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2025) 리뷰
뜨거운 여름의 풍경이 담긴 두 일본 영화는 서늘한 겨울에 이르러 한국 관객에 도착했다. 동시기 개봉작이라는 점 외에도 <여행과 나날>과 <슈퍼 해피 포에버>의 다양한 교집합은 두 영화를 비교해 가며 감상하게 한다. 두 영화 모두 여행이라는 미명 아래 낯선 지역의 풍경을 따라 정처 없이 유랑하는 한 이방인의 이야기이다. 영화 속 이방인은 약속처럼 카메라를 잃어버린다.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1부와 2부로 나뉘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씨네21은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견주는 두 평론가의 글을 정확히 두 주의 간격을 두고 게재했다. '아오야마 신지가 제기한 가상의 일본(영화)적 풍경을 향한 질문'을 떠올리며 현대영화가 돌파해야 할 곤경을 지적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과 '두 사람이 공동으로 만든 허구의 임시적 구조를 향해 영화가 현실을 열어두고 있는지' 주목하며 '연인과 싱크의 문제'라는 제목을 붙인 김예솔비 평론가의 글은, 각각 시의적절한 비평이라 본다. 씨네21 입장에서도 같은 두 영화를 비교하는 글을 굳이 두 번이나 지면에 실은 이유가 있을 터다. 김병규는 이미지의 작동 양태가 달라진 지금, 현대영화의 좌표 찾기가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지 조명한다. 반면 김예솔비는 <슈퍼 해피 포에버>를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에 대한 응답으로 바라보며, 허구와 현실이 상호 유입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싱크를 맞추어 가는지 분석한다. 심정적으로 더 읽고 싶은 글은 후자다. 전자가 인용한 아오야마 신지의 글을 읽지 못했을뿐더러 역사적 맥락에 집중한 나머지 영화 내용을 파고드는 문장이 드물어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하면 <여행과 나날>, <슈퍼 해피 포에버> 대신 동시기 개봉 일본 영화인 <마이 선샤인>,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로 간판을 바꿔 달아도 글을 읽으며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달까. 나는 김병규가 영화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이미지와 몽타주를 간파하는 능력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평론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쓰는 글 대부분은 이론과 형식, 영화사 톺아보기에 치중되어 있어, 종종 감정은 뒷전에 두고 고고한 자세로 연구에만 몰두하는 선비로 보이곤 한다.
그래서 두 영화를 비교하는 비평으로서 참조하고자 하는 건 김예솔비의 글이다. 다만 '연인과 싱크의 문제'가 <여행과 나날>에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고민할 여지가 남아있다. 그는 <여행과 나날>에 '연인으로 확정 지어지지 않는 두 명의 남녀가 등장한다'고 했다. 이 말인즉슨 <슈퍼 해피 포에버>의 사노와 나기를 확정된 연인 상태로 간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 영화 어디에도 확정적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확정적인 구석은 없다. 예컨대 김예솔비가 언급한 두 명의 남녀란 1부 극중극의 나기사와 나츠오를 지칭한 것일 터다. 이 관계는 2부에서 반복된다. 홀로 낡은 여관을 꾸리고 사는 늙다리 벤조와 젊은 여성 각본가 이 사이에 이성적인 긴장감이 감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두 남녀가 공동 창작한 허구는 영화 내에서 현실에 열려 있는 공간으로 이중화된다. 벤조는 이의 직업을 물어본 뒤 각본을 쓰는 데 이러쿵저러쿵 조언하고, 이는 엔딩에 다다라 고심을 한결 덜어낸 표정으로 각본을 써 내려간다. 벤조가 이의 새로운 각본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2부가 진행되는 배경인 벤조의 여관은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려운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다가온다. <슈퍼 해피 포에버>처럼 희미하게나마 환상적인 연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김예솔비는 2부의 여관을 오로지 창작의 재료가 되는 시공간으로써 임시로 축조된 허구로 정의했으나, 이보다 더 비약하고 싶다. <여행과 나날>의 1부와 2부는 역학 관계에 놓인 각본가 이의 두 가지 시나리오다. 