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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 (2025) 회복은 더디고 성장은 어렵다

<세계의 주인> (2025) 리뷰

by 테리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돌아온 윤가은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영화 <세계의 주인>은 11월 4일 기준 7만 관객을 돌파했다. 각각 51,264명, 56,265명을 기록한 <우리들>, <우리집>을 넘어 그의 필모그래피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 예술영화관을 중심으로 극소수의 상영관에서만 만나볼 수 있던 이전 두 작품이 5만 명을 넘긴 것도 충분히 유의미한 기록이었다. <세계의 주인>은 근면한 자세로 꿋꿋이 걸어온 윤가은 감독에게 보답하듯, 앞선 두 작품보다 큰 규모로 상영되며 전국의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는 이미 큰 결실이다. 비록 한 지점당 하루 한 회차 상영에 그치고 있지만, 멀티플렉스 3사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는 점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윤가은 감독이 차기작으로 돌아온다면 극장도 관객도 이제 그 이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세계의 주인>은 지난 9월 토론토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한국 영화 최초로 초청되었고, 지아장커 감독이 설립한 핑야오 국제영화제에서는 국제신인경쟁 부문에서 심사위원상과 관객상을 수상했다. 지아장커 감독은 윤가은 감독에게 축사를 건네며 중국에 <세계의 주인> 같은 멋진 한국 영화가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거장의 넉넉한 마음씨에는 한국인으로서 고마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다. 지아장커 감독의 호의가 무색하게도, <세계의 주인>이 중국에서 어떤 성과를 거둘지는 그다지 시급한 문제가 아니다.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

봉준호 감독은 일찍이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를 지지해 왔다. 그는 <우리들>을 보고 장혜진 배우를 <기생충>에 캐스팅했으며,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차세대 감독 20인 리스트에 윤가은 감독의 이름을 올렸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더불어 아역 배우가 살아 숨 쉬게 하는 3대 마스터"라고 칭송했다. 다소 과찬으로 들릴 극찬을 남겨 언제든 다른 지면에서 해당 발언을 인용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당시 단 두 작품만을 공개했던 윤가은 감독의 성취를 과장해 표현한 건, 국내 관객에게 그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자 한 의도였으리라. 봉준호 감독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해 온 '윤가은의 세계'는 국내에서 더 널리 조명받을 필요가 있다. 국내 영화관 방문 추이는 팬데믹 이후 차츰 회복하나 싶더니, 올해 들어 전대미문의 쇠퇴를 당면했다. 관객들은 어차피 볼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며 국내 감독들에게 최소한의 기대마저 거두었다. 전세계적으로 영화 산업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한국 영화의 현재가 이처럼 대중의 신뢰를 잃은 건 유례없는 일이다. 국내 관객의 마음을 되돌리려면 여전히 훌륭한 한국 영화가 존재함을 설득해야 한다. 그들을 다시 스크린 앞에 앉혀 생각을 재고하도록 해야 한다. <세계의 주인>의 흥행은 무너진 한국 영화 생태계에도 유능한 신진 감독들이 탄생하고 있음을 알리는 생존 신호가 될 것이다. 리뷰에 앞서, 이 영화가 준 정서적 충만함과 감동 못지않게 몇몇 굵직한 비판점도 발견했음을 밝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만큼은 꼭 극장에서 관람하기를 권하고 싶다. <세계의 주인>은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픽션 면책 조항의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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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주인>은 전작들에 비하면 나이가 많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올해 개봉한 <해피엔드>나 <3학년 2학기>처럼, 성인으로의 변태를 목전에 둔 고등학생 3학년 '이주인'의 시선을 쫓아 한국의 학교와 가정, 사회 전반을 관찰한다. 감독의 이전 작품들이 그랬듯 영화 속 인물들은 격동하는 관계에 혼란을 겪으며, 부쩍 커버린 신체에 걸맞은 성적 호기심을 심탐한다. 윤가은 감독은 지금까지 다루지 않은 성과 사랑이라는 난제에 도달했다. 페이지를 넘겨 다음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의 영화 세계가 성숙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세계의 주인>에 처음 대두한 성적 본능은 성폭력 피해를 안티테제로 등극시키며 서사의 추동을 이끄는 중심축으로 삼는다. 성이 새로운 소재로 등장했을 뿐, 그것을 활용하는 방식과 구도는 전작들의 관행을 따른다. 우정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이선'은 왕따 피해자였고, 가정의 존속을 소망하는 <우리집>의 '이하나'는 부모의 이혼을 막지 못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단체,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허구임을 밝힙니다."


