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서른넷에 할 거예요
나에게는 늘 계획이 있었다. 방송작가 3년 차, 막내 꼬리표를 떼기 위해 안감힘을 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이었다. 그래도 빨간 날에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며, '난 행복해'를 연신 외치곤 했다. 메인 작가 언니들의 투잡을 도우며, 사무실에서 몰래몰래 섭외 전화를 할 때는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어릴 적 나의 계획은 엄마처럼 일찍 결혼해서 딸만 셋 키우는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를 돌이켜보니, 그 어떤 계획도 현실로 이루지 못했다. 2000년대 후반, 서른을 코앞에 둔 나는 친구들과 강남과 명동의 사주카페들을 재미 삼아 들리곤 했다. 친구들은 연애운과 결혼운에 관심을 쏟았지만,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로지 방송작가로서의 성공 하나뿐이었다. 그때마다 남자친구가 있었으나, 나는 요즘 말로 '금사빠' 였기에 막상 연애가 시작되면 귀찮고 설렘의 감정도 급격히 시들곤 했다. 그래서 결혼은 늘 나와는 점점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타고난 사주팔자 역시 관이 없어서 34살 이후에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었다.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무조건 결혼은 서른넷을 넘기고 하리라 다짐 아닌 다짐을 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뜻대로 되지 않기에 드라마틱하고 재밌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의 소용돌이는 내 삶에 갑작스럽게 찾아들었다. 서울시 소속 방송국의 특성상 시장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영향을 피할 수 없는 곳이었다. 당시 나는 TV 쪽에 근무했는데, 대대적인 개편으로 하루아침에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말았다. 메인피디님과 나는 방송국 소속이었지만 메인, 서브작가 언니는 프리랜서였기에 힘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떠난 언니들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컸고, 나는 둥지 잃은 새처럼 잠시 방황도 했다. 그러던 중 친한 PD동생이 라디오국으로 옮기며 서울시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작가를 제안했고, 나는 꿈꾸던 '라디오'라는 문턱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라디오 일은 비교적 단순했고, 금세 틀은 잡혀 나갔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시간적 여유로 TV 쪽 언니들의 섭외전화 알바를 두 탕 세 탕 이어나갔다. 그러다가 나를 좋게 본 다른 팀 언니의 권유로 우연히 설날 특집방송에 합류하게 되었다. 일반인 섭외는 자신 있었지만, 연예인 섭외는 처음인지라 시작부터 난관 그 자체였다. 고정수입 외 부수입이 늘어가는 재미에 특집방송까지 네 개의 프로그램을 맡게 된 것이다. 특집방송 기간은 일주일이 체 남지 않았고, 오랜만에 밤샘을 이어나가자 몸에서는 즉각적 반응이 나타났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버티고자 했으나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고 일의 능률은 점점 떨어졌다. 마지막에는 내가 왜 이 프로그램을 한다고 해서 이렇게 사서 고 생을 하나 일에 대한 회의감마저 밀려왔다. 정말 딱 죽겠다 싶을 때 생방송이 끝이 났고 나는 기진맥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날 밤 수원역으로 픽업 나온 남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누나의 얼굴과 행색이 흡사 노숙자 같아서 몰라봤다고 할 정도였다. 평소 4시간을 자도 여전히 끄떡없는 나지만, 그때 나는 난생처음 이틀 내리 잠만 잤다. 기분 좋게 숙면을 취하고 나니, 바로 나의 현실이 자각되었다. '이 방송국과의 인연은 여기 까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을 체 못 쉬고 몸이 근질근질해서 상암, 여의도, 강남 등 거리 신경 쓰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이력서를 넣었다. 생방송은 나의 체질이 아니다 여기며, 지금은 잘 알려진 '한국인의 밥상'에 초창기 면접을 보러 간 기억도 난다. 