1부의 극중극이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 이는 GV 진행 도중 재능이 없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 슬럼프 극복을 위해 떠난 여행길에 만난 연인 아닌 남성와 함께 허구와 현실의 싱크를 맞추며 작성한 2부는 그것이 허구이든 현실이든 그 자체로 훌륭한 각본이 된다. 2부의 원작 '혼야라동의 벤상'의 주인공을 남자 만화가에서 여자 각본가로 바꾼 것 또한 허구를 위한 동력으로 연인과 싱크의 문제를 적용했다는 걸 반증한다. 느슨하게 보아 여행을 떠나는 것까지는 실제 일어난 사건일 것이고, 해가 저문 후 여관과 벤조가 등장하는 시점부터 이의 두 번째 각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행과 나날>은 츠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각색해 하나의 영화로 엮은 작품이다. 이가 쓴 각본을 토대로 만든 극중극을 상영하는 1부, 여행을 떠나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숙소를 찾아 헤매는 2부로 이야기가 분리되었다는 건 자못 의도적이다. 이가 오른 여행길은 존재하지 않는 좌표를 향한 여정이며, 미야케 쇼가 탐구하는 일종의 현대영화 각본론이다. 영화가 2부로 이행하는 계기는 사노 시로가 연기한 평론가 겸 교수의 죽음이다. 연거푸 기침하던 그의 모습은 쇼트가 바뀌자 돌연 영정 사진이 되어 관객을 당혹시킨다. 곧이어 그와 똑같이 생긴 남성이 주인공을 응대한다. 교수는 죽었다. 두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오히려 이것이 사노 시로의 1인 2역 연기임을 또렷이 인지하게 된다. 최근 <해피엔드>의 교장 선생님으로 얼굴을 비췄기에 국내 관객 입장에서도 이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배역의 이름마저 우오누마 '시로'다. "아, 저는 쌍둥이입니다"라며 천연덕스럽게 에두르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휘몰아치는 외화면의 개입을 막을 도리가 없다. 이는 <아사코>에서 더벅머리 바쿠가 떠나고 깔끔한 스타일의 료헤이가 등장했을 때, 1인 2역을 맡은 히가시데 마사히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상기하게 되던 사례와 같다. 로베르 브레송이 모델론을 주창하며 한 번 기용한 비전문적 연기자와 다시 작업하지 않았듯, 영화에서 배우의 대중적 이미지를 가능한 한 감추어두는 것은 픽션의 완성에 있어 필수 불가결이다. 그렇다면, 미야케 쇼는 왜 완전 픽션을 추구하지 않고 현실과 비현실 사이 균열을 현상해 두었을까? 줄곧 터널을 통과하는 <여행과 나날>의 목적지가 바로 그런 세계이기 때문이다. 특정한 좌표가 부재한 세계, 완전한 허구도, 현실도 아닌 모호한 지대에 발을 걸친 세계. 허구는 현실을, 내화면은 외화면을 진술하는 강력한 화자다. 프레임 너머의 사건을 상상하게 만드는 스탠다드 화면비는 관객을 넌지시 각본 밖의 세계로 초대한다. 암전된 터널의 끝에서 종이처럼 새하얀 설원이 낯선 자들을 환영한다. 열차에서 내린 이는 사박사박 발자국을 내디디며 확정되지 않는 세계에 기꺼이 몸을 던지고, 관객은 그 무한한 가능성에 시나브로 매료되는 것이다.
<슈퍼 해피 포에버>의 경우 사노의 친구 미야타가 취미로 소설을 쓴다는 설정을 통해 나기 시점으로 진행되는 2부가 미야타의 소설일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1부를 보는 관객은 사노의 거친 언행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 2부에서 사노와 나기의 전사를 보고 나면 그제야 1부의 사노를 이해하게 된다. 관객과 마찬가지로 사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미야타가 그의 단편적인 증언과 행적을 더듬어 소설을 썼다는 가설을 세워보면 어떨까? 정신이 이상해진, 혹은 원래부터 이상했던 사노가 단 한 번 마주쳐 일순간 싱크를 느낀 나기에게 집착하게 되었다면? 그가 아무리 헤맨다 한들 상상 속 연인 나기와 그의 빨간 모자를 되찾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직업적 특성으로 이야기의 허구성이 영화 표면에 대두되는 <여행과 나날>과 달리, <슈퍼 해피 포에버>의 2부를 극중극으로 치부하는 것은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의 비약일지 모른다.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 역시 인터뷰에서 1부와 2부는 시간대가 다를 뿐 상호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설명한다. 그럼에도 2부의 허구성에 주목하게 된다. 두 영화를 비교하며 감상했기에, 먼저 관람한 <여행과 나날>에서 작가 캐릭터를 동원하여 현대영화 혹은 감독 자신이 마주한 각본 쓰기의 문제를 돌파해 보려는 미야케 쇼 감독의 충동을 느꼈기에 더욱 그렇다. '현실은 하나가 아니'라는 미야타의 대사는 1부와 2부의 관계성을 나타내는 설명으로 보아야 적당하겠지만, 별안간 '허구 또한 하나가 아니'라는 작가의 말로 들려오고 만다.
