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작> (1996) 리뷰
<마작>이 스크린에 걸린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디즈니와 리틀빅픽처스 재직 시절을 거쳐 에이썸 픽쳐스를 설립한 이창준 대표는 수년 전부터 에드워드 양의 영화 전편을 국내에 수입하기 위해 꾸준히 공을 들여왔다. 여러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형식의 데뷔작 <광음적고사>를 제외하면, 장편 7편 모두 국내 정식 개봉에 성공했다. "드래곤볼은 (7개를) 다 모으면 소원도 이루어진다는데." 불과 1년 전만 해도 대만 영화 수입의 지난함과 흥행에 대한 압박을 토로하던 그는, 마침내 <마작>으로 '에드워드 양 프로젝트'에 마침표를 찍었다. 거의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도착한 이 영화는 마지막 수입작이다. 파편화되어 있던 개별 작품은 같은 수입사와 포스터 디자이너의 작업으로 일관된 톤의 외연을 갖추어, 이제 국내에서도 에드워드 양의 영화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루트가 마련되었다. 예컨대 소마이 신지는 일반적으로 국내에서 <태풍클럽> 정도만 알려진 감독이었다. 최근 <이사>, <여름 정원>이 연이어 개봉하며 국내 관객은 그의 세계를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태풍클럽>의 수입사는 M&M, 뒤늦게 개봉한 두 영화의 수입사는 찬란이다.) 마찬가지로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과 <하나 그리고 둘> 외에는 그 이름조차 생소했던 에드워드 양의 나머지 5편을 정식으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영화 세계에도 신룡이 있다면, 소원 하나쯤은 들어줄 법한 성취다. 한 명의 관객으로서 감사함을 느낀다.
'신 타이페이 3부작'으로 불리는 <마작>은 에드워드 양 감독의 후기 필모그래피를 장식한 작품이다. 이러한 명명은 통틀어 열 편도 되지 않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느슨하게나마 분류하려는 강박적인 시도로 다가온다. 애초에 그의 모든 영화가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하는데 초기작 3개는 타이페이 3부작, 후기작 3개는 신 타이페이 3부작으로 부르다니. 누가 어떤 근거로 명명했는지도 불분명하지 않은가? 그보다는 에드워드 양이 20세기말 타이베이 도시 이미지에 깃든 긴장감과 짓눌린 시대상을 어떻게 활용했는지 살펴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탐구하다 보면 왜 타이페이 3부작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자연스레 알 수 있으리라.)
<마작>은 에드워드 양의 필모그래피에서 영화의 서사를 추동하는 내적 논리가 가장 눈에 띄게 무너져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순서상 <독립시대>와 <하나 그리고 둘> 사이를 잇는 중간 지대에 위치해 있다. 전자와의 유사성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면, 예외적인 작품으로 여겨지는 후자와는 다소 연결 짓기 어렵다. <독립시대>는 이별한 치치와 샤오밍이 병원에서 대화하다 재결합의 가능성을 보이며 끝난다. <마작> 역시 마르트와 룬룬이 네온사인 휘황한 타이베이 밤거리에서 재회해 진한 키스를 나누며 엔딩을 맞는다. 두 남녀 주인공의 재결합으로 서사를 갈무리했다는 공통점이 유독 의미심장한 까닭은 이것이 전에 없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해탄적일천>부터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까지 에드워드 양은 현대 대만이라는 혼돈과 균열의 초상 위에 놓인 불안정한 사랑이 철저히 붕괴하는 과정만을 보여주었다. 대만의 신랑차오를 주도한 젊은 신진 감독들이 '허울뿐인 낭만주의의 외피를 뚫고 삶 속으로 전진하고자 했다'는 김채희 평론가의 비평을 떠올리면, 갑자기 낭만주의로 윤색한 결말을 두 번 연속으로 내놓은 것은 참으로 꺼림칙하다. 사족처럼 덧붙여진 두 차례의 엔딩은 영화의 본편과 분리된 듯한 인상마저 준다. 본편 서사와의 매끄러운 연결을 포기하고 '과장된 이상주의적 결말(조지훈)'로 마무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르트는 엔딩 무렵 마커스에게 돌아가 타이베이에서 겪은 사건들을 술회한다. 정확히는 술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르트와 마커스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마르트는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마커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다. 직전 장면에서 홍어는 광포하게 날뛰며 아버지 세대의 자본가를 살해한 후 흐느껴 우는데, 암전된 화면 위로 홍어의 서러운 곡성과 마커스의 조소가 겹친다. 쇼트는 이내 차 안으로 이동하고, 마커스는 "진짜 웃긴다. 걔네들이 널 마트라라고 불렀다고?"라고 말한다. 낯선 나라에 건너와 단기간에 엄청난 사건들을 돌파한 직후임에도, 마커스의 차에 탑승한 마트라는 천연덕스럽게 무용담을 늘어놓았다는 뜻이다. 이 장면 내내 마커스의 입모양은 그의 대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대만을 비웃는 두 백인의 모습을 전경으로 둔 채 보이스오버로 들려오는 마커스의 목소리는 추악한 서구 제국주의의 시선으로 타이베이를 논평한다.