경기도 본가에서 서울은 어디든 왕복 3시간 이상 구미에 맞는 자리는 생각보다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졸업 후에 연락이 뜸했던 같은 과 동기오빠로부터 연락이 왔다. 뜬금없는 소개팅 제안이었다. 자만추로 연애를 즐겼던 나는 믿기 어렵겠지만 단 한 번의 소개팅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일도 뜻대로 안 되고, 나이 서른에 생애 첫 소개팅이라니 문득 기분전환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소개팅을 앞두고 내가 물어본 조건은 단 하나였다. 얼굴이 잘생겼냐, 돈이 많냐, 직업이 뭐냐도 아니고 오로지 키가 크냐는 질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남자키가 175 이상은 되어야지 나만의 기준점이 아주 확고했다. 187이라는 대답에 나는 오케이를 외쳤고, 소개팅은 LTE급으로 진행되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강남역 6번 출구 뉴욕제과 앞이 나에게도 첫 소개팅 만남의 장소였다. 소개팅은 처음인지라 어찌나 어색하던지 전 남자 친구 현 남편 역시 말수가 적어 진을 빼고 있었다. 나쁘지 않았지만 막 좋다는 느낌이 안 들어 세 번은 만나보고 결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은연중에 결혼은 착한 남자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수는 적지만 볼수록 다정하고 착한 지금의 남편과 만난 지 한 달 만에 연애를 시작했다. 그 무렵 컴퓨터 채팅을 결합한 신생 인터넷 방송에 작가로 취업도 되었다. 마음을 내려놓으니 일도 연애도 순조로운 나날들이었다. 나는 그 당시 크게 흠잡을 때 없는 사람이라 부담 없이 연애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어찌 된 연유인지 남편은 만난 지 삼 개월 만에 내게 결혼하자고 졸라댔다. 그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결같이 NO였다. 결혼은 신중한 문제기 때문에 적어도 일 년 이상은 만나보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서른이 되니 부모님께서는 가끔 결혼 얘길 꺼내셨고, 그때마다 나는 '작가로 성공해서 결혼은 서른넷 지나고 할 거예요.'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늦은 퇴근과 잦은 주말 외출을 의심하셨지만, 나의 연애는 그렇게 무탈하게 잘 흘러갔다. 그러던 중 남편이 정말 나의 운명의 짝이자 결혼상대임을 직감하는 일을 겪게 되었다. 사회에서 알게 된 지인들을 오랜만에 만났고, 그중 한 친구는 이미 결혼을 한 기혼자였다. 급 바빠진 나를 의아해하던 친구들에게 소개팅썰과 연애 중임을 고백했다. 무심코 거주지 얘기가 나왔고, 친구 남편이 나이, 살았던 동네, 출신학교가 비슷하다는 공통점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상대방에게 통화를 했고, 동시에 '친구'라는 답변을 들었다. 아니 세상이 좁아도 이리 좁을 수가 있나. 한참이 지나 본 그들의 결혼앨범 속에는 서로를 전혀 알지 못했던 남편과 내가 각각 신랑 측 신부 측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6개월이 지나자 양쪽 가족들에게 비밀연애가 들통나고 말았다. 자꾸만 아버지 차를 빌려 외출하는 아들을 수상히 여기셨고, 우연히 남자 친구차에서 내리는 나를 사촌동생이 목격하면서 동네방네 소문이 났다. 갑작스럽게 지금의 시부모님 댁에 초대를 받았고, 나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는지 바로 결혼하라고 성화셨다. 나와 엄마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말이 없던 아빠께서 시댁의 상견례 요청을 뚝딱 허락하시면서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귄 지 9개월 만에 결혼 날짜를 잡았고, 가장 좋은 길일을 골라 다음 해 6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나의 결혼계획은 마치 인생의 후반전을 알리는 전초전 같았다. 내 나이 벌써 40대 중반, 결혼 14년 차 평범한 주부가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누구나 흔하게 하는 말처럼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가 맞다'. 그러나 어차피 하게 될 후회라면 해 보고 후회하는 게 현명하다. 또 하나, 열렬히 운명의 상대를 찾는 당신이라면 그 인연의 끝은 어느 순간 당신 곁에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인연이 운명이 되어 '결혼
'이라는 인생을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라는 터널에 첫 발을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