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 해피 포에버 (2024) 새로운 동시대로의 도약

<슈퍼 해피 포에버> (2024) 리뷰

by 테리

흔하디흔한 1.85:1 화면비의 스크린을 한여름의 푸르른 하늘과 바닷가, 눈부신 일광으로 물들인 <슈퍼 해피 포에버>는 여백의 힘을 믿고 기꺼이 도약하는 영화다. 1시간 반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애써 설명하기보다 이야기의 자리를 비워둔 채 외화면을 의식하도록 하는 화법을 시종 구사한다.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자가 써 내린 애도문이자 상실과 망각의 드라마다. "저는 영화가 언제나 죽음을 다루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이가라시 코헤이 감독의 어느 인터뷰 내용처럼, 프레임 내 샘솟는 여름의 생명력 뒤로 슬며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한 남자의 위태로운 모자 추적기

2023년 8월 19일, 흰색 엄브로 티셔츠를 입은 사노는 친구 미야타와 함께 이즈 반도로 여행을 왔다. 체크인을 마친 그는 혼자 호텔을 빠져나와 어딘가 맥 빠진 걸음새로 바닷가를 활보한다. 그는 얼마 전 죽은 아내가 5년 전 이곳에서 잃어버린 빨간 모자를 하염없이 찾아다닌다.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롱테이크로 사노의 위태로운 모자 추적기를 조망한다. 아내는 이미 죽었다. 모자는 어디에도 없다. 그는 삶의 의욕을 모조리 소진한 듯하다. 성가신 휴대폰을 바다 멀리 던지는가 하면, 미야타의 세미나 반지를 자기 맘대로 버린다. 이러한 위악적 태도는 그가 다음 따위를 기약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끝내 모자를 찾지 못해 좌절한 그는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819호 문 앞에 주저앉는다. 호텔 직원 안이 흥얼대는 노래 'Beyond the Sea'는 시간여행의 촉매제가 되어 영화를 2018년 8월 18일로 돌려놓는다. 느릿한 속도의 패닝으로 들여다본 819호 거실에는 5년 전 그날의 나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과거로의 회귀라기 보다, 1부에서 우연히 만나 합석한 여성들이 언급한 '동시성(Synchronicity)'에 관한 순간이다.


2023년의 1부, 2018년의 2부

영화는 1부와 2부의 사건이 시간의 선형성에 구애받지 않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거나, 여러 번 반복되고 있을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열어 놓는다. 사노는 동시성을 경험해 보았는지 묻는 여성들에게 자신의 아내와 처음 만난 순간을 말해주기로 한다. 졸다가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한 여행객을 보고 동시에 소리 지른 일을 회상한다. 여성들은 우연의 일치가 낳은 비인과적 로맨스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사노는 곧바로 아내가 얼마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산통을 깬다. 사노가 회상한 첫 만남은 2부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영화가 시간 순서를 반대로 배치한 이유는 관객으로 하여금 비선형적 시간 흐름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의도가 잘 작동했는지는 다소 불분명하다. 1부와 2부는 각각 2023년과 2018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한다. 이때 <슈퍼 해피 포에버>의 행간에 자리한 팬데믹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호텔 직원은 마스크를 쓰고 있고, 동네 식당은 폐업했으며, 호텔은 관광객 감소로 곧 문을 닫을 예정이다. 현재를 먼저 보여주고 과거로 돌아가는 구조는 오히려 팬데믹 이전의 현실 세계를 생생히 떠올리게 하여, 시간이 분리되었다는 느낌을 배가한다. 영화가 서술하지 않은 프레임 너머 여백에는 명명백백히 나기의 죽음과 팬데믹이라는 상실의 시간이 있다. 그래서인지 같은 지역에서 촬영했음에도 2부 내내 가득한 여름날의 생기와 활력을 1부에서는 좀처럼 감지하기 어렵다. 시공간이 단절되었다는 감각은 쾌청한 날씨와는 달리 서늘할 정도로 선명하다.