두 영화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여행과 나날>은 2부의 공간인 여관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각본을 집필하는 이를 보여주며 영화를 마친다. 이의 옆에 벤조가 없다는 것을 증거로 이 장면을 2부의 허구적 세계에서 탈출한 이의 후일담이라 일컫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렇다고 공간적 배경도 변하지 않은 이 짧은 장면을 3부라 부르는 건 무리다. <슈퍼 해피 포에버>는 1부와 2부의 충돌을 타협하는 중재자로서 베트남인 호텔 직원 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3부를 삽입한다. 사노에게 남은 유일한 나기의 흔적인 빨간 모자를 안이 캐비닛에서 꺼내 쓴다. 만약 2부가 현실이라면, 안이 쓴 모자는 과연 나기의 모자가 맞는가? 나기의 부탁으로 모자를 보관했지만 나기가 방문하지 않아 돌려주지 못한 것인가? 애당초 돌려줄 의지가 있었던 건 맞나? 모자를 찾은 시점은 언제인가? 만약 2부가 허구라면, 1부에서는 사진으로만 존재하는, 그조차도 호텔 직원에게만 보여줄 뿐 관객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신화 속 존재로서의 모자와 3부의 모자를 어떻게 구분 지어야 하는가? 왜 사노는 안의 모자가 된 나기의 모자를 발견할 수 없었는가?
1부와 2부의 연결점을 떠올려 보자. 안이 'Beyond The Sea'를 흥얼거리고 카메라는 819호 문틈에 끼운 담배를 비춘다. 이 장면은 3부의 시작점에 그대로 이어진다. 호텔을 청소하는 안의 동선으로 미루어 보아 1부의 현재 시점으로 복귀한 것이다. 문제는 어떤 시점에서든 외모, 복장, 신발 등 안의 모든 외견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2부에서 나기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안은 1, 3부의 청소하는 안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5년의 세월을 감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한 번 묶은 긴 생머리, 파란색 상의와 앞치마는 그렇다 치고, 예나 지금이나 새하얀 크록스를 신고 있는 것은 사물의 행방이 중요한 이 영화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 헤어 스타일을 쭉 유지했고 근무복 디자인이 바뀌지 않았으며 같은 모델의 크록스를 새로 구매했다고 가정하면 말이 되기는 한다. 2부 초반, 안은 바닷가에서 나기를 처음 만났을 때 스니커즈를 신고 있다. 안의 크록스가 일할 때만 신는 작업화라면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1부의 사노가 입은 엄브로 티셔츠가 2부 후반 나기와 재회할 때 입고 있던 옷이라는 점, 모자와 근무복 등 특수한 사례를 제외하면 흰색 티셔츠와 데님 팬츠가 디폴트인 이 영화에서 오직 미야타만이 색상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은 3부의 현실성에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미야타는 1부에서 목욕을 마친 뒤 파란색 가운을 입었고, 빨간색과 파란색 패턴이 그려진 하얀색 셔츠를 입고 외출했으며, 다음날 파란색 하와이안 셔츠를 입었다. 특히 2부에서는 빨간색과 파란색을 섞은 보라색 티셔츠를 입었다. 영화는 바다와 하늘, 안의 근무복, 클럽의 조명에 파란색을, 나기의 모자, 프런트 직원의 근무복, 어느 식당의 앞치마, 관광버스에 빨간색을 심어두었다. 두 색상이 만나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나기가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짧은 시간, 모자를 잃고 낙담한 나기가 사노를 만났을 때 배경에 자리하던 푸른 바다는 새빨간 관광버스로 대체되는 찰나 정도다. 모자라는 표상을 잃었어도 두 남녀의 특별한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2부를 전형적인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그러한 설명으로 충분하다. 한발 나아가 빨간색이 미야타의 픽션을 암시하는 장치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미야타가 색에 구애받지 않는 이유가 각본을 통제하며 극에 직접 개입하는 전능한 작가이기 때문이라면? <슈퍼 해피 포에버>는 많은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사물과 색상의 의미를 기호적으로 해석해 봤자 부질없는 작업에 불과하다. 