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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과 그림자 Oct 05. 2024

<도해도 그리기>

 현진은 소마미술관*의 소마아트파운데이션 수업에서 과거의 기억나는 공간과 시간을 떠올리라는 말에 난처했다.


'인상적인 시간과 공간이라?'



현진은 교사를 하는 동안에는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바빠 과거를 돌아본 적이 없었다. 매일 그날 수행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테디가 죽고 태호가 학교를 그만두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태호는 아직도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 있다. 현진은 학교를 그만두었고 이제 한가하게 미술 수업과 소설 수업을 듣고 있지만, 아직도 과거를 돌이켜 보는 작업은 익숙하지 않았다


태호와 관련된 사건은 계속 떠올리며 되새겨 봤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억하지는 않았다. 과거의 공간들과 사건들이 특별히 생각나거나 후회스러운 적도 없었다. 생생하게  아름답게 느껴졌던 순간이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도 떠오르지 않았다.


 미현 선생님은 수강생들에게 반복해서 지시를 내렸다.


“살면서 기억에 남거나 소중하게 여겨지는 공간들을 떠올리고 도해도를 그리세요.”


선생님은 잘 생각해 보면, 소중했거나 인상적인 장소나 순간들이 있을 거라고 했다.


“장소가 떠오르면 기억이 나는 대로 도해도를 그려 기억 속의 일상을 재구성하고 글도 써보세요.”


미현 선생님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학생들 옆에 서서 각자의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작업해야 하는지 전체 학생들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수업이란 게 사람을 짜내게 하네요. 저는 과거를 잘 기억 못 해요."


하영은 미현 선생님께 솔직한 심정을 어깨를 으쓱이고 양손을 펴서 위아래로 움직이며 말했다.

 작만 보면  나보고 어쩌라고’   말하고 있었다.


수강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미진은 일곱 살 때 외할머니 집에서 1년간 지냈을 때 외로웠던 기억을 말했다. 나비들이 그려진 오래된 옷장과 창호지가 발린 문, 툇마루 등이 떠오른다고 했다.

수아는 이사를 하도 많이 해서 이사 갈 때마다 침대에 누워서 본 천장들이 차례로 다 생각난다고 했다.


귀희는 다른 수강생들이 선생님과 대화하는 동안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구석구석 기억해서 정확하게 지도를 그려 놓았다. 짧은 시간에 그려낸 귀희의 도해도를 보자 수강생들은 어렴풋이 무엇을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았다.


 미현 선생님은 귀희 씨처럼 해도 되고 다르게 해도 된다고 했다. 조교를 시켜  슬라이드로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을 비춰 주었다.


현진은  수강생들이 털어놓는 기억들을 들으며 머릿속의 파일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행복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을 조그만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지금의 남편 경수와 결혼하면 계속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20년 이상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의 공간과 사건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펼쳐지며, 그 순간을 도해도로 그리기 시작했다.   



                                        *



 현진은 경수와 학교 근처의 서울대공원을 자주 놀러 가곤 했다. 현진은 동물들을 보는 것과 리프트 타는 것을 좋아했다.

 추억 속에 떠오른 날, 현진과 경수는 오전 강의를 다 듣고 중앙도서관 식당에서 만나 학교 교문으로 걸어 내려왔다.


날씨가 흐렸다. 경수는 투명한 비닐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둘은 과천 가는 버스를 타며 동물원을 갈지 미술관을 갈지 의논했다. 현진은 비가 올 것 같으니 동물원을 가지 말고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자고 했다.

버스는 미술관까지 가지 않았다.

 현진과 경수는 대공원역 4번 출구 셔틀버스 타는 곳에서 내렸다. 버스에 내리고 나서야 셔틀버스는 그날 운행되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둘은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현진과 경수는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는 텅 빈 플라타너스 길을 같이 걸었다.  간간이 비가 내리다 멈추다를 반복했다.

해가 쨍하게 비칠 때에도 빗방울이 햇빛을 반사하며 떨어졌다. 바람도 산들바람이 불다 멈췄다 했다.


