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도 나에게도 인생은 피어난다

아들아, 인생 첫 사회생활을 응원해

by 가온결


엄마가 되기 전에 생각했던 육아의 끝은 기저귀만 떼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대단히 잘못된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사춘기 진입을 앞두고 육아는 매번 방향을 잃고 혼란 속에서도 어떻게든 항해 중이기 때문이다. 한 아이를 키우고 양육한다는 것이 매번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게 달콤하지만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이미 경험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상 속 육아라이프는 일곱 색깔무지개처럼 찬란하게 빛날 줄만 알았다.



그 기대는 아들들이 둘 다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와장창 무너졌다. 기는 건 누구보다 빨랐지만 겁이 많아 14개월에도 꿈쩍 안 하는 둘째를 친정집에서 스파르타로 걷게 한 게 나의 판단미스였을까.

아들들은 걷기 시작하면서 직진본능에 충실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라졌다. 한 명을 데려다 놓으면 한 명이 사라지니 미칠 노릇이었다. 점점 혼자서는 외출이 불가한 상황들이 많아졌다. 평일 내내 독박육아에 시달려서 주말에는 어디든 탈출구가 필요했다. 두 살 위 조카도 호기심이 왕성할 무렵이라 시댁식구들과 장거리 외출을 할 때가 종종 있었다. 고만고만한 아들 녀석들 셋을 데리고 어른 여섯이 함께 파주 헤이리로 나들이를 함께 떠난 어느 날 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내가 화장실이 급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감쪽같이 첫째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엄마껌딱지였던 둘째는 그새를 못 참고 나를 찾아서 둘째 손을 붙잡고 미친 듯이 첫째의 이름을 부르며 찾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여자처럼 구석구석 뒤지며 첫째의 뒷모습만 찾아 헤맸다. 나는 그 시절 아이들 옷을 빨강이나 파랑 무조건 컬러풀로 눈에 띄는 색깔을 골라 입혔었다. 그때 어그적 어그적 계단을 오르는 3살 남짓 아기의 뒷모습이 익숙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형아, 형아' 누군가를 부르며 쫓아가는 아이가 왠지 첫째 같았다. 먼발치에서 희미하게 보이지만 엄마는 본능적으로 내 아이를 알아보는 절대능력이 있다. 계단을 세 칸만 더 오르면 바로 큰 대로변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오는 아찔 환 상황이었고 나는 다급해졌다. 그때부터 첫째의 이름을 목놓아 있는 힘껏 외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결국 아이는 뒤돌아 보았고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뛰어 내려왔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아이를 1분만 늦게 발견했다면, 아이가 큰길을 건너버렸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큰 아이는 돌이 지나서부터 영유아검진에서 상위 1퍼센트의 성장을 보이며 쑥쑥 커나갔다. 반면 둘째는 체중미달, 키 미달 마른 체형에 더딘 성장을 보였다. 분명 안 먹는 건 아닌데 지금도 첫째는 밥과 고기러버, 둘째는 과자와 라면러버.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통점을 찾기 참 어려운 극과 극 성향의 형제이다. 둘의 음식 취향이 대화합을 이루는 건 오직 단 하나 치킨뿐이다. 연년생이라고는 도무지 볼 수 없는 체격차이에 한 명씩 아기띠에 메고 외출을 하면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더 이상 아기띠로 감당이 안 되었기에 동네 지인에게서 얼마 타지 않은 연년생유모차를 구입해 바깥외출에 박차를 가하던 나날이 있었다. 지난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엄마는 위대하다를 뛰어넘어 '무식하면 용감하다.' 그 자체였다. 아마도 유모차만 타면 얌전해지는 아이들이 딥슬립하는 순간이 내게는 잠시나마 숨 돌릴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지인들과의 만남이 있을 때는 잠실 또는 명동 장소를 가리지 않고 키즈카페 투어를 가기도 했다. 즐겁게 잘 놀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험난한 여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에서 내리면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하는데 유모차 무게만 10킬로, 아이들 몸무게는 대략 25킬로, 도합 35킬로를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밀고 다녔다. 그 당시 손목에 늘 붙이던 파스는 내 전투육아의 고스런한 삶의 흔적이었다.