성폭력 피해라는 주제가 호출하는 윤리적 무게는 훨씬 더 엄중하다. 영화 시작 직전 삽입된 픽션 면책 조항은 오히려 조두순 사건을 또렷하게 상기시킨다. 출소 반대 서명과 인터넷 청원, 화젯거리를 쫓아 범죄자의 자택 앞으로 찾아간 유튜버, 소란으로 피해를 호소하는 동네 주민 등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가져온 광경은, 윤가은 감독만의 강점으로 평가받던 특유의 리얼리즘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카메라 화면으로 달아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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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은 평생 씻지 못할 깊은 상처를 남기며, 한 사람의 인생과 영혼을 파괴한다."


작중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는 동시에 성폭력 생존자이기도 하다. 주인이 겪는 표면적 갈등은 같은 반 친구 '장수호'와의 대립이다. 주인은 한 명의 생존자로서 수호가 만든 서명문의 문장에 맹렬히 반대한다. 어른들이 다 모이고 나서야 성폭력 피해를 진지하게 고백하며 "내 인생 망가지지 않았어"라고 외친다. 존엄을 잃지 않고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의 삶을 내세워, 영화는 현실의 성폭력 생존자들과 연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주인과 수호의 서사는 흥미로운 시작과 달리 결말에 이르러 기묘하게 종결된다. 둘 사이 감정의 골은 홀연히 메워져 있다. 주인이 수호의 동생 누리를 꼬집는 장면도 간접 묘사에 그친다. CCTV 화면 속에서 주인이 책상 밑의 누리를 발견하고 이내 꼬집는 장면은 소리 없이 비칠 뿐, 두 인물의 대화와 행위의 맥락은 드러나지 않는다. 추측건대 주인은 누리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내어 말하기를 마치 그 시절의 자신에게 종용하듯, 누리의 어깨에 상처가 날 때까지 꼬집는다. 성폭력 피해에 비해 어깨의 상처는 으레 감당할 만할 고통일 테니. 그러한 상상 없이는, 엔딩 장면에서 수호가 주인에게 장난으로 갚아주는 감정의 전환을 납득할 수 없다. 갈등의 해소 과정 전반이 적잖이 중략된 탓이다.


단짝 친구 '공유라' 역시 과거를 숨긴 주인에게 배신감과 미안함을 느끼지만, 그 복잡한 감정을 극복하는 모습은 거의 다뤄지지 않는다. 유라는 성관계를 소재로 한 만화를 그리며, 주인에게 당연히 해봤겠거니 지레짐작하며 성애 묘사에 관한 자문을 구한다. 탐폰과 산부인과 이야기를 일부러 더 소란스럽게 꺼내 드는 장면에서도, 처녀막 때문에 항문 초음파로 대체하지 않냐는 친구의 말은 주인에게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트리거가 된다. 유라도 엔딩 시점이 되면 주인을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카메라에 담긴 군중 속 타자화된 주인은 곧바로 동영상을 뚫고 나와 유라의 단짝 친구 주인으로 돌아온다. "나 진짜 괜찮아"라는 방어기제로 무마하지 못한 둘 사이 불화는 어느새 사라져 있다. 영화는 갈등이 누그러지는 장면은 공백으로 두고, 인물의 감정선을 주인의 실없는 농담처럼 눙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는 카메라 화면 안으로 달아난다. 주인의 여성 멘토 '한미도'는 사전 협의 없이 봉사 현장에 남자친구 '박찬우'를 데려온 주인을 꾸짖었다. 주인과 미도가 화해하는 공간은 미도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의 주방이다. 일하느라 주인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미도는 "설거지해, 저기 있는 거 다 해"라고 툴툴대며 곧잘 마음을 푼다. 다툼이 있던 날을 언급하는 직접적인 대사가 없어, 관객은 미도와 주인의 감정 변화를 제스처와 뉘앙스에 의존해 쫓아야 한다. 이 장면은 사실상 주인이 누리를 꼬집는 CCTV 장면, 유라가 주인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장면과 같다. 능력 부정인지 의지 부정인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결정적인 순간을 담아내기를 몹시 주저한다.


