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육아는 어느 날 시작되었다.

쌍둥이보다 더 힘든, 연년생 육아

by 가온결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만 움직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첫째를 자연분만으로 낳았기에, 둘째는 더 쉽고 무탈하게 순풍 나올 줄 알았다. 몸이 이미 한 번 겪었고, 마음도 단단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말로만 듣던 제왕절개의 훗배앓이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산후조리에 대한 생각은 잊은 지 이미 오래, 이제 두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나를 더 강하게 단련했다.



빠른 회복을 위해 배를 움켜쥔 채 복도 벽에 기대어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뗐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달려와 부축해 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차트를 보며 두 눈이 휘동 그래져서는 '작년에도 오셨는데.....' 말끝을 흐리는 뉘앙스가 어쩐지 짐작이 되었다. 애써 웃으며 연년생으로 아들을 출산했노라고 고백 아닌 고백을 했고, 빠른 회복의 위로를 건넸다. 출산 후 겪는 호르몬 탓인지 내게 닥친 상황 탓인지 태어난 아기와 단둘이 남겨진 것 같은 쓸쓸함이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출장으로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고, 시부모님은 첫째를 돌보느라 병원방문이 어려우셨다.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슬프게 한 건 출산할 때마다 생각나는 친정엄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친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고, 부정탈 것을 염려하는 어른들의 제안으로 삼칠일이 지나고 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등불 같은 엄마를 볼 수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절망적이었고, 세상 속에서 나 홀로 끈 떨어진 연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째는 병원복을 입은 엄마가 낯선지 할머니 등에 매달려 빨리 집에 가자고 칭얼댔다. 출산하던 순간에도 두고 온 첫째가 눈에 밟혔는데, 엄마를 외면하는 모습에 더욱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그때는 5박 6일의 짧은 입원 기간이 마치 한 달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막상 집에서 닥쳐 올 상황들이 걱정 됐지만, 나는 엄마이기 때문에 '육아'라는 막다른 골목을 못 본 척 피할 수 없었다. 일주일 가까이 못 본 엄마 대신 갑자기 할머니 껌딱지가 되어버린 첫째를 보니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인생 16개월 차, 첫째는 엄마와 떨어져 시부모님 댁에서 지내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아침마다 엄마와 동생을 보러 왔다가 해맑게 '안녕' 하며 쿨하게 떠나는 뒷모습에 서운함과 미안함이 묻어났다. 베테랑 산후도우미분이 차려주는 식단은 5대 영양소를 갖춘 최상의 진수성찬이었다. 산모가 섭취해야 할 음식들을 맛있게 요리해 주시고, 신생아 육아도 뚝딱뚝딱 잠투정 없이 재우는 신기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찾아오나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삼칠일이 드디어 끝났다. 엄마와 남동생은 열일 제치고 나와 둘째를 보러 왔다. 자연산 곱슬머리를 뽐내며 첫 문센에 입성당시 '베이비 구준표'라고 불리던 첫째는 엄마의 출산과 동시에 까까머리가 되었다. 오랜만에 본 외삼촌과 외할머니 앞에서 쑥스러운지 맨질맨질 머리를 만져대느라 바빴다. 출산 후 처음으로 바깥공기를 마시며 들이키던 커피 한 잔의 여유는 세상천하를 얻은듯한 가진 자의 여유 그 자체였다.



어느덧 한 달여의 시간이 흐르고 진정한 전투육아의 시대가 도래했다.

첫째는 분유러버라서 젖병에 집착했으나, 둘째는 혼합수유에 혼돈의 카오스를 겪었다.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봐도 쉽지 않았다. 트니트니 수업을 너무 사랑하는 첫째와 외출을 해야 해서 시어머님께 맡기려면 빨리 적응을 시켜야 했다. 진심은 통했던 것인가 포기하려던 그 순간, 배고픔에 지쳐 젖병을 쪽쪽, 분유를 들이켜는 둘째의 조그만 입이 참 예쁘게 보였다. 17개월과 2개월, 15개월 차 연년생 형제는 그때부터 서로를 닮아가는 그림자가 되었다. 형아는 장난감방에서 혼자 잘 놀다가도 동생이 잘 시간이 되면 칭얼칭얼 엄마를 향해 달려왔다. 누워만 있던 동생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는지 관심을 받고자 '엄마, 나 좀 봐주세요.' 안간힘을 다해 울기 시작했다. 내 몸은 하나인데 잠잘 때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 두 녀석 때문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생과 나란히 누워 분유타임을 즐기며 만족스러운지 씨익 웃는 첫째의 앙증맞은 표정이 사진 속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형아의 모든 것은 사소한 것까지 동생의 표적이 되었다. 형아가 방심하고 있을 때 애착베개 슬쩍 만져보기, 뒤에서 양말 벗기기, 있는 힘껏 머리털 당겨보기 등등 둘찌는 은근 사고뭉치였다. 동생이 본격적으로 기어 다니면서 첫째는 잘 걷다가도 집 안에서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사이좋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거실을 뱅뱅 돌며 기어 다니던 우스꽝스럽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추억이 있기에 전투육아의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냈노라 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평화롭던 일상 속에서 때로는 위기가 존재한다. 남편의 부산출장으로 들뜬 마음을 안고 두 아이와 함께 친정으로 향했다. 그 당시 남동생과 함께 식당을 운영하셨지만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서 손주들을 많이 돌봐 주셨다. 짬을 내서 첫째만 데리고 키즈카페를 다녀온 다음 날 갑자기 열이 나는 첫째를 보면서 걱정이 앞섰다.