"여기 사람들은 아주 돈독이 올랐어. 엄청 벌어. 있잖아. 10년만 지나면 이곳 타이베이가 세계의 중심이 될 거야. 서구 문명의 미래가 여기 있어. 좀 이상한 건 말이야. 우리는 역사적으로 19세기가 제국주의의 전성기라고 배웠잖아. 두고 봐, 21세기 초에도 마찬가지일 거야." (<FILO> 제16호)
마커스는 서구 제국주의가 동양의 자본을 침탈했던 과거가 똑같이 반복될 것임을 예견한다. 이어서 "그게 마트라가 여기 있는 이유고, 내가 여기 있는 이유야. 이곳에 오게 된 건 운이 좋았어. 고향의 누구에게도 이걸 말하지 않을 거야.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 마르트, 네가 와서 진심으로 기뻐. 정말 보고 싶었어. 이곳에는 너와 나누고 싶은 게 가득해."라고 덧붙인다. 처음에는 차에 탄 두 인물을 정면에서 바라보는 쇼트로 시작했다가, "10년만 지나면(You know, in ten years)"을 말하는 순간 야시장으로 진입하는 차를 뒷좌석에서 바라보는 쇼트로 전환되며, "그게 마트라가 여기 있는 이유고(That's why Matra is here)"를 말할 때 야시장의 풍경과 마커스의 얼굴이 비치는 룸미러를 마르트의 시점에서 응시한 쇼트가 이어진다. 도시의 백색소음을 차단한 보이스오버는 휑뎅그렁하게 차 안에 울려 퍼지는데, 대만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마커스의 확신에 비해 푸른빛을 띤 타이베이의 야경은 어딘가 울적하고 생동감이 부재하다. 오디오와 쇼트 사이 만연한 거리감은 대만을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에드워드 양의 희망 사항으로 읽힌다. 마커스는 백인 자본가의 천박한 야욕을 드러내는 논평으로 마트라가 룬룬에게 떠날 빌미를 제공했다. 그는 사랑에 두 번 실패했으며, 실제 대만의 10년 후가 어떠했는지를 고려한다면 경제적으로도 재차 실패했을 터다.
보이스오버가 도중에 끝나고 현재 시간으로 복귀하는 룸미러 쇼트에서 마커스는 단골 가게에서 먹을 걸 사 온다며 내리는데, 이때 룸미러에 마커스의 입은 보이지 않는다. 카메라는 마르트의 눈을 빌려 차에서 내려 시장 상인에게 말을 붙이는 마커스를 지긋이 따라간다. 영화는 차에 혼자 남은 마르트를 보여주는데,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담배를 피고는 어이없다는 듯 두 번 실소한다. 마르트는 짧은 시간이나마 마트라로서 분명히 존재했다. 그 시간을 모르는 마커스에게 마트라란 서구 제국주의를 자본주의로 코드화한 우스꽝스러운 이명에 지나지 않는다. 마커스가 설명하는 '마트라가 여기 있는 이유'와 일방적으로 전하는 애정 표현은 공허하다. 입으로 말하지만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만 마르트에게 닿지 않는다. 그런 마커스의 옆을 자신이 있을 본연의 자리라 생각하고 돌아온 것이 우스워졌던 탓일까. 실소를 마친 마르트는 마커스가 오기 전 차에서 내려 북적이는 야시장을 뛰쳐나와 룬룬이 있을 대만의 밤거리 어딘가로 홀연히 사라진다.
