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이 무서운 이유
특히 응답하라 1997은 그 시절 양대산맥으로 불리던 젝스키스와 H.O.T 팬클럽을 소재로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드라마로 기억된다. 동시대를 살았던 나는 신나는 노래에 잠시 심취했을 뿐,
열렬한 팬심을 가져보지 못하고 무던하게 지나쳐왔다. 솔직히 말하면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라
타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마음이 더 컸으리라.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뭐든지 단정 지을 수 없다고 했던가.
평소처럼 학교 통학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재촉하던 어느 날
늘 마주치는 공원에서 눈부신 조명과 신나는 음악소리가 내 발길을 멈추게 했다.
단순한 호기심이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지는 그때는 정말 몰랐다.
운 좋게 비어있는 앞자리를 향해 의자를 당겨 전진하던 그때
불꽃이 번쩍하면서 노래하던 남자가수가 씽긋 웃으며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내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이름도 낯설고 얼굴도 처음 보는 '신인남자 듀오'라는 소리에 그들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핸드폰으로 뚝딱 검색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집까지 가는 길에 그룹명을 되뇌고 또 되뇌었다.
집에 와서도 나를 향해 보여주던 눈웃음이 어찌나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내 감정의 이유를 도무지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좋아하는 감정인데 이성을 열렬히 좋아하는 감정과는 또 다른 본질의 감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누군가를 향한 동경과 열정의 감정, 팬심 그 자체였다.
만사 제쳐두고 컴퓨터로 검색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그룹명과 멤버명을 빠르게 훑고, 덩달아 팬카페를 검색해 보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소심함의 결정체였던 내가 무슨 생각으로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옛말 틀린 법이 없듯이, 그 무섭다는 늦바람은 나를 향해 서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다음 카페가 활성화되던 때, 스무 명 남짓 회원들이 모여있는 신생카페에 첫 문을 두드렸다.
곧바로 가입인사를 올리고, 밤마다 채팅에 참여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러던 중 일주일 만에 명동에서 첫 정모가 잡혔고 서울, 대구, 광주 등 전국 각지에 모여있는 20대 이상 팬들이 일사천리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각자 좋아하는 멤버는 달랐지만, 공통의 애정분모를 가졌던 우리였기에
대화도 술술, 손발도 척척, 말 그대로 최강의 조합이었다. 따분한 학교생활을 이어가던 내게 팬카페는 일상의 활력소가 되어주었고, 일면식도 없던 카페멤버들과는 특별한 우정을 쌓아나갔다. 팬카페 멤버 중에는 연예인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언니가 있었는데, 그분의 고급정보로 그들이 모델로 서는 패션쇼의 티켓을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실물을 다시 볼 생각을 하니 두근두근 설레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대망의 그날, 지금도 현존하는 그 패션쇼에는 연예인, 관계자, 모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현란한 패션, 화려한 조명, 카리스마 넘치는 모델들의 워킹까지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에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드디어 애정하는 가수들의 첫 패션쇼 데뷔, 무대와는 또 다른 모습에 우리는 팬심을 남발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냈던 일들을 다 함께 경험하는 일들도 점점 많아졌다. 그들이 출연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방청객으로 참여하는 알바로 용돈 버는 재미도 느꼈었다. 소녀팬들이나 달릴법한 공개방송을 보겠다고
추운 날씨에도 기다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팬의 입장으로 그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하는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 때는 지상파보다 케이블 채널의 가수활동이 빈번한 시절이었다. 여러 그룹들을 겨냥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제작되었는데 팬이 좋아하는 스타를 위해 도시락배달을 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카페에서 같이 활동하던 동갑내기 친구가 사연을 적어 보냈고, 그 사연으로 방송출연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도 소극적이던 친구는 직접 출연을 꺼리게 되었고 나를 비롯한 세 명이 대신 방송에 출연
하게 되었다.
그냥 방송출연도 떨리는데 좋아하는 가수와의 동반 TV출연이라니 설레면서도 부끄러움이 함께 몰려왔다.
그 당시 주변 지인들은 나의 열정과다 이중생활을 아는 이가 없었기에 혹시나 누가 알아챌까 봐 살짝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케이블 채널의 촬영 분위기는 나의 생각과는 달리 무척이나 자유분방했다.
10대가 아닌 20대의 나이 든 팬들을 위한 배려였는지 감독님부터 VJ까지 우리가 긴장하지 않고 방송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방송국 곳곳도 구경시켜 주었는데 나이 든 팬의 슬픈 비애라고 할까 한 가수 겸 탤런트는 내가 작가인지 알고 90도로 인사를 해서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직접 그들을 마주치고 나니 나의 애정도는 더더욱 급상승했고, 나의 비밀스러운 팬심은 그들의 전성기와 함께 그칠 줄 몰랐다. 난생처음 음반을 구입하고, 장식용으로 자리하던 아빠의 낡은 오디오는 내 차지가 되었다. 대학시절까지 통금시간이 있었던
나는 적극적인 활동으로 귀가시간이 늦어져 아빠의 꾸지람을 듣고 펑펑 우는 날도 있었다. 지금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더 순수했던 날들의 열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는 그들도 해체와 더불어 각자의 길을 걷고 있고, 잊고 있던 지난날의 추억은 그들의 '슈가맨' 출연으로
다시 회상되었다. 비록 공식팬클럽으로는 활동하지 못했지만, 카페에서 알게 된 두 명의 인연은 나의 결혼과
육아를 함께해 준 23년 지기 절친으로 종종 얼굴 보는 사이로 지내고 있다. 아직도 나의 작은 앨범 속에는
추억의 한 페이지처럼 그들의 콘서트 사진이 몇 장 꽂혀있다. 남편은 가끔 시기 어린 질투를 날리지만 늦바람에 빠졌던 그 시절의 즐거움은 남들이 모르는 나의 또 다른 단편이었을지 모른다.
꼬꼬마로만 생각했던 큰 아들이 내년이면 벌써 중학생이 된다. 아이들이 부쩍 자라고 나니 이제는 나의 꿈과 열정을 키우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새로운 시작의 두려움이 더 큰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향한 뜨거운 애정에 다시 빠져들고픈 색다른 일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