평면적인 캐릭터로 남용되는 주변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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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둘러싼 주변 환경은 작위적이다. 어른들은 '주인의 세계'를 필요 이상으로 침범하지 않는다. 담임 선생님 '양보아'는 주인의 투정과 장난을 받아줄 만큼 좋은 어른이다. 어머니 '강태선'은 과오를 자책해 잠 못 이루면서도 알코올로 심신을 달래며 어떻게든 버텨낸다. 남동생 '이해인'은 가해자 삼촌의 편지를 마술처럼 감춰두는 사려 깊은 아이다. 윤가은 감독은 친족 성폭행 이후 살아남은 주인의 존엄을 완결된 상태로 제시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며, '지금의 주인'이 어떻게 상처를 회복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 하는지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주변 인물과 환경은 흐릿하게 처리된다. 이로 인해 영화 속 주인의 세계는 인공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시공간으로 변모한다. 냉정히 말해, 주인은 운이 좋은 편이다. 실제 성폭력 피해자의 생환은 이보다 험난하다. 현실에서는 그 사실조차 밝히지 못하는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세계의 주인> 속 주변 인물 군상은 선인 일변도다. 마치 피해자의 안위를 지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가상의 연기자들처럼 자리한다. 성폭력 생존자가 실제로 겪을 법한 숱한 차별과 몰이해는 스크린에 제대로 담기지 않는다.


미도는 봉사장에 찬우를 데려온 주인을 과하게 꾸짖는데, 이 장면의 연기와 대사는 극도로 과장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미도 또한 성폭력 피해자였음을 관객이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기에, 인물의 감정선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데 실패한 셈이다. 봉사 모임의 반장 이인주는 미도를 어르고 달래다 "그만 좀 해"라고 외칠뿐이다. 이 사건은 봉사자들 사이에서 다시 언급되지 않고, 그들이 다시 모이는 건 미도의 재판을 방청하며 함께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서다. "그러면 언제 놀아?" <우리들>의 '이윤'이 했던 대사를 상기하듯, 영화는 사소한 다툼보다 연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봉사 모임 역시 똑같은 인간관계의 연속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폭력 생존자의 회복과 연대를 돕는 주변 인물들은 대부분 서사의 편의를 위한 평면적 캐릭터로 남용된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말이다.


남근적 위압감의 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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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홀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때 독서실에는 주인과 헤어졌던 시점의 찬우와 그의 친구 일행이 들어온다. 주인은 서명 문제로 한바탕 수호와 다툼을 벌인 뒤다. 친구 일행은 주인을 뒷담화하는 데 여념이 없다. 찬우는 "주인이 그런 애 아니야"라며 일갈한다. 찬우의 말을 들은 주인은 책상 밑에 몸을 숨긴 채 다시 그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주인은 수호와 사사건건 맞부딪히며, 찬우와 키스하며 성애를 나누고, 남자 동급생과 체육 시간에 짓궂은 몸싸움을 벌인다. 1대1 관계에 한정한다면 주인과 남성의 세계는 분리되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집단으로서의 남성 세계에는 좀처럼 진입하지 못한다. 책상 밑에 숨은 주인은 자신을 두둔하는 찬우의 말에는 한껏 귀 기울이지만, 수호가 쓴 서명문보다 더 노골적인 왜곡과 조롱을 퍼붓는 남성들에게는 끝내 맞서지 못한다. 주인은 영화 내내 남성들의 세계와 유리되어 있다. 익명의 남성 무리가 존재하는 소위 '남초 세계'에 내던져지지 않는다. 태권도장에서도 주인은 혼자 남아 연습한다. 이 공간에 찬우를 불렀다가 다시 이별한다. 이 헤어짐도 주인에게 혼란스러움을 주는 사건 정도로만 기능한다. 주인이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태권도 수업에 참여하는 유일한 장면에서는 개인적 스트레스를 폭력으로 풀며 대련 상대를 가격한다. 이때도 수련생들은 머리보호대를 착용하고 익명화되어 있어, 주인이 남성들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인상은 없다. 운동이 취미인 주인에게 수호도 대련 상대도 쉽게 쓰러진다. 남성 세계 특유의 남근적 위압감과 긴장은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 영화는 주인이 그런 위협에 닿지 않도록 애써 회피한다.


