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달은 기다림의 연속이었지
결혼하기 전에는 엄마가 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 다양한 감정들을 끌어들이고,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은 미처 몰랐다.
임신 5개월 차 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자 교과서에만 보던 인체의 신비를 실제로 경험했다. 초음파 사진 속곰돌이 젤리 같던 아이에게 어느새 팔다리가 생겨나고, 눈코입 또렷한 이목구비가 자리 잡았다.
임신초기 불안한 마음과 설렘 속에서 쿵쾅쿵쾅 들리던 심장박동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엄마, 만나서 반가워요. 나는 건강하게 잘 있으니까 걱정 말아요!'
세상 밖으로 나오기 전 가장 큰 걱정은 언제나 노심초사 건강하게 무탈하게 태어나는 것이었다.
입덧이 끝나자 먹덧이 시작되었고 안정기라고 생각될 때쯤 정기검진을 갔다. 내가 다니던 병원은 정확히 32주에 성별을 알려주었기에 초음파만 꿰뚫어 보던 찰나 선생님의 '역아네요.' 한 마디에 머리가 띵했다.
우리 아기가 책에서만 듣던 머리가 위로 다리가 아래로 역아라니 그 당시에는 청천벽력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32주에는 돌아와야 할 텐데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마침 임산부 명상요가를 열심히 다니던 나는 선생님께 고민을 토로했고 본원에서 열리는 특강에 귀가 쫑긋 마음이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역아회전술도 실패할 수 있다는데 대표선생님이 역아를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일요일아침 남편을 끌고 2시간 남짓 역아특강 자세를 익히고 돌아왔다. 엄마라면 모두가 다 아는 고양이자세 플러스 본원만의 특급동작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제왕절개는 절대 안 돼 나는 무조건 자연분만할 거라며 매일 빠지지 않고 열심히 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정기검진 초음파를 보던 날, 선생님이 전하는 한 마디에 나는 만세하고 쾌재를 불렀다.
'어머, 아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네요. 이제 걱정 안 하셔도 되겠어요.'
돈과 시간을 더해 명상요가로 역아를 돌린 나의 경험담은 거룩한 출산후기를 기록하는 데 한 획을 그었다.
지금도 맘카페의 명상요가 또는 역아후기의 무용담으로 인터넷 바다를 떠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임신 8개월 차, 막달에 접어들면서 일주일에 한두 번 일산으로 출근하며 직접 취재도 하고, 글도 쓰는 출판사 업무를 했었다. 다른 태교대신 내가 즐겁고 좋아하는 일을 해야 뱃속 아이도 함께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평소엔 조용하던 아이도 내가 집중해서 일을 할 땐 미세하게 꿈틀대곤 했다. 나의 작은 감정과 기분이 탯줄로 이어진 아기에게 그대로 전달된다고 생각하니 인체의 신비에 마냥 감탄하게 되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내 위를 자극하는 건지 입덧과 소화불량으로 종종 고생하는 일이 생겼다. 엄마는 누구나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나 그냥 쉽게 되는 건 아니었다. 아이를 뱃속에 품은 그 순간부터 나를 세상밖으로 낳아준 친정엄마에 대한 고마움이 물씬 느껴졌다. 결혼은 얼렁뚱땅 이루어졌지만, 엄마가 되면서 나는 진정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가을생이라 봄의 기운을 닮은 빠른 생일의 아이를 낳고 싶었는데 첫째는 춘삼월이 예정일이었다. 한 달여 남짓 아이는 쑥쑥 자라기 시작했고, 출산 2주 정도를 앞두고 정기초음파에서 3킬로를 육박했다. 아기 몸무게가 많이 늘면 엄마도 아이도 힘들 수도 있다는 말에 나는 또 바짝 각성을 하게 되었다.
때는 바야흐로 칼바람이 불어대는 2월의 끝자락, 그날부터 순산을 위한 걷기와 계단운동의 늪에 빠져들었다. 집에서 낙성대공원과 보라매공원을 한 바퀴씩 돌고 눈이 와도 쉬지 않고 나만의 루틴을 지켜나갔다. 출산 후
아이들과 다시 찾은 경사진 계단의 아찔함은 그 시절 나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했음을 새삼 느끼게 해 줬다.
