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뜰 날을 기다리기 / 친구들과 슈투트가르트 그림 나들이
잔디밭에서의 시간은 어색하게 잠시 몸을 그곳에 둔 것에 불과했지만, 금요일의 약속을 잡았다는 점에서 좋았다. 교수님의 건강이 부쩍 안 좋아지셔서 취소된 금요일 수채화 수업을 대신해 우리끼리 슈투트가르트에 나가서 그림을 그리자는 거였다.
따사로운 햇빛과 6월 초의 싱그러움이 만연한 어느 금요일이었다. s반을 타고 은주, 율리아, 아나벨과 슈투트가르트로 갔다. 나는 곧장 프랑크푸르트에 가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속이 빵빵한 배낭을 메고 걸었다. 우리는 시나몬 롤로 유명한 베이커리 카페에 갔다. 야외자리가 멋져서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그들과 그곳에 앉았다는 것으로도 이미 그림이 필요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애플 시나몬롤, 초콜릿 시나몬롤, 호두 시나몬롤 등 종류가 많았는데 하나에 4.5유로가 넘어서 그냥 카푸치노 한 잔만 주문했다. 그런 나에게도 맛보기 용으로 3분의 1 크기 정도 되는 시나몬 롤을 주어졌다. 달콤하고 촉촉한 기본 시나몬롤은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맛있었다. 앞으로 독일에 오는 친구들은 전부 이걸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디저트, 커피, 밝기만 한 날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 카페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벅찼고 그동안 지루했던 일상들을 잘 버텨왔다는 보상처럼 느껴졌다. 나란히 앉아있는 친구들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사진으로 남겼다.
오전 수업을 마친 베라가 카페에 합류했다. 남자친구와 살 집을 짓고 있다는 아나벨의 둘째 동생 이야기와 그런 둘째 동생을 싫어하는 막내 동생 이야기를 들었고, 외동이라는 율리아의 씁쓸한 시선까지 느꼈다. 커피 타임을 마친 후 우리는 교회와 작은 저수지, 분수가 있는 Feuersee에 가기로 했다. 제법 쨍쨍한 햇빛에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우리의 발은 전제품 80% 할인을 한다는 작은 미술 용품점 앞에서 멈췄다.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던 아이들은 결국 문을 열었고, 우르르 들어간 그곳에서 아이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빠르게 흩어졌다. 80% 할인을 하고 있는 마커펜, 연필, 자, 잉크, 종이, 펜, 붓 등에 연신 놀라며 심취한 아이들의 표정이 귀여웠다. 은주는 화려한 꽃무늬의 포장 종이와 그 밖의 많은 것을 샀고 아나벨은 잉크 외 많은 것을, 베라도 잉크와 마카, 만년필 잉크 등 많은 것을, 율리아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샀다. 그 사이에서 나도 회색 마카와 대나무 펜, 보라색 잉크, 그림을 보관할 수 있는 두꺼운 종이 가방, 편지지 등을 샀다. 우리가 얼마나 싼 값에 이걸 샀는지, 각자 원가가 얼마인지 신나게 떠들며 목적지로 발을 옮겼다.
마침내 작은 분수가 있는 호수에 도착했다. 호수 뒤편에 오래되고 작은 성당이 있고, 계단에 이곳저곳 앉은 사람들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우리도 널찍한 계단에 자리를 잡고 각자의 스케치북과 물감을 꺼냈다. 물통으로 가져온 깨끗이 씻은 잼 병은 이미 알록달록한 물감이 물들어 있었다. 먹는 물을 그곳에 조금 따랐다. 아나벨은 10개 세트의 빨간색 색연필을 샀다며 우리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율리에는 헤드셋을 꺼내 썼고 우리는 말없이 각자의 종이 위로 시선을 옮겼다. 나는 분수를 뒤로 하고 앉아 아나벨과 율리아를 그렸다. 내 모습도 그들의 종이에 옮겨지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시선을 통해 느껴졌다. 아나벨의 오래된 필름 카메라도 나를 향해 찰칵, 깔끔한 소리를 냈다. 잔잔한 분수의 물 떨어지는 소리와 주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아이들의 뒤편으로 나뭇잎이 겹쳐지는 소리가 곁에 있었다. 오래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런 순간이 선물처럼 주어진다면 이다음에 올 지루한 날들도 다시 버텨볼 만했다.
매일이 이처럼 따사로울 수는 없다. 그런 바람은 무모한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너무 흐린 날에는 영영 빛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 매일이 흐리기만 할 것 같아서 더 어둡게 가라앉는다. 이런 순간을 얌전히 기다리며 여유롭게 흐린 날들을 지나칠 수 있길 바랐다.
해가 질 때까지 그곳에 있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기차 시간이 다가왔다. 여유롭게 미리 떠날 단호함은 없어서, 결국 마지막 순간에 서둘러 일어나 기차역으로 뛰어간다. 내가 탈 열차가 막 들어오고 함께 뛰어온 은주는 편지라며 종이를 쥐어줬다. 멀리 가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 생각 없었는데 편지라니! 창밖으로 사라지는 은주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자리에 앉아 난데없이 받은 편지를 읽어 내렸다. 그 편지는 달콤한 순간 위에 얻은 쌉싸름한 디저트 같았다.
하리에게.
하리야. 큰 가방 짊어지고 짧고 긴 여행을 떠나는구나. 늘 친구들과 가족처럼 붙어있다가 떠나려니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 같아.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말고 무사히 잘 다녀오기를 바라. 가끔 너무 힘든 감정은 굳이 직면하지 않고 흘려보내도 괜찮아. 늘 애쓰고 너무 많은 감정을 가지는 건 힘든 일이니까. 오늘 하루도 참 잘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여유롭게 즐긴 커피타임, 예상치 못한 80% 세일, 아름다운 Feuersee에서의 그림까지. 우리끼리의 작은 미술 여행이었네. 오랜만에 Zeitz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다시 느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지. 요즘 내게 누구보다 큰 사랑과 믿음을 주는 건 곁에 있는 친구들 같아. 꼭 누군가를 찾아 사랑해야만 할까 혼란스럽고 그래. 젊다면 젊은 대로 사랑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만 같은 가련한 청춘이여. 잘 다녀와. 나도 네가 어디 잠시 떠나는 건데도 마음이 괜스레 허전하네.. 이제 나도 아줌마가 됐나 봐. 지내다가 심심하면 들꽃도 보고 그림도 그리고 그러렴. 금방 돌아올 테지만.
2024.6.7. Freitag, Summer.
그리하여 언젠가 너는 무엇이 될까?
유일무이한 하루를 사는 어른이 되겠지.
조금 더 성숙한 네가 되겠지.
그쯤 되면 알 거야. 답을 찾는 것보다 그 과정 속에서 키워진 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수많은 풍파가 찾아와도 금새 웃을 수 있는….
(윤소정의 생각구독 2024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