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었어
살면서 몸으로 깨달은 가장 확실한 진리는 처음은 늘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라는 생초보의 길을 선택했다. 아이의 하루하루, 그 모든 움직임이 내겐 관찰의 대상이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머리카락이 조금만 일어나도, 평소보다 칭얼대는 날이면 어김없이 네이버 검색창을 뒤지며 이유를 찾느라 애를 썼다. 나는 내면에 소극적인 성향을 깔고 있지만 불현듯 이거다 싶으면 일단 저지르고 행동하는 열혈엄마 중 한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팔십이 되어도 내 자식에게는 온갖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 역시 변치 않는 불변의 진리일 것이다.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첫 아이를 품에 안은 나 역시 어땠겠는가. 처음이라서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나는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만큼은 우주최강이었다. 나의 첫 번째 활동력 레이다는 출산병원에서 진행하는 '베이비마사지'수업이었다. 퇴원하기 전부터 눈을 반짝이며 72일이 된 아이를 안고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로 세 정거장을 매주 빠지지 않고 출석했다. 내 아기가 오뚝한 콧날을 갖기를, 갸름한 얼굴로 자라나기를, 쭉쭉 뻗은 롱다리를 타고나기를 정성을 다하는 마음으로 아기의 온몸 구석구석을 마사지해 줬다.
나는 배우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집에 와서도 실천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왜냐하면 나를 닮아 유난히 옅은 눈썹이 아쉬웠던 나는 '남자가 그래도 눈썹이 진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손가락 지문이 닳도록 눈썹을 하루에 천 번 가까이 문질러줬던 것 같다. 모든 일에 노력의 결과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베이비마사지의 성과는 위대했다. 말 그대로 미라클, 사춘기의 문턱을 지나고 있는 열네 살 아이의 눈썹은 현재 눈썹은 아주 곧고 비교적 진한 편이다. 우연찮게 아이들의 영어선생님께 이 경험을 공유했는데 얼마 전 조카손주에게 해줬더니 실제로 눈썹이 진해졌다며 놀라워하셨다. 사소한 습관과 경험이 훗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걸 보니 괜스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누워만 있던 아이가 스스로 목을 가누고, 백일을 앞두고 뒤집기를 하기 위해 온몸을 들썩이듯이 자연스러운 현상과 함께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멘탈이 탈탈 털려 안드로메다로 향했던 2012년 어느 여름날의 부끄러운 추억을 하나 꺼내본다. 양가 가족끼리 백일잔치를 무사히 잘 마치고, 시부모님께서는 친구부부와 함께 칠순을 맞아 중국 장가계로 여행을 떠나게 되셨다. 위층에 계셔서 혼자서 버거울 때마다 도와주시던 시부모님께서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여기니 문득 불안감이 앞섰다. 오로지 독박육아는 처음인데 아기랑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래도 이내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엄마니까.' 이 마음가짐으로 수월하게 아침을 보내는 첫날이었다. 새벽 6시쯤 눈을 떠 분유 한 통을 원샷하고 오전 10시 안에 다시 잠드는 아이가 그날따라 너무나 자지러지게 우는 게 아닌가.
'아, 어떡하지. 울음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일단 안아서 재워보려고 토닥이는 데 울음소리가 금세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겁나는 마음에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으니 땀까지 뻘뻘 흘리며 악을 쓰며 울기 시작했다. 나는 비상사태라고 직감했다. 식은땀이 줄줄 나고 혼자서 해본 적 없는 아기띠를 장착하느라 10분이 10시간처럼 느껴졌다. 내가 아기띠를 어설프게 불편하게 한 탓인지 아이는 점점 더 거세게 울었다. '혹시 팔을 들어 올리다가 어디가 잘못됐나. 이건 무언가 필히 잘못됐다.' 소아과로 직행하기 전부터 자책의 감정이 나를 끌어당겼다. 내가 땀범벅이 돼서 달려가자 소아과 선생님과 간호사님도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5분여의 진찰이 끝나자 의사 선생님의 한 마디에 내 얼굴은 시뻘건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어머님, 팔은 전혀 이상이 없고요. 낮잠 잘 시간이 지나서 잠투정하느라 짜증이 엄청났네요.'
정말 의사 선생님의 진찰이 끝나자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조금 평온해졌다. 나는 민망함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아기띠도 혼자서 제대로 못 하는 엄마가 잠투정도 구별 못하고 병원으로 직행했으니 선생님도 황당하셨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고 내가 정말 무지했구나 싶은 육아의 흑역사 속 한 페이지다.
열네 살 열세 살로 성장한 연년생 형제들은 취향부터 입맛까지 판이하게 다른 극과 극 형제들이다.