노력의 결과는 언제 어디서든 정직하고 빛을 발한다. 마지막까지 아이의 몸무게는 500그램밖에 늘지 않았고, 자궁도 2센티정도 열려서 예정일보다 빨리 출산할 수 있겠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산을 앞두고 명동에서의 약속은 그렇게 또 취소하게 되었다. 맘카페에서 주워들은 카더라에는 최대한 진통을 참고 버티다 버티다 병원을 가라는 이야기가 참 많았다. 미련하게도 곧이곧대로 그 소릴 믿고 밤새 가진통으로 끙끙대다가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병원까지 걸어가겠다는 나를 억지로 택시에 태워보내며, 시부모님께서는 든든히 먹고 순산하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그러나 기진맥진해서 입맛은 이미 안드로메다로 가버리고, 열 달을 다 채웠으니 빨리 뱃속에서 방을 빼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왜 출산을 앞두고 엄마가 자꾸만 보고 싶은 건지 빨리 나의 하늘이 노래지기만을 바라고 또 바랬다.
첫째의 태명은 된소리가 좋다는 얘기에 '까꿍이'로 정하고 최대한 많이 불러주었다. 남편이 출산직후 찍은 카메라 속 동영상 메시지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까꿍아, 엄마 아빠랑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자.'
참으로 정직하고 군더더기 없이 멋없는 멘트의 전형이지만 진심이 묻어난다. 까꿍이의 탄생은 시부모님도 친정엄마도 아무도 직접 보지 못했다. 진통이 3시간 넘게 이어지고, 아직 나올 때가 안 됐나 보다 집에 돌아가시자마자 아이는 세상의 빛을 향해 힘찬 울음을 내뱉었다. 경기도에 살던 친정엄마는 결국 다음날 남동생과 함께 다시 병원을 찾았고 첫 손주와의 만남에 감격스러워하셨다. 신생아실에서부터 첫째는 순한 기질을 타고났던 것 같다. 꾸준히 임산부요가를 다닌 가장 큰 이유는 자연분만과 더불어 순한 성정의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기 때문이다. 2박 3일 입원 후 퇴원수속을 밟던 찰나 서너 명의 간호사 분들이 '순딩이 잘 가.'라며 인사를 건네는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두 번의 출산을 겪었지만, 그 흔하디 흔한 '조리원 천국'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가장 아까워하는 비용이 있듯이 나에게는 택시비와 산후조리원이 그랬다. 플러스로 만삭사진이 낯간지럽기도 하고, 내 배를 자랑스럽게 노출하고 찍는 돈이 왠지 모르게 아까웠다. 첫째는 장사하는 친정엄마 대신 시어머님께서 산후조리를 해주시고, 둘째는 한 달 동안 출퇴근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았다. 가끔은 경험해보지 못한 천국의 실체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떤 지인들은 친정엄마도 아니고 불편하게 시어머님이 산후조리를 해주냐며 핀잔 섞인 말을 건네기도 했다. 위아래층에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중간중간 불편한 상황들도 있었지만 편견의 한 꺼풀만 벗겨내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이란 없는 것 같다.
임신 기간 내내 출산육아 대백과를 달고 살며, 네이버와 한 몸이 되었던 나는 출산 후에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엄마로서 직감적으로 느끼는 본능이 꿈틀댔을지도 모른다. 시누이언니가 건네준 베이비위스퍼를 몇 장 읽다가 불현듯 이 수면습관이 과연 모든 아기에게 적용이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는 여자보다 강하다는 말처럼 내 아이는 내 방식대로 내 느낌대로 양육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한편으론 독하고 마음도 아팠지만 정체불명의 스파르타 육아는 그렇게 갑자기 시작되었다. 일단 새벽에 최대한 텀을 줄여서 통잠을 자게 하는 게 나의 첫 번째 목표였다. 남편이 잠자는 것에 예민하기도 했고, 아이도 밤에 푹 자야 쑥쑥 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두 번째, 며칠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었지만 나는 좀 더 울리는 것을 택하고 절대 안아주지 않았다. 안아서 재우는 버릇을 길들이다 보면 커 칼수록 아이도 나도 더욱더 힘들어질 거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는 아이를 관찰하다 보니 3주도 안 된 아기가 내가 동요할수록 더욱 거세게 빽빽 울고, 모르쇠로 일관하면 울음을 뚝 그치는 게 아닌가. 비록 목도 못 가누는 아기였지만 '생각하는 인간이자 사회적 동물'이라는 도덕교과서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갔다. 안아서 재우는 대신 엉덩이를 한 삼십 번 토닥이니
아이는 칭얼대지 않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 방법의 성공으로 새벽 6시까지 통잠을 자는 첫 기적은 불과 한 달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일을 하면서 밤샘을 하는 것과 아기를 돌보느라 쪽잠을 자는 건 차원이 다른 피곤함이었다. 피부는 금세 푸석해졌고 출산만 하면 쏙 하고 들어갈 줄 알았던 똥배는 어느새 내 몸과 하나가 되어 앞으로 전진하기만 했다.