열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오후에 한 번 더 소아과를 갔더니 급성중이염 같다고 열이 더 오를 수도 있겠다고 했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열냉각패치를 사 오던 중이었고 갑자기 요란한 전화소리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아빠와 남동생의 다급한 목소리에 친정집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난생처음 40도가 넘는 고열에 첫째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졌고 5분 거리 작은 종합병원으로 온 가족이 출동했다. 짧은 시간에 첫째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응급처치로 해열주사를 맞았지만 소아과가 있는 대학병원으로 이동이 시급한 급박한 상황이었다. 말로만 듣던 열성경련을 내 아이가 직접 겪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계속된 조치에도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고 각종 검사가 진행되었다. 12시가 넘은 시각, 아이가 초음파를 찍는 20여분의 시간이 마치 20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 빈 대기실에 나 홀로 앉아 기다리는데 두 손은 벌벌 떨리고, 눈물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그러면서 정말 마음속 깊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신이 있다면 우리 아이 아무 이상 없게만 해주세요. 제가 정말 착하게 잘 살게요.'


문득 그 시절의 간절함과 슬픔이 떠올라 가슴이 몽글몽글 눈물이 맺힌다. 퇴원이 언제일지 모르는 입원이 시작됐고, 둘째는 일단 친정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엄마 없이 낯선 외갓집에서 보낼 둘째도 6개월이 체 안된 아기였기에 내 맘은 더 아렸다. 날이 밝자마자 시부모님께서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뇌파검사를 받고 몽롱한 손자의 상태에 눈물을 흘리셨다. 너무 어린 나이라 움직임 때문에 수면제를 투여해 받는 검사였기에 한참이 지나고서야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둘째는 시부모님과 함께 서울집, 나와 첫째는 병원이 있는 수원, 남편은 부산에 네 식구가 뿔뿔이 흩어져 이산가족처럼 지내야만 했다. 낯선 병원 환경 탓에 순딩이가 종일 울며 보채는 일이 많아졌고 열이 떨어질 때까지 노심초사 내 입술은 바짝바짝 말랐다. 무심코 거울을 봤는데 정말 하루 사이에 내 얼굴은 초췌를 넘어 피폐했다. 지금도 사랑하는 첫째의 애착베개 '고양이 베개'를 외할머니가 가져다 주자 아이의 안색은 점차 밝아졌다. 꼬리를 잡으며 위안을 얻는 건지 까르르 웃기까지 했다. 일찍 동생을 본 영향으로 엄마의 사랑을 나눠야 했기에 애착베개는 아이에게 정서적 유대감 그 이상이었던 것 같다. 열이 내리면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오자 아이는 병원에서 에너자이저 모드가 되어버렸다. 의사 선생님께서 씩씩한 아이를 보며 '엄마가 힘들겠다. 이제 퇴원해도 되겠다.' 내뱉은 그 한 마디가 그 어떤 보석보다도 값지게 느껴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하루에도 열두 번씩 전전긍긍하고, 발을 동동거리며 무수한 인내의 시간들을 견뎌낸 것 같다. 사회적으로 일을 하면서 겪었던 시련의 고통과는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 엄마로서 나를 성장하게 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뒤집고, 걷고, 말하고 차근차근 성장하는 과정이 단순하지만 얼마나 위대한 과정인지 엄마라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아이의 작은 시행착오가 하나둘 모여 성장의 결실을 이뤄낼 때 엄마의 기쁨은 세상 무엇보다 진귀한 보배가 된다.



쌍둥이만큼 정신없다던 연년생 육아는 말 그대로 전쟁 같은 하루하루였다. 한 명이 울면 한 명이 따라 울고, 한 명이 젖병을 물면 덩달아 같이 먹어야 하니 젖병은 자꾸만 쌓여갔다. 그래서 그 시절 내가 가장 많이 먹었던 음식은 빠르게 끓여서 곧바로 먹는 라면이었다. 두 녀석을 한꺼번에 재우자마자 밀린 집안일을 끝내고 얻은 잠깐의 여유로움이 가장 평화롭고 고요한 일상의 흔적들이기도 하다. 둘째의 움직임과 손놀림은 어찌나 전광석화처럼 빠른지 툭하면 형아의 간식을 탐하고 장난감을 호시탐탐 노리기 바빴다. 첫째는 첫째대로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한 보이지 않는 경계태세를 갖추고 사수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형의 떡뻥도 어느새 입으로 직행, 형이 아끼는 자동차도 무조건 입속으로 고고 하루에도 몇 번씩 뺐고 뺐는 전쟁이 이어졌다. 말이 빨랐던 둘째는 '엄마'보다 더 많이 하는 말이 '형아'였고 첫째는 '아가가 뺐어갔어.'를 돌림노래처럼 반복했다. 그때마다 내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가 걸려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웠고 중구난방으로 아이들을 달래는데만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놓치고 후회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때 아이들의 감정을 한 번 더 들여다보고

다독거려 줬다면 우리 아이들이 좀 더 건강하게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내가 비록 유능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껏 살아온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모든 육아에 정답이란 없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듯 아이마다 저마다의 기질과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책 속의 육아를 그대로 대입해서도 안 된다. 그 어떤 말로도 형언할 수 없는 인체의 신비 속에서 우주의 탯줄로 이어져 열 달을 내 뱃속에 품어 온 소중한 존재가 바로 자식이다. 그렇기에 감히 내 자식은 누구보다 엄마인 내가 가장 잘 안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무엇이든 역경과 고난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반드시 뿌듯한 결실을 맺는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 육아 역시 그 뻔하디 뻔진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결혼하기 이전의 시간 속에서는 엄마가 나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키워 왔을지 전혀 짐작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엄마가 되어 겪는 성장통 속에서 엄마의 위대함과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때론 말 못 하는 아이에게서도 미처 알지 못한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한다.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를 키우는듯한 치유의 감정은 서로께 성장하며

동반자의 길을 는 것이다.


keyword
이전 04화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