코로나 이후의 동시대성

<슈퍼 해피 포에버>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정면으로 다룬 몇 안 되는 일본 영화다. 마스크 착용을 묘사했을 뿐 아니라, 1부와 2부 사이 공백에 놓인 팬데믹과 그로 인한 아내의 죽음이 플롯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동시대성의 최전선을 자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우리는 팬데믹 이후의 세계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최근 십여 년간 동시대성을 의식하며 화면 밖의 관객에게 제언을 던지는 일본 영화는 주로 동일본대지진 사건의 상흔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왔다. 대표적으로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아사코>는 2011년이 남긴 거대한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되묻는 수행적 영화였다. 유운성 평론가는 <드라이브 마이 카>가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를 성실하게 되짚는 영화라 평한 바 있다. 2000년에 개봉한 <유레카>는 1995년 옴진리교 테러 사건이 야기한 세기말 일본의 무력감과 트라우마를 다뤘으며, 아오야마는 하마구치와 마찬가지로 비극이 낳은 패배감에 굴복하기보다 재난 이후의 세상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 관객에게 질문한다. 즉, 동시대의 문제를 주제로 하면서도 일본 사회를 성찰하는 수행적 성격의 영화는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사회적 책무와 시대적 윤리의식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예술영화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 일본 감독들(문주화)'의 견실한 자세가 켜켜이 쌓여 이뤄낸 현재진행형의 성취다.


바통을 이어받은 이가라시 감독이 팬데믹 시대의 첫 주자는 아니다. 선구자는 하마구치 류스케로 보는 것이 옳겠다. 동시대 현실을 재현하는 영화로서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그의 야심이 돋보이는 흥미로운 작품인데, 동일본대지진과 팬데믹 모두 다뤘기 때문이다. 바냐 아저씨 역을 맡은 가후쿠를 유나가 꼭 끌어안는 장면으로 끝날 것 같던 영화는 2분 남짓의 에필로그를 덧붙인다. 가후쿠의 운전기사 미사키는 부산 메가마트에서 마스크를 쓰고 장을 본다. "봉투 50원인데 드릴까요?" 한국인 점원의 한마디는 장장 3시간 동안 애써 영화에 몰입해 온 관객들을 불현듯 외화면으로 끄집어낸다. 하마구치의 영화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와 언어가 등장하는 것은 으레 있는 일이지만, 이 에필로그는 당혹스러울 만큼 영화 내용과 무관해 보인다. 결국 앞서 보았던 모든 것이 빨간 자동차를 모는 한 한국인 여성의 상상에 불과했던가? 하마구치는 이제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라고 엄중히 외칠 필요를 느낀 것이다.


남다은 평론가는 이 장면을 두고 "허구의 상상력이 작동할 기회를 주지 않고 그야말로 사실만을 강렬하게 되새기게 하는 장면 앞에서는 눈을 가리고 싶다", "연기하지 않는 한국어 목소리와 마스크의 존재감은 영화와 나 사이, 상상력이 뛰어놀 수 있는 지대를 급작스럽게 제거해버린 것만 같다"라며 아쉬움을 표현한 바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에서 코로나 예방을 위한 마스크를 목격하는 것은 매우 어색하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이미 코로나가 창궐한 2020년 11월에 촬영을 시작했고, 이듬해 여름에 개봉했다. 한국 개봉일인 2021년 12월은 국내 신규 확진자가 급증하기 직전으로 마치 폭풍전야와도 같은 시기였다. 코로나에 극심한 피로를 겪고 있던 동시대 관객에게 스크린으로 마스크를 마주하는 것은, 고단한 현실을 상기시키는 몹시 불쾌한 경험일 수밖에 없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러한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이후 미야케 쇼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일상이 되어버린 코로나를 스크린에 담아내기는 했지만, 두 영화의 개봉 시점은 1년 반의 차이가 있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그 이후로 또 2년의 세월이 흘러 개봉한 영화다. 엔데믹이 선언되고도 3년이 지난 지금, 과연 남다은 평론가는 <슈퍼 해피 포에버>가 제기한 코로나 이후의 동시대성, 노멀이 되어버린 뉴노멀에 어떻게 반응할 텐가? 이건 팬데믹을 경험한 관객 모두가 무의식적으로나마 의식하고 있을 문제다.