"나를 마트라라고 부르더라니까!" 그 자신도 농담처럼 말했을 테지만, 마트라(Matra)는 본래 'Mécanique Aviation Traction'의 약자로 실제 1996년 개통한 타이베이 첩운의 차량 'VAL256'을 제조한 프랑스 기업의 이름이다. 프랑스에서 온 여성 마르트와 룬룬이 납치된 공간에 파란색 마트라 간판을 배치하는 등 마트라로 코드화된 마르트를 보여주는 조악한 연출은 캐릭터의 빈약한 입체성을 부각한다. 보이스오버로 처리한 마커스의 대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는 동안 시간이 경과했음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르트가 마커스의 장광설을 곱씹으며 선택을 번복하기로 결심했음을 넌지시 알린다. '고향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신세라 대만으로 떠밀리듯 넘어온 속물 자본가'라는 마커스의 캐릭터성과 그의 본편 행적을 고려하면 차 안에서 뱉은 일련의 발언에 유달리 실망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룬룬에게 돌아간 마르트가 충동적이라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 없다. 마커스 하나만 믿고 대만으로 온 마르트는 재차 룬룬 하나만 믿고 우울한 대만의 밤거리로 자신을 내던지며 또 한 번의 불확실한 모험을 감행한다. 드넓은 타이베이 도심 한복판에서 기적처럼 만난 마르트와 룬룬이 거리의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거칠게 키스를 주고받는 광경은 마르트의 잦은 변덕만큼이나 당혹스럽다. 희망찬 엔딩이 주는 감동보다 '절대 키스만은 하지 말라'던 소부처의 말을 무시한 대가는 무엇일지 그 이후를 보여주지 않아 엄습하는 불안이 더 크다. <마작>이 개봉한 해 개통한 VAL256는 1년 뒤 마트라와 대만 당국의 법적 분쟁 이후 독일 지멘스로 유지보수 업체를 바꾸었다. 대만과 프랑스의 짧은 만남은 현실에서는 불화로 끝난 것이다. 타이베이의 고성장에 눈독 들인 서구 제국주의는 국적만 바꾸었을 뿐 다시금 자본주의의 미명 아래 대만을 옥죄어 왔다. 에드워드 양은 마르트와 룬룬의 키스를 통해 대만에 잔재한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보존하고 싶었을지 모르지만, 그 염원은 실현되지 못하고 어설픈 엔딩으로만 남았다.
그간 와해하는 연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대만이 마주한 혼돈의 시대상을 포착해 왔던 에드워드 양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길래, 영화 나름의 내적 논리를 무너뜨려 가면서까지 두 남녀를 연거푸 재결합시킨 것일까? 1994년 개봉한 <독립시대>와 1996년 개봉한 <마작> 사이 에드워드 양에게는 두 가지(어쩌면 한 가지) 큰 사건이 있었다. 1995년 여름, 에드워드 양은 첫 번째 부인인 차이친과 이혼한 직후 두 번째 부인 펑카이리와의 재혼을 발표했다. 펑카이리와는 <하나 그리고 둘>이 개봉했던 1991년 무렵부터 불륜 관계로 만나고 있었고, 1985년 <타이페이 스토리>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그와 결혼한 차이친과는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보냈다는 염문이 있다. "이 사회는 일부러 아내와 남편을 떼어놓는 것 같아." <해탄적일천> 속 린자리의 대사가 자기실현적 예언이 된 것일까. 국내에서는 홍상수의 영화들, 특히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감독의 자기변명으로 여긴 관객들이 평점 테러를 했던 사례가 떠오른다. 김민희가 연기한 주인공 '영희'는 유부남 영화감독 '상원'과 만나며 생기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외국으로 떠난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보는 게 이상할 정도다. 영화를 비판할 때 감독의 사생활 같은 영화 외부의 요인을 끌어다 쓰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것이 영화 내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할 때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에드워드 양의 장편 7편 중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는 두 작품은 하필 그의 이혼 일 년 전후로 공개되었다. 90년대는 그의 멘탈이 크게 흔들린 시기로 보이며, 이에 따른 결과로 한결같던 영화 세계의 통일성도 무너진 듯하다. 두 차례의 진통이 가시고 연출한 유작이 불후의 걸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예술가의 성장통으로 보이는 면모도 있다.