만약 <세계의 주인> 속 성폭력 피해자들이 현실의 남성들을 대면한다면 어떨까. 수호를 때렸을 때나 대련 상대에게 분풀이했을 때처럼 폭력으로 대처할 것인가? 주인을 연기한 서수빈 배우는 태권도 4단으로 평균 이상의 방어 능력을 갖췄다. 그렇다 한들 평균적인 남성은 평균 이상의 여성보다 물리적으로 강하다. 작심한 남성의 무력은 태권도 유단자인 주인이나 미도도 감당할 수 없다. 어쩌면 흉기로 위협할 수도 있다. 영화 속 주인의 세계는 순결성과 순수함을 언제든 무참하게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위태위태한 유토피아로 보인다. 성폭력을 다루고 있음에도 정작 성폭력이 일어날 수 없는 세계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화 속 남성 인물들의 입체성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윤가은 감독의 방식대로 '한국 남성'이라는 일반화를 피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무엇보다,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는 그 자체로 모순적 세계다. <세계의 주인>은 감독 본연의 내적 논리와 현실의 조건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의 촬영을 회피하는 것은 아닐까. 어린이집의 CCTV, 유라의 동영상, 찬우와의 데이트 Vlog, 틱톡 촬영 등 자신이 만든 영화 속 제2의 촬영자에게 외주를 맡겨, 영화가 스스로 불균형을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여성 서사의 도구로 소모되는 남성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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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개봉한 <델마와 루이스>는 일찍이 여성 서사의 아이콘으로 여겨져 왔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그 성취를 완전히 넘어섰다고 평가받는 작품은 드물다. 남성우월주의가 팽배하던 당시 미국 문화계는 이 영화의 등장을 하나의 문화적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페미니즘 담론이 미약하던 20세기 말의 보수적 미국 사회에, 두 여성이 남성을 살해하고 도주하는 영화가 등장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델마와 루이스>에는 남근적 위압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강간범 '할란', 외모로 여성을 유혹해 사기 행각을 벌이는 '제이디' 같은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슬로컴' 형사와 '지미'처럼 여성을 존중하며 가부장적 세계에서 어지간히 벗어난 인물들도 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 여성 영화의 새 지평은, 34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도달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그만큼 한국의 페미니즘 담론이 얼마나 큰 시차를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세계의 주인>과 <벌새>를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얻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서사 영화'로 접근한다면, 영화 속 남성 인물들이 여성 서사의 도구로 소모된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단순히 말해, <세계의 주인>의 남성들은 지나치게 선하고 <벌새>의 남성들은 일률적으로 악하다. 지난 10년간 극단적인 젠더 갈등의 홍역을 통과해 온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기형적 양상은 비단 영화계에 국한된 문제도 아닐 터다.


한국 영화들이 마주한 공통의 과제,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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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은 <세계의 주인>은 재현의 윤리라는 오랜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폭력을 거부하는 스크린은 주인이 성장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대신 회복 서사에 집중한다. 이 영화에서, '청소년의 성장'보다 '성폭력 생존자의 회복'이 더 중요한 것일까? 주인은 어른으로의 이행을 앞둔 청소년이자, 성폭력 생존자로서 두 과제를 동시에 짊어지고 있다. 영화는 두 어려운 과제의 해답을 모색하는 주인을 삶의 주체로 그리면서도, 그 불가피함을 담담히 인정한다. 즉, 성장이냐 회복이냐의 문제를 넘어, 애초에 가혹한 환경에 놓인 주인의 성장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전제 아래 회복 서사에 머문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남긴다. 영화의 마지막까지 주인은 누리의 어깨를 꼬집는다. 상처를 직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해도, 미성숙한 행동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어린이집 원장이자 주인의 어머니인 태선은 같은 상황에서 "아파"라고 솔직히 답하며 누리를 끌어안는다. 모녀는 미숙한 청소년과 성숙한 어른으로 대비된다.