상실과 망각의 드라마

앞서 이 영화를 상실과 망각의 드라마라고 정의한 대로, 나기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사람이다. 휴대폰을 분실한 채 여행하고, 카메라를 두고 오고, 라이터를 잃어버렸다는 걸 까먹고, 사노가 룸 넘버 819를 일러주기 전까지 내일이 자신의 생일이라는 걸 기억하지 못한다. 주제는 다르지만 김병규 평론가가 한국 영화의 동향에 대해 비평한 글 '터널을 통과하기'에서 "부재한 자리를 다시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부재를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곱씹어 본다. 나기는 일관적으로 상실을 연거푸 망각한다. 사노는 모자를 되찾지 못하고 도처를 헤매다 기력을 탕진한다. 나기의 건망증, 잃어버린 물건, 사노의 상실은 영화의 서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한다. 상실(잃어버림)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에 당연히 회복(되찾음)도 없다. 동시대 영화에서 상실이 서사의 중추로서 더는 예전과 같은 고전적인 역할을 해낼 수 없다면, 차라리 상실 자체를 망각하는 건 어떤가? <슈퍼 해피 포에버>는 다시 쓰기도 고쳐 쓰기도 아닌 새로 쓰기를 동력삼아 불확실한 모험을 강행하며 새로운 동시대 영화의 포문을 열어젖히고자 하는 도전적인 작품이다.


최근 몇 년간 일본 영화에 꾸준히 관심을 기울여 온 관객이라면 <슈퍼 해피 포에버>는 그리 생소하지 않은 영화일 터다. 반어적 표현에 가까운 제목부터 소라 네오의 <해피엔드>가 연상되지 않는가? 앞서 언급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물론이고, 일본 청년세대의 경제적 어려움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다뤘다는 점에서 미야케 쇼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도 연상된다. 에모토 타스쿠의 얼굴에 감돌던 청춘의 무기력한 정서는 팬데믹의 시간을 통과하며 한층 더 공허하고 무심해졌고, 사노 히노키는 이를 무의(無依)의 얼굴로 표현해 냈다.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지갑 사정에 전전긍긍하는 인물들은 두 감독이 공통적으로 포착한 젊은 세대의 초상일 것이다. 1, 2부로 나뉜 구성과 여행지를 유랑하는 인물의 동선에 주목한다면 동시기 개봉작인 <여행과 나날>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 모두 작가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각 영화의 2부는 어쩌면 현실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낸 픽션일지 모른다. <여행과 나날>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원작으로 각색해 하나의 영화로 엮은 작품이다. 해변의 서경은 1부에서 각본가 이가 쓴 영화 시나리오였다. 그렇다면 혼야라동의 벤상에 해당하는 2부의 겨울 여행기를, 작가의 새로운 시나리오로 볼 수 있지 않은가? 고백하자면, 나기 시점으로 진행되는 <슈퍼 해피 포에버>의 2부 또한 미야타의 소설이라는 비약에 가까운 상상에서 도무지 빠져나올 수 없었다.



새로운 동시대성을 탐구한다는 표현도 <슈퍼 해피 포에버>에 썩 어울리는 표현일 테지만, 저는 비포 코로나 시대와 애프터 코로나 시대의 화해를 도모하는 영화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영화적 마법으로 1부와 2부를 연결한 이유 또한 이 영화가 '상실을 경험한 자가 써 내린 애도문'이기 때문이겠죠.


영화의 주제가인 바비 다린의 노래 'Beyond The Sea'는 미겔 고메스의 <그랜드 투어>의 엔딩에도 삽입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 영화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과 다이어제틱 음악을 활용하는 방식이 비슷하죠. 기본적으로 두 연인의 로맨스를 다루면서 1부는 남자의 이야기, 2부는 여자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구조도 동일하고요.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리뷰 끝자락에 언급한 픽션의 문제는 곧 업로드할 <여행과 나날> 리뷰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 영화나 이 영화나 최근 <버닝>, <추락의 해부> 등의 영화에서 목격했던 '등장인물의 작가 되기'가 작동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더군요. 특히 <슈퍼 해피 포에버>는 1, 2부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호텔 직원 시점으로 진행되는 3부가 영 의미심장한 탓에. 그나저나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의 영화는 처음 보았습니다.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은 기회가 되면 꼭 보고 싶네요.


이 영화에 대한 별점은 네 개입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