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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희지 Sep 19. 2024

공이라 명할 수 있을 때까지


  공이라 명할 수 있을 때까지




  코트 중앙에 떨어져 있는 농구공 하나. 고여 있다. 천천히 부서져 내린다. 누군가에게 다루어진 적 있는 듯 살갗 까끌하게 닳아 있고. 그 틈으로 여름 볕 뚝뚝 흐른다. 주변으로 식물들이 자라난다. 조경사의 목적과 다른 방향으로, 다른 색으로, 무성해진다. 사람들이 코트 둘레를 지나쳐 가는 가운데 나는 우체통처럼, 먼지 앉은 벤치처럼 가만히 지켜본다. 그 공의 배경이 되어, 공의 껍질이 튿어지고 말라 가는 것을 보고. 후숙되는 것을 보고. 공의 안쪽에서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공의 즙을, 공의 의도와 무관하게 뱉어진 그 자신의 말들을 본다. 무너져요. 무너져요. 무너져요. 나는 중얼거린다. 줄줄이. 끝도 없이. 사람들이 물살처럼 나의 주위를 지나치고 멀어지고. 나는 내가 온전히 공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순간 공의 세계에서 나만이 유일한 정물이라는 것을 안다. 공이 수축하고 팽창하길 반복한다. 호흡하는 것이다. 간신히. 기어이. 나는 나와 공이 눈으로 볼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시간의 수중(手中)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의 뜻에 따라 내가 보는 공이. 공이 보는 내가 달라지리라는 것을 안다. 번져 가요. 번져 가요. 번져 가요. 나는 한때 이 공을 주우려 내달렸던 어린애의 이름을 안다. 공은 흐느끼고 뿌리처럼 바닥에 내린 나의 발은 굳건히 자리 지킬 의무를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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