다크서클은 나날이 짙어져 갔고, 머리카락은 쉴 새 없이 빠지기만 했다. '엄마'라는 새로운 타이틀을 얻었지만, '여자'라는 본연의 모습은 점점 잊혀지는 기분이었다. 한 달 동안은 밤에 숨을 잘 쉬는지 늘 코에 손을 대보는 게 일상이었고, 엎어져 잘까봐 몇 번씩 확인하느라 깊은 잠을 자지 못했다. 엄마가 숙명이라면 만성피로는 운명과도 같았다.
'아, 이래서 다들 뱃속에 있을 때가 좋을 때다. 편할 때라는 말을 했던 건가.' 선배 맘들의 뼈 때리는 현실조언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나는 신혼의 단꿈 없이 빠르게 엄마가 되었고, 육아에 익숙해져 갈 때쯤 연년생 둘째를 임신했다. 아이를 낳는다면 두 명은 낳겠다고 생각했지만 연년생을 그것도 아들 연년생은 상상밖의 얘기였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둘째의 임신 사실을 테스트기로 확인한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고작 6개월이 지난 첫째에게 엄마의 온전한 사랑을 동생과 나눠야 한다는 사실이 가혹하다고 여겨졌다. 빨리 낳아서 한꺼번에 육아를 끝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두 아이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은 아직도 남아있다. 만약 텀을 두고 낳았더라면 의젓한 첫째에게 해바라기 같은 사랑을 귀여운 둘째에게 내리화 같은 사랑을 아낌없이 주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지금보다 더 어렸고 엄마가 처음이었으며, 둘째를 낳고선 아기와 같이 울 정도로 약간의 산후우울증도 겪었다. 둘째가 4살이 되기 전까지 혼돈의 카오스 같은 육아는 상상 이상 멘붕의 연속이었다. 내 몸이 힘드니 밤만 되면 아이들을 빨리 재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짜증을 부리는 일도 허다했던 것 같다. 가끔씩 죄책감에 몸서리치기도 했지만, 정말 전쟁 같은 사랑 플러스 전쟁 같은 육아 그대로였다. 해우소처럼 엄마에게 매일 통화하며 넋두리를 늘어놓고 위로받고 버티는 시간들이 생겨났다. '엄마'라는 책임감에 두 어깨가 무거웠지만 새로운 마인드를 장착하게 되었다. 그 어떤 힘든 일이 다가와도 내 안에서 속삭이는 주문과도 같다.
'얘도 둘이나 낳았는데 내가 이 정도도 못 할까. 그까짓 거 식은 죽 먹기지.'
무수한 시련 속에서 나의 내면은 아이들로 인해 함께 성장하고 단단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치열했던 전투육아 시절이 아직도 가슴 시리게 아프다. 완벽하지 못해서 더 잘해주지 못해서 더 신경 쓰지 못한 마음속 미련 때문이랄까. 지나가는 유모차만 봐도 안쓰럽고, 아기띠가 버거운 엄마들을 보면 눈길이 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곤 한다. 먼저 문을 열어주거나 잡아주고 안전하게 지나가는지 바라보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라는 동질감 탓인지 나는 육아에 허덕이는 그녀들을 보면 마냥 애달프고 가엾다.
나이가 어리면 어린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그녀들의 힘듦이 눈에 보여서 안쓰럽다. 나의 버라이어티 한 육아 역시 현재진행 중이지만, 말하지 않아도 엄마라는 이름의 무게가 느껴진다.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성장시켜 '엄마'라고 불리게 해 준 친정엄마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엄마여서 해낼 수 있는 최대치의 능력으로 아들들이 성장했을 때, 나의 깊은 한숨과 걱정이 비로소 빛나는 눈물로 반짝이기를 두 손 모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