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인연의 다양성

by 가온결

얼마 전, 나의 가장 오랜 인연으로 알고 지내는 동생을 만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근처 출판사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내가 결혼할 때쯤 청첩장을 건네며 알게 되었고,

그 후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바쁜 점심시간을 쪼개 얼굴을 보는 것이 루틴이 되었다.


내가 가장 자주 하고 좋아하는 스트레스 해소법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맛있는 식사와

커피타임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하고 단순하다면 단순한 일이지만,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내가 얻는 마음의 위안이 더 크다고 할까. 머리 복잡하고 심난한 일들이 가끔 나의 발목을

잡을지라도 집에서 전정 긍긍하기보다는 'GO OUT' 나를 향한 외침이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녀와 내가 오래간만에 만나 긴긴 수다를 떨어본 지가 언제쯤인지 가늠되지 않았다.

한 살아래 동생이지만 싱글인 골드미스 그녀와 십여 년 전 결혼에 입문한 나는 기혼의 아줌마.

공통점은 하나도 없지만 우리 사이에 대화는 막힘없이 술술 물 흐르듯 흘러갔다. 그러다가 문득

나의 지인들과의 '인연'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전에 말했듯이 인터넷 팬카페에서 만난

두 명과의 인연은 20여 년째 이어오고 있고, 매년 생일파티를 함께하는 6인은 나의 또 다른 인터넷

인연이다. 사는 곳도 나이도 스타일도 성격도 모두 다른 우리지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아줌마이다.

전국구 카페에서 나와 마음에 맞는 이를 점차 알아가고 만남을 이어간다는 것이 처음엔 다소 어색하고

걱정되기도 했었다. 소심의 결정체, 친정아버지는 엄마와의 통화 너머 딸이 안면부지의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사기라도 당할까 봐 내심 걱정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한 사람, 두 사람 새로운 인연을 채워갈수록 두근두근 첫 데이트의 설렘도 느껴졌다.

다들 어찌나 정이 넘치는지 만날 때마다 작은 거 하나라도 챙겨 오는 마음 씀씀이에 내가 더 감사하고,

잘해야겠다는 자아성찰의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 인생의 선배들이 모여있는 언니들과의 만남에서는

자식문제에 관한 마음가짐, 세월의 교훈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들이 참 좋았다. 한편으론

내가 마흔이 넘은 이 나이에 어딜 가서 '막내'라고 예쁨을 받을 수 있을까. 무한긍정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날이면 괜한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날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던 동생이 전하는 말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울렸다.

'정말 흔하지 않은 인연인데, 그런 분들을 만난다는 건 언니의 인복이다.'

평상시 내가 조금 손해 보고 말지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나도 사람인지라 혼자서 화를

삭힐 때가 많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난 감정이 순간의 찰나이지 오래가질 않는다.

그럴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의 연결고리를 끊어주는 건 단순하게 '역지사지'의 정신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이런 결론을 내리면

내 마음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결 편안해진다.


학창 시절, 유난히 소심했던 나는 먼저 대화를 건네기가 참 어려웠던 것 같다. 누군가 내게

먼저 말을 걸어준다면 삼켰던 말들을 와르르 쏟아낼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다. 그랬던 나인데

이제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인연들을 쌓아가며 무척이나 단단해졌음을 느낀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는 말에 백 프로 공감하는 이유아기도 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만나, 평생친구로 여기고 간도 쓸개도 다 빼줄 것처럼 챙겨주던 한 친구가 있었다. 뒤늦게 나에 대한 그녀의

진심을 알고, 배신을 당했을 때 두 달 내내 쉴 새 없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마음이 유독 약해졌던 시기이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감에 지금 생각해도 슬픈 인연의 한 페이지였다. 나보다 더 분노해 주고, 더 많이 욕해주고, 맞장구 쳐주는 다른 인연들 덕분에 긴 터널 같은 시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의 인간관계를 돌이켜보면, 스물일곱 살 전후로 나뉠 정도로 그 당시 가슴 시린 상처가 인생공부의 밑거름이 되었다.


기분 좋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그녀와의 다음을 기약하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다간 불현듯 옛 추억의 한 단편이 떠올랐다. 하하 호호 마냥 즐겁기만 하던 중학생소녀 시절, 우리는 꽤 오래 떨어져 지내며 연락을 이어갔다. 삐삐도 흔치 않았던 그때 우리의 연락수단은 끝날지 모르는 편지였다. 편지의 주내용은 서로가 짝사랑하던 대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눈을 반짝이며 읽어 내려가던 기억이 난다. 이 몹쓸 기억력이 발현되어, 동생의 짝사랑 오빠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고 동생에게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너무나도 놀라는 동생의 반응, 본인도 잊고 있던 짝사랑의 이름을 듣고 수줍은 옛 추억이 떠오른다고 했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그녀와의 인연의 세월을 되새겨보았다. 나보다 한 살 어린 그녀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골목어귀에서 우연히 만난 동네동생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오가며 종이인형을 직접 그리고 오려서 옷을 만들어 노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었다. 가만히 손가락을 헤아려보니 우리가 알고 지낸 지 무려 36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의 가장 오래된 인연으로 순수했던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해 주는 그녀도 내 소중한 인연의 든든한 울타리로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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