아기 때부터 아이들의 기질은 판이하게 달랐다. 기본적으로 순둥순둥한 성정의 첫째는 그 흔한 방 안 서랍열기도 조심스러워 손대지 않았다. 미끄럼틀을 탈 때는 머리가 다칠까 봐 양손을 머리에 올리고 타고 내려올 때도 항상 뒤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3살 무렵까지 언제나 외식을 하러 식당에 가면 밥 먹기 전에 미리 잠들고 밥을 다 먹으면 일어나는 신통한 아이였다. 그래서 첫 손주라는 이쁨을 독차지하고 순하다고 더 칭찬받고 사랑받았던 것 같다. 벼락같이 혜성처럼 등장한 둘째는 소아과 선생님이 첫째 동생이 정말 맞냐고 되물을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항상 또래보다 머리하나가 컸던 첫째는 기어가는 단계를 건너뛰고 굳건한 다리 힘으로 갑자기 일어서더니 돌 전에 첫걸음을 뗐다. 반면에 둘째는 어찌나 몸이 가볍고 재빠른 지 70일쯤부터 목을 가누고 5개월부터 온 집안을 배밀이로 휩쓸고 다녔다. 호기심천국이라 집안의 모든 문과 서랍은 다 열어보고, 선이나 줄은 다 당겨보고 액체는 쏟아봐야 직성이 풀렸다. 나는 쫓아다니며 정리하고 치우느라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물을 채워놓은 가습기 줄을 야무지게 잡아당겨 전기장판으로 쏟아져 물바다가 되던 날, 주방문을 열어서 간장을 거실에 통째로 쏟아부은 날 나는 목놓아 꺼이꺼이 울었다. 그때마다 나의 해우소 같은 존재는 오로지 친정엄마뿐이었다. 내 전화를 받고 도와주지 못함을 마음 아파하는 엄마였지만 엄마에게 하소연을 쏟아내면 속이 한결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때를 회상하면 말 못 하는 아기랑 같이 울었던 내가 참 어이가 없지만 이제는 모든 게 지나간 추억이라고 돼 내어본다.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던 첫째가 '엄마'라는 단어를 첫 내뱉었을 때의 뭉클한 감동도 잠시 예상치 못하게 둘째의 임신사실을 확인했다. 내 인생의 황금기에서 암흑기로 접어드는 것 같은 두 가지 마음속에서 혼돈의 카오스가 시작되었다. 양쪽 부모님들은 '낳을 때 한꺼번에 낳아서 잘 키우면 되지.' 하고 위로를 건네셨지만 나는 두 아이 모두에게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할까 봐 몹시 두려웠다. 아직 첫 돌도 맞이하지 못한 첫째가 가장 예쁨 받을 시기에 동생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정확히 15개월 차이 나는 아이들을 내가 충분한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을지 의문투성이었다. 그러나 점차 현실을 직시하고 나는 더 강해지기로 다짐했다. 역시나 입덧이 시작되었지만 첫째와의 육아로 씨름하느라 그 마저도 흔적 없이 지나쳐 버렸다. 딱 한 번 나갔던 베이비위스퍼 수업도 그만둘까 망설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제는 아기띠 없이 외출은 불과했고 7개월 차 아이의 몸무게는 9킬로를 웃돌았다. 엄마는 강하고 위대하기에 뱃속 둘째와 함께하는 마음으로 9개월 무렵까지 트니트니 수업도 들었다. 점점 불러오는 나의 배와 나날이 성장하는 첫째를 바라보며 걱정과 우려를 보내는 눈길도 많았다. 그러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를 보니 출산 전에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예상치 못한 연년생 임신으로 많은 변수가 있었지만 태어날 아이가 모든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태명을 '다복이'로 지었다. 첫째의 임신이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면 둘째를 임신했을 때는 익숙한 골목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이 정도는 괜찮지. 괜찮을 거야. 엄마가 행복해야 아기도 행복하지.'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자기 위안의 결정체 그 자체였다. 첫째 때는 막달까지 입에도 안 된 커피를 둘째 임신 때는 믹스커피로 한 잔씩 마시거나 디카페인을 즐겨마시곤 했다. 또한 태열끼가 생길 수 있다고 해서 매운 음식을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둘째 때는 어찌나 면종류 음식만 먹고픈지 매운 짬뽕을 달고 살았다. 가끔 죄책감이 들었지만 임신과 육아의 기로에서 나만의 작은 탈출구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역시 나의 불굴의 믿음 탓인지 둘째는 첫째보다 뽀얀 피부를 갖고 건강하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4시간 진통 끝에 자연분만으로 순산한 첫째와 달리 둘째의 출산은 또 다른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예정일은 5월 29일, 아기는 엄마 뱃속이 좋은 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문제는 남편의 해외출장이 6월 2일에 잡혀있어 부득이하게 유도분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작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러나 촉진제를 맞고 아이는 내려왔으나 자궁문이 더디게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의사 선생님은 계속 관찰하며 작년에 순산한 거 맞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아기 심박수가 점점 떨어지는 것 같다고 걱정하셨다. 일 년에 다섯 명 정도 촉진제가 안 먹히는 산모들이 있는데 내가 불운의 확률 속 주인공이라고 했다. 결국 아기를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 제왕절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촉진제의 여파로 진통은 남아있어 괴롭지, 마취과 선생님은 움직인다고 호통치지 이중고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 담당 선생님은 조금은 특별한 나의 출산경험에 대해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산모분 의사로서 정말 궁금해서요. 자연분만이 좋은지 제왕절개가 좋은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다소 당황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생님의 지적호기심 충족을 위해 성심성의껏 대답해 드렸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출산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아기들은 엄마뱃속에서 열 달의 시간을 버티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소중한 생명의 탄생이 주는 경이로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어른이 된 우리에게도 반드시 존재하며, 아이의 성장 속에서 새로운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완벽한 엄마이기 전에 완벽한 사람이 먼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완벽했다면 마치 세상은 인간보다 신들이 훨씬 넘쳐났을 것이다. 약간은 부족해야 인간미가 느껴지고, 완벽하고 싶어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이는 건 아닐까. 나에게 있어 육아 역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후 온전히 아이를 사랑하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이기전에는 나약함이 앞섰다면 엄마가 되고 나서는 단단한 강인함을 얻었다. 지켜야 하는 가족이 있기에 세상의 온갖 풍파에 맞설 용기가 점점 생겨난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힘들고 슬펐던 기억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자식이 주는 삶의 다양한 희노애락은 우리네 삶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무한한 원동력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