그 모자가 이 모자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단서가 희미한 탓에 과감한 상상에 매달리게 된다. 널리 공감받을 만한 의문이 아니라 더 애가 탄다. 지면에 발행된 평론가들의 글은 주인을 번갈아 여기저기 떠도는 모자의 여행이 삶의 굴레 같다며 그럴듯한 메시지를 추출하거나, 상실과 되찾음의 감각을 영화 외적인 화두로 승화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나는 몹시 궁금할 뿐이다.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덤덤하게 퇴근하는 안의 모습은 어딘가 기계적이고 섬뜩하다. 동료 직원과 퇴사 기념 저녁 식사를 약속하는 등 친밀한 듯 보이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흐르고, 상급자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싱긋 웃으며 인사하는 안의 얼굴에는 사회생활의 가식 이상으로 인공적인 분위기가 있다. ‘꿈’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에필로그를 삽입한 <미키 17>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안은 동료들에게 먼저 식당에 가 있으라 말하고 나기와 처음 만난 바닷가, 나기가 모자를 마지막으로 점유했던 그 공간으로 향한다. 잠시 바다를 응시하다 돌아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모자를 둘러싼 무수한 의문을 뒤로 하고 갑자기 들이닥친 섬뜩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솔직히 말해 아직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여행과 나날>로 돌아오겠다. <슈퍼 해피 포에버>의 사노가 삶의 의지를 포기하고 주저앉은 인물이었듯, 재능의 부재를 깨닫고 실의한 각본가가 겨울날 한파를 이기지 못하고 숙소를 찾기 전에 사망했다면? <여행과 나날>은 죽음의 이미지가 대칭적으로 새겨진 영화다. 1부에서 나츠오와 나기사는 머리 잘린 물고기가 떠다니는 바다에서 폭우를 뚫고 헤엄치며 죽음을 탐닉하고, 1부와 2부 사이에는 교수가 돌연사한다. 2부에는 누가 죽음에 가까워지는가? 각본가 이가 죽음을 대면하는 장본인이다. 엄동설한에 끝내 기절한 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진입하여 벤조를 만난다. 벤조는 망자를 이송하는 뱃사공 카론일지 모른다. 영화의 엔딩에서 벤조가 함께하지 않는 건 이가 죽음에 이르지 않고 현세로 돌아왔기 때문은 아닐까. 원작 만화의 두 주인공은 풍경 속에서 그저 엑스트라에 불과한 처지를 비관하며 음울한 엔딩을 맞는다. 그런데 벤조와 이는 아닌 밤중에 잉어 서리를 하다 들켜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다. 경찰이라, 2부가 각본이라는 가설을 세울 경우 가장 큰 이질감을 일으키는 것이 경찰이다. 현실인 듯 꿈인 듯 기이한 기운으로 일관하던 영화가 공권력을 소환하며 현실을 환기한 까닭은 무엇인가? 쌍둥이 시로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긴 것일까? 허구와 현실의 균형은 경찰이 등장하기 전까지가 딱 적정했다. 사치코에게 마음을 숨기지 않고 고백했던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의 주인공, 관장에게 "인간적인 기량이 있어요. 정직하고 솔직해요"라는 칭찬을 들었던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의 케이코. 미야케 쇼가 그려온 인물은,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과장하지 않는 그와 닮았다. <여행과 나날>의 인물들이 그가 그려온 인물 군상과 크게 다르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단지 이 영화에는 미야케 쇼 특유의 진솔함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이전 작품들과 접근법이 판이해서 적응에 애를 먹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제와 같았던 <슈퍼 해피 포에버>의 3부와 달리, 에필로그가 없는데도 굳이 경찰까지 등장시킨 선택은 다소 속 보이는 블러핑, 우발적인 일탈로 보인다.
미야케 쇼 감독과 심은경 배우가 내한해 아트나인에서 GV를 진행한다고 하여 달려갔습니다. 앳나인필름이 주관하는 행사인만큼 야외테라스에서 두 분의 사인도 받았고요. 미야케 감독에게 "마따 아이마쇼" 인사를 건네니 다행히 똑같은 말로 화답해주더군요. 다른 일본말로 길게 말했으면 못 알아들을 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