<우리들>은 이선이 관계가 틀어진 친구 '한지아'를 감싸는 장면으로 엔딩을 맞았다. 이선은 자신을 괴롭히는 '최보라'에게 대응하지 못한 오프닝 시점의 자신과 지아를 겹쳐 보고, 이번에는 행동하기로 한다. 그는 갖은 오해와 불통으로 우정의 성취에는 실패했지만, 영화가 끝나며 성장을 이뤘다. 그런데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인격체인 주인은 성장하지 못한 채로 남는다. 친구 문제나 가족 문제에만 열중해도 됐던 <우리들>, <우리집>의 인물들에 비해, 주인은 성장과 회복이라는 과중한 두 과제와 입시 스트레스, 교우 관계, 연애 관계 등에 짓눌려 뜻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물론 18살의 성장이 10살의 성장보다 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를 성장하지 못한 인물로 단정 짓는 것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청소년 인물의 성장 결여는 최근 한국 독립영화들이 마주한 공통의 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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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은 감독은 <우리들>, <우리집>에서 그랬듯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세 작품은 한국적인 가족 서사에 머무르면서도 여성 서사, 소녀성이라는 새로운 테마의 명명을 선도해 냈다. 이는 최근의 한국 독립영화 다수가 공유하는 장르적 특성이기도 하다. 늘 불만이었던 건, 그러한 영화들이 실제 사건을 끌어오거나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에 의존하면서도 정작 그 상처를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성수대교 붕괴를 배경으로 한 <벌새>는 사건 현장을 묘사하지 않는다. <세계의 주인> 역시 과거 회상을 배제하고, 성폭력 피해를 암시하는 장면을 남기지 않는다. 재현의 윤리를 의식한 선택이겠으나, 이러한 '비재현'이 하나의 시대적 경향으로 여겨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련의 한국 영화들이 청춘의 선행 과제인 성장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최근 몇 년간 여성 서사로 일컬어지는 한국 독립영화들은 가족, 친구, 연인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뤄왔다. 이들은 10대 시절의 섬세한 감수성을 포착하고, 동시대 한국의 외연을 성실하게 재현한다는 점에서 대게 호평받았다. 그러나 이들 영화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치적 논리나 시대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침묵한다. 혹은 무관심한 듯하다. 또한 여성 주인공이 남성 권력에 맞서는 경우 필연적으로 젠더 담론을 소환하기 마련인데, 이를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남성 인물에게 구심점 일부가 옮겨가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인지, 그들에게 입체적 서사를 쉬이 허락하지 않는다. 결국 감독의 자의식을 적극적으로 개입시켜 영화 속 남성들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여성 인물과 유리시키거나, 남성들의 세계를 납작하게 피상화하여 묘사하거나, 그마저도 생략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한국 영화계에서 여성 서사라는 테마가 지닌 고질적 한계다. 이러한 반쪽짜리 세계관에서 성장을 논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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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관객에게는 <태풍 클럽>으로만 알려졌던 소마이 신지의 <이사>와 <여름 정원>이 뒤늦게 개봉하며 재조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청소년 배우를 가장 잘 다룬다고 평가받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넘어서고 싶었던 유일한 감독'으로 소마이 신지를 꼽았다. 그는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히며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 청춘들을 그려왔다. 현실의 문제를 서사의 뼈대로 심으면서도 이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한국 영화계가 참고해야 할 감독이 있다면, 바로 소마이 신지다. 그의 영화 속 청소년들은 냉혹한 현실을 자신만의 대응책으로 돌파한다. <태풍 클럽>의 미카미는 어른이 되기 싫어서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고 <이사>의 렌은 부모의 재결합을 위해 한없이 내달린다. 소마이 신지는 유년기를 미완의 존재로 규정하지 않고, 실패와 성장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은 찬란한 시기로 바라본다. 미카미처럼 종의 극복에 실패할 수도 있고 렌처럼 성숙할 수도 있다. 그들의 급선무는 얼핏 보면 개인적인 문제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일본 사회의 문제로 확장된다. <여름 정원>의 아이들이 할아버지를 보며 탐구한 죽음은 일본 근현대사의 내셔널리즘을 돌아보는 여정으로 가닿는다. 소마이 신지의 영화는 성장을 향한 답파를 피하지 않으며, 미숙한 청소년이 어른의 세계와 살을 맞대며 겪는 곤궁을 축소하거나 현실에서 도피하지도 않는다. 그는 청춘의 개인적 고민이 결국 당대의 사회 문제와 맞닿아 있음을 차분히 받아들인다. 그것은 이미 기성세대가 된 어른으로서 소마이 신지가 떠맡는 최소한의 책임이자 직업윤리의 표출이다. 이러한 성찰은 최근의 한국 독립영화들에 부재한 특성이다. 저마다 세계의 주인으로 살아갈 관객들의 미래를 기원한다면, 영화가 끝나고 현실과 씨름할 영화관 바깥의 미생들을 응원한다면, 더는 그 책임을 외면해선 안 된다. 누구나 주인이처럼 농담하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언젠가는 회복에 다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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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에 미치지 못한 부분도 있지만, 윤가은 감독은 <세계의 주인>을 통해 데뷔작 <우리들>이 남긴 갈증을 손수 해소했다. 이선과 지아의 우정이 파국에 이르는 절정은 교실 싸움 장면이다. 두 여자아이의 몸싸움은 켜켜이 쌓인 갈등의 무게와 견주면 상대적으로 소소하다. 응어리가 폭발하는 클라이맥스로서는 역동성이 확연히 부족하다. 반면 <세계의 주인>의 세차장 장면이 분출하는 감정과 역동적 에너지는 영화의 서사를 마땅히 뒷받침한다. 주제에 맞게 필요한 만큼 강렬하다. 묵은 감정을 토해내는 배우의 연기와, 자동차가 세차장을 가로지르는 연출은 깊은 울림을 남긴다. 비록 다른 장면은 모조리 카메라 속 카메라에 감춰 두었지만, 피하지 않아야 할 단 하나의 장면은 바르게 선택했다. 아무리 씻어낸들 주인의 상처가 말끔히 정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울음을 터뜨리는 주인에게 휴지를 건네고, 그 거친 비명을 세차장 소음 속에 묻어줄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이 약속된 회복이라 말한다. <세계의 주인>의 미덕은 성폭력 생존자가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완벽히 성장한다는 찰나의 판타지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주인의 말마따나 그들의 세계는 멀쩡하다. 아니, 설령 멀쩡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회복에 다다를 것임을 믿고 있다. 해인이 근심과 걱정을 없애는 마술에 실패했듯, 상처는 단숨에 사라지지 않는다. 회복은 더디다. <우리들>에서 손톱의 봉숭아 물과 매니큐어가 점차 옅어져 갔듯 누리의 상처도 천천히 아물어 가리라. 아직 18살에 불과한 주인의 회복도 그러할 터다. 죄책감에 도망친 아버지 없이도 단단히 결속한 가족은 주인의 세계를 굳건히 지탱하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는 태도만으로도, 누구나 자기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음을 장담한다.



