게 “아 몰라. 나는 기억 안 나! 챙피하게 왜그래” 하고 웃었지만.


어느 책의 제목처럼

아빠에게는, 그리고 우리에게도, 어쩌면 당신에게도

살아온 모든 날이 기적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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