둘째 임신 8개월 차, 첫째의 돌잔치를 무슨 정신으로 치렀는지 기억이 까마득하지만 둘째는 가족식사와 사진촬영으로 간단하게 끝냈다. 긴장감이 풀려서였을까. 아니면 아기띠를 하고 티셔츠가 땀범벅이 될 정도로 고된 육아 탓이었을까. 욱신욱신 통증이 있었지만 모기를 심하게 물렸나 하고 여겼던 증상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 근처 병원을 방문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대상포진'입니다. 의사 선생님 말 한마디에 머리 띵하고 충격을 받았다. '통증이 엄청 심했을 텐데 수포가 다 가라앉고 오셨네요.'

병명을 들은 남편은 '미련곰탱이'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그 시절 나보다 아이들을 위한 삶은 나를 자연스럽게 엄마의 자리로 이끌었다. 시댁에 있는 아버님방은 장난감방으로 대변신. 미끄럼틀과 그네가 점령한 지 오래였고, 두 녀석 모두 바퀴 굴리는 재미에 빠져 모든 걸 돌려보느라 하루가 짧았다. 레고를 열심히 만들어 놓으면 부수고, 던지고, 좋아하는 자동차를 차지하기 위한 육탁전도 서슴지 않았다. 지금도 둘째의 눈옆에는 희미하게 자동차에 맞은 상처가 생채기처럼 남아있다. 그때도 지금도 아이스 라떼 한 잔은 내 육아의 힐링포인트였다. 진하고 고소한 맛을 자랑하는 단골카페가 있어, 아이들을 잠시 유모차에 앉혀두고 테이크아웃으로 종종 사 먹는 일이 많았다.



나에게는 소소한 행복을 주는 장소였는데, 어느 날 저녁산책길에 카페를 지나던 첫째가 문득 말을 꺼냈다.

'엄마가 맨날 여기서 우리 길거리에 버리고 갔어.' 그랬더니 말이 빠른 둘째 역시 형아를 따라 '맞아, 엄마가 우리 버렸어.' 폭탄발언을 던졌다. 당황스러운 발언에 내 얼굴은 빨개지고 아들들은 신나서 목청껏 '엄마가 우릴 버렸어.'를 외쳐댔다. 때마침 골목을 지나던 사람들은 미냥 귀엽다는 듯이 어찌나 깔깔대고 웃는지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내가 무심코 했던 행동이 아이들에게는 엄마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을 안겨줄지는 미처 몰랐다. 이렇듯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경험도 있다.



점점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출산율 하락과 달리 흑룡의 해에 태어난 첫째 때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았다. 뭣도 모르고 국공립에 대기를 걸어야지 하고선 임신을 확인하자 등록을 마쳤다. 조금 이르지만 첫째를 두 돌쯤 어린이집에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16개월 만에 빠른 연락이 왔다. 쌍방육아가 힘들지만 너무 어린 아기를 보내는 것 같아 고심 끝에 포기를 하고 몇 개월을 더 기다렸다. 다행히 집 근처 민간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고 아이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되는 그 순간 나의 봄날도 활짝 피어나기만을 바랬다.



한 달이라는 적응기간이 큰 숙제로 남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 모두 더 행복해질 것이다.'

나만의 자기 최면 같은 주문을 걸었다. 집에서 경험하지 못한 다양함 속에서 친구들의 재미를 알아가길. 골고루 먹는 식습관의 중요성을 배워가길. 첫 또래집단 속에서 기본습관을 잘 터득하길. 엄마의 진심을 담은 응원 속에서 아이는 첫 사회생활의 문턱에 성큼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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