윤가은 감독의 데뷔작 <우리들>이 한국식 청소년 리얼리즘 영화의 탄생과 여성 서사의 부흥을 알린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면, 비슷한 논의가 반복된 <우리집>은 기대에 비해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우리들>의 자가복제로 느껴졌거든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이사>를 과도하게 참조한 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고요. <우리들>은 캐릭터 외모와 전학 온 친구가 이혼 가정이라는 점에서, <우리집>은 이사라는 소재, 주인공이 부모의 이혼을 막으려 한다는 스토리가 너무 비슷하죠. <세계의 주인>은 소마이 신지의 자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지 훌쩍 큰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놓고 새로운 주제를 꺼냅니다. 성과 사랑을 탐구하는 이유도 그런 맥락에 있을 수 있겠죠. 그것만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는 차츰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의 다음 네 번째 장편 영화는 걸작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잖아도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오히려 비판거리를 찾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 글에서 <세계의 주인>은 여성 서사 독립영화의 대표 자격으로 잔뜩 얻어맞은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윤가은 감독은 본인이 봉준호, 박찬욱 같은 천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그런 명함과 상관없이 이미 훌륭한 감독이죠. <세계의 주인>은 올해 최고의 한국 영화가 맞습니다. <미키 17>, <어쩔수가없다>보다 좋았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네 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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