<하나 그리고 둘>의 위대한 성취와 상징성을 차치하더라도, 해당 작품을 <독립시대>, <마작>과 더불어 신 타이페이 3부작으로 분류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이룬 대만 타이베이에 즐비하게 늘어선 마천루와 자동차를 배경으로 하는 도시 이미지가 에드워드 양 영화 세계의 중추인 것은 명백하다. 타이베이를 배경으로 공간의 정치학을 탐구하고 근현대 대만 역사를 고찰하는 그의 영화들을 호명하기에 타이페이보다 적확한 단어가 마땅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혼을 전후로 공개한 두 작품에 일관적으로 흐르는 작위적인 공기와 세밀하지 못한 연출 등의 단점이 그의 유작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하나 그리고 둘>의 인물들 또한 비교적 자유로운 연애를 한다. 직접적인 불륜 행위를 저지르지는 않아도, 과거의 연인과 데이트하고 친한 친구의 전 연인과 교제한다. 복잡한 군상극을 경유하는 러브 코미디는 유작에 이르러 한결 정제되었으며 인물의 감정 변화 측면에서도 이전 두 작품보다 훨씬 설득력을 갖췄다.
<마작>의 홍어가 맹목적으로 따랐던 아버지의 가르침, '사람은 사기꾼과 바보로 나뉜다'는 구절 속에서 에드워드 양은 "나는 사기를 친 게 아니라 그저 바보였을 뿐이야"라며 자신을 속인 쪽이 아닌 속은 쪽으로 변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독립시대>에서 몰리와 아킴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데 결혼을 약속했다가 파혼을 맞는다. 아킴은 작중 초반부부터 사랑의 결실을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으나 후반부에 먼저 파혼하자는 이야기를 꺼낸다. 두 사람의 관계는 에드워드 양과 차이친의 관계를 연상하게 한다. 아킴은 몰리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는데, 가수이자 배우로서 일하며 에드워드 양을 지원했던 차이친의 행보와 영락없다. 불륜을 저지르는 건 몰리 쪽이라는 것도 에드워드 양과 몰리를 겹쳐 보게 하는 지점이다. 그런데 몰리가 친구 치치의 연인 샤오밍과 우발적으로 잠자리를 가진 건 사랑이 결여한 정략결혼이 낳은 파국 속 작은 해프닝으로 지나가며, 치치는 끝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런 모순을 가득 떠안고도 치치와 몰리의 우정, 치치와 샤오밍의 애정은 극적으로 봉합된다. 대만의 현주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인물들의 애정 관계를 엔딩 시점에 구태여 복원한 것은 에드워드 양의 명성에 영 어울리지 않는 섣부른 연출이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기변명으로 보인다.
여성 주인공은 남성 A와 교제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이별하고, 이후 남성 B와 만나다가 재회한 남성 A에게 돌아간다. 여성은 남성 A와의 관계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지만, 막상 돌아가 보니 여전히 나쁜 남자인 건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제 와서 다시 사랑을 말하기에는 지금과 그때의 자신이 달라졌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염치없게도 남성 B에게 돌아가기로 한다.