현진과 경수는 깔깔거리며 무슨 거리에 이렇게 사람이 없냐며 우리가 거리를 통째로 대여한 것 같다고 떠들었다. 삼십 분 이상을 걸어 마침내 국립현대미술관에 도착했다. 사실 현진은 시간과 거리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다 비치는 햇빛에 빛났던 동그란 플라타너스 열매들의 실루엣들이 커다란 오각형의 별 같은 잎들과 함께 떠올랐다.

미술관 앞에는 우산꽂이 함이 있었다.

입장하기 전에 우산을 꽂고 직사각형의 작은 알루미늄 열쇠로 잠근 후 보관하는 식이었다.


현진은 실수로 열쇠를  우산꽂이함에 빠뜨려 버렸다. 경수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이 수십 개 꽂히게 만들어진 꽤 크고 무거운 우산꽂이함을 뒤집어 열쇠를 꺼내 주었다.

 현진은 경수에게 열쇠를 받고 기뻐하며 무거운 우산꽂이함을 제대로 돌려놓은  경수에게 박수를 쳤다. 그러자 현진이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고 있던 매끄러운 작은 열쇠가 다시 우산꽂이통에 빠져 버렸다.


현진은 고의로 열쇠를 던져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경수는 당황해하는 현진에게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조금도 화내거나 짜증 내지 않았다. 경수는 미소를 띠며  한 번 더 무거운 우산꽂이통을 뒤집어 열쇠를 찾아 주었다.


현진은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에 전혀 화내지 않고 두 번이나 무거운 우산꽂이통을 뒤집어 열쇠를 꺼내준 경수라면 평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았다.

정말 미안했고, 감사했다.


그때 느꼈던 고마움과 다정함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소마 미술수업 시간에 떠올랐다. 서랍장에서 일기장을 꺼내 읽고 그 시절 공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기억들이 파편적이기도 하고 총체적이기도 했다.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 같지만, 정작 자신과 경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현진이 그리려니 명확하지 않았다.


그냥 웃었고 감탄했고 미안해하기도 했던 것 같다. 미술관에서는 어떤 그림들을 봤는지 불분명했다. 당시에 여러 번 미술관을 갔기 때문에 상설 전시장에 있었던 작품들이 기억에 남긴 했다. 미술관에도 현진과 경수, 관람 도우미밖에 없었다. 둘은 관람객이 없어 휑한 전시장을 관람한 후 미술관을 나왔다.


현진과 경수가 걷고 있을 때, 마침 미술관을 빠져나오던 승용차가 그들 앞에 섰다. 친절한 운전자가 차 창문을 내리고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데까지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감사인사를 하며 차를 탔다. 경수는 운전자 옆 좌석에 탔고, 현진은 뒷 좌석 안쪽으로 놓인 그림 옆에 앉았다.


운전자는 남자였는데 현진은 분홍색 나무 그림을 보고 물었다.


"그림을 보면 여자분이 그린 것 같아요."

 "맞아요. 지인인  여류 작가의 부탁으로 대신 왔어요."

운전자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현진과 경수는  지하철 역 앞에서 감사인사를 하며 내렸다. 차가 지나가고 나서도 둘은 한참을 손을 흔들었다.

현진이 전혀 모르는 사람의 차를 탄 경험이 그때뿐이었다. 돌이켜보니 특별한 경험이었다. 


현진은 오래된 기억을 그림으로 그렸다. 현진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고 항상 생각했다. 시간은 불가역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현진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볼 수도 없고 촉각으로 느낄 수도 없었다.


  현진은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자, 생생한 기억들이 떠올라  도해도를 그렸다.

현진은 그녀 안에 존재했던 수많은 공간들과 흘러간 자신을 마주했다. 수많은 결정들과 감정들, 생각을 행동으로 실현시켰던 욕망들이 몰려와 가슴의 설렘을 만들어 냈다.

태호보다 조금 더 나이 든 자신과 남편의 모습이 귀엽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과거의 공간으로 돌아가 과거를 추억했다.


현진은 하루하루가 각각의 의미와 공간을 지닌 채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자. 써보자. 이 순간도 내 기억 속에 저장되어 어느 날 끄집어내어 지겠지.'


현진이  도해도 작업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미현선생님은 "발표하시겠어요?"라고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소마 미술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에 위치한 미술관, Seoul Olympic Museum of Art의 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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