봉준호 감독이 2010년대 영화 베스트 10 리스트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를 넣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하마구치 감독의 202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라면 <아사코>는 그의 2010년대 대표하는 작품을 넘어 훌륭한 여성 서사 영화로 평가받을 자격이 있다. 상기한 스토리는 <마작>을 마르트 중심으로 요약한 시놉시스이고, 동시에 <아사코>의 핵심 줄거리이기도 하다. <아사코>에서 아사코의 주체성은 빈번히 오해받는다. 어떤 평론가는 '첫 만남부터 재회까지 30년쯤 낡은 여성관'이라는 한 줄 평과 함께 별점 하나를 부여하며 해당 작품을 거세게 비난한 바 있다. 영화를 오독하는 건 자유지만 한 명의 여성으로서 영화 세계에 헌신한 아사코에게 '낡은 여성관' 같은 오명을 덧씌우는 건 무척 실례다. <아사코>는 일본 멜로의 장르적 관습을 따르는 남성중심적 영화가 전혀 아니다. 마르트와 아사코를 비교하면 기존의 남성 A(마커스-바쿠)에게 돌아갔다가 남성 B(룬룬-료헤이)에게 귀환하는 구조는 동일하나, 인물의 주체성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료헤이와 베란다에 나란히 서 더러운 강물을 바라보는 아사코의 미래가 언뜻 마르트보다 어두워 보일 수는 있다. 아사코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두 번이나 인정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과 료헤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아사코>가 전달하는 핵심 메시지는 비록 이전과 달라졌어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입었어도, '그럼에도' 살아가기로 하는 태도에 있다. 더러워진 강물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며 과오까지 끌어안는 자세는 가히 성숙이라고 부를 만하다. 반면 <마작>의 엔딩에서 다급한 키스신으로 푸른 도심 풍경에 매연처럼 산재한 뿌연 희망을 애써 붙잡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세계의 정합성이 어딘가 어긋나 있음을 폭로하는 모순적 행위가 되고 만다. 대만 살이에 금세 싫증이 난 마르트가 프랑스로 회귀하고 홀로 남은 룬룬이 마트라로 남은 마르트의 표상을 하염없이 쫓는 편이 더 그럴듯한 결말이다.
마르트의 행적을 돌아보자. 마커스를 찾아 대뜸 하드 록에 나타난 마르트가 타이베이에서 처음 마주한 난관은 당장의 숙박비 문제다. 마르트는 홍어가 잡아준 호텔에 마커스를 불러 재회의 정사를 나눈다. 마커스는 대만에서 같이 지내는 잠깐은 좋을지 몰라도 앞으로 여기서 대체 무얼 할 거냐고 반문하고 집으로 돌아갈 돈이 필요하면 주겠다며 프랑스행을 종용한다. 마르트는 분노하며 "나는 창녀가 아니야"라고 말하고 마커스를 내쫓는데, 이어지는 쇼트는 잠에서 깬 앨리슨이 홍콩에게 투정하며 안기는 장면이다. 홍콩 일당의 아지트는 홍콩의 수려한 외모를 내세워 여성을 유인한 뒤 공유하며 창녀로 전락시키는 유사 유곽으로 쓰인다. 마르트는 쇼트가 예고한 대로 앨리슨의 자리에 놓이는데, 그는 앞선 호텔 장면에서 창녀가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진저가 제안한 일자리에도 응할 수 없고 집단성폭행을 일삼는 남성들의 공간에도 머무를 수 없다. 결국 자신에게 순수한 호의를 지닌 룬룬의 본가 꼭대기 창고층으로 피신한다. 마르트에게 있어 '타인의 돈으로 움직이는 여성'은 곧 창녀다. 정작 마커스를 내쫓은 호텔의 숙박비도 자신을 이용할 심산으로 가짜 호의를 베푼 홍어가 지불했다. 앨리슨이 아지트에 머무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대가로 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홍콩 일당이 여성을 도구화해 왔듯, 서슬 퍼런 자본주의 논리는 마르트가 착취적 조건을 거스를 수 없는 나약한 개인임을 상기시킨다. 마르트는 끝까지 남성들의 권력과 경제력에 의존하면서도 주체적인 자립에 실패한다. 마르트의 주체성이 빛나는 유일한 순간은 목숨에 위협을 느끼고 갱으로부터 권총을 빼앗을 때뿐이다. 마르트는 영화 초반 하드 록 앞에서 마커스와 다투며 "혼자 힘으로 여기 왔으니 혼자 힘으로 살아남겠어(I came by myself and I'll survive by myself)"라고 외치는데, 이 호기로운 다짐은 생존의 사전적 의미인 '목숨 부지'로서만 달성된다. 에드워드 양의 초기작인 <해탄적일천>이 여성 서사 드라마로 호평받는 것과 대조적으로 후기작 <마작>에서 여성 인물의 입체성이 제대로 축조되지 않은 것은 못내 아쉽다.
극장에서 레제편을 보는데 키스하면 재수 없다는 소부처의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덴지의 인생 첫 키스는 토 범벅 키스였고 레제와 두 번째 키스를 할 때는 혀가 잘렸지요. 키스는 해악입니다. 절대 키스하지 마.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세 개 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