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외롭다. 그럼에도 순간들.

독일 교환학생 적응기

by 반하의 수필

누구나 외롭다. 그럼에도 순간들.




1. 수업 빠지지 않기_누드 스케치



아이들을 위한 책상들이 교실에 깔려 있어서 밖으로 나갔다. 릴리아는 교수님이 샤이쎄 키즈라고 했다며 “He is evil.” 이라고 소근거렸다. 샤이쎄는 shit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모델 아저씨도 같이 나갔다. 정말 야외에서 옷을 벗고 한다고? 멘자 옆의 잔디밭을 지나서 구석으로 갔다.1번 건물과 2번 건물을 잇는 유리통로 바로 아래쪽이었다. 모델 아저씨는 옷을 벗었다. 우리는 촉촉한 풀밭에 앉았다. 엉덩이가 젖었다. nass 는 젖은. 누드스케치 수업에 갈 이유도 없고 안 갈 이유도 없고 가지 않아도 재미없고 가도 재미없어서 갈지 말지 망설이다가 그냥 오기로 한 참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야외에서 누드 스케치를 하게 되다니, 오길 잘 했다며 안도했다. 수채화를 해도 좋았을테지만 가진 게 연필과 펜 밖에 없었다. 옆에서 릴리아는 잉크로 그림을 그렸다. 중간에 손에 잉크가 다 뭍어서 화장실에 다녀오기도 했다. 릴리아 앞에 작은 수채화 팔레트를 펼쳐 놓은 은주가 있다. 초록색으로 그리는 것 같았다. 모델의 살이 햇빛에 빛났고 나는 모델 뒤로 펼쳐진 나뭇잎들을 그리고 싶었다. 작은 벌레들이 주위를 맴돌고 몸 위로 올라왔다. 학생들은 여기 저기 앉거나 서서 그림을 그렸다. 종이의 크기도 도구도 스타일도 가지각색이었다.



E7C0D95E-8561-4B58-B58E-718845532FE8.jpg




2.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서 그냥 있기


새미가 BTZ에 간다고 해서 나도 그냥 BTZ에 갔다. 물론 할 일은 없었다. 처음에 본 사람은 절단기 앞에 서 있는 한나였다. 한나는 Zeitz에서 같은 방을 썼던, 셀리나의 친구이다. 한나도 Zeitz이후 처음 만나는 거였다. 무척 반가웠지만 역시 특별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한나에게 여름 방학에 뭘 하냐고 물었다. 한나는 매년 가는 기독교 여름 캠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데 그건 항상 재미있다고 했다. 그리고 10월에 있을 미술 시험에 낼 작품을을 만들 거라고 했다. 한나를 지나쳐 막 BTZ에 들어온 베라에게 갔다. 베라가 내게 무얼 하고 있냐고 물어서 “Nothing.”이라고 말했다. 베라는 프린팅 한 걸 찾으러 왔다고 했다. 베라가 한참동안 자신의 작품을 찾느라 여러 선반을 뒤지는 동안 나는 옆에 쭈구려 앉았다. 베라가 보여준 율리아 작품은 대단해 보였다. “너는 너무 귀여워서 씹어먹고 싶어.”라는 문장과 함께 여자를 씹어먹는 여자의 그림이었다. 아나벨은 다소 험악해 보이는 물고기 디자인의 프린팅이었다. 물고기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아나벨다웠다. 베라 옆에 앉아 있다가 선생님께 스케치북 만들기를 배우고 있는 새미를 지나쳐 BTZ를 어슬렁 구경하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게 많았는데 전혀 어떻게 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 서랍에서 잉크를 찾았다. 잉크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나무 펜도 찾았다. 그것들을 들고 자리로 갔다.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스케치북을 올렸다. BTZ에 있는 아이들을 그리기로 했다. 먼저 종이를 자르고 있는 새미 사진을 찍어서 사진을 보고 그렸다. 사진을 보고 그리는 건 쉽다. 움직이지 않으니까. 새미를 그리고서는 오른편의 베라를, 그리고 왼편의 한나를 그렸다. 힐끔 그림을 본 한나는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러다 영어 멘토링 예약 시간이 되어서 BTZ를 떠났다. Tchüss!



IMG_8136 3.jpg




3. 야채카레 만들어 먹기


혼자 카레를 만들어 먹었다. 카레는 여러 가지 야채를 끌리는 대로 살 수 있고 마트에서 포장 없이 마음에 드는 야채를 하나씩 집어 가방에 넣어 올 수 있는 게 독일 마트의 장점이다. 고운 주황 색 당근이나 깊은 보라색 가지 같은 걸 사면 기분이 좋다. 양파를 자르면 눈물이 나는데 눈물이 나면 왠지 사연이 있어 보이니 심심하지 않다. 골든커리 조각은 아시안 마트에 판다. 보글보글 끓는 모습이 예뻐 영상을 남남긴다. 카레 한 그릇을 만들고 그릇에 담는다. 그 한그릇을 사랑하게 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음- 옹기종기 모인 야채들처럼 알찬 하루를 산 것 같은 맛이 난다.


4. 기상과 동시에 산책하기


일어나자 마자 산책을 하러 나가는 건 하루를 무기력하지 않게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가끔은 세수도 않고 우선 밖으로 나갔다. 휴대폰을 일부러 두고 나간 날이면 생각이 더 단순해지는 느낌이라 좋았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거나 심심하면 책의 도움을 받아 심심함을 달랜다. 찍지 못해 아쉬운 풍경이 생기지만 그것을 감수할만큼 주변을 더 자세히 볼 수 있게 된다. 행방불명 된 사람이 된 것 같은 특별한 착각도 재미있다. 산책에서 돌아와서 중요한 연락이 와 있으면 어쩌지, 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는 것도 좋은데 대부분의 경우에 휴대폰에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혼잣말을 좋아하는 내가 혼자 걸을 때면 친구와 걸을 때보다 말이 많은 날도 종종 있다. 쉬지 않고 나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에는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땡땡아! 그리고 줄줄 떠오르는 말을 그에게 말하듯 이어간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가신다. 속에 있는 불투명하고 엉킨 생각을 한 줄기의 목소리로 꺼내면 엉킨 것들도 저절로 길을 찾을 때가 많아 애용하는 방법이다. 그저 덜 답답해지는 것만으로도.



IMG_1911 2.jpg




5.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기


수업에서 잘 하고 있지 못한 것도 기분이 처지는 요인이 된다. 나머지 학습이 필요한 아이가 수업에도 성실하지 못하고 수업이 끝나면 전혀 학습을 이어가지 않으니 생기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럴 때 공부거리를 가지고 도서관에 가본다.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과 깔끔한 가구들, 정렬된 책들, 창밖의 풍경이 있다. 내가 도서관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공부하지 않아 불편한 마음이 조금 해소된다.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나도 뭔가를 하고 싶어진다.


6. 친구에게 연락해보기


대뜸 아나벨에게 산책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고향에 가지는 않았을까, 과제가 바쁘지는 않을까, 그냥 내가 싫지는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지만 좋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자 폭우가 쏟기 시작했다. 강한 빗방울이 창문을 내려치고 날은 금새 어두컴컴해졌다. 회오리 소리가 들렸다. 은주는 이 날씨에 산책을 하자고 하는 건 싸우자는 거라는 일침을 날렸다. 그래도 우리는 만났고 내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근황과 미래의 꿈, 고민 등이었다. 그 애는 독일이 자신에게 너무 덥다며 핀란드나 스웨덴에 가서 직물을 짜고 동물들 그리고 친구들과 자연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신발을 벗지 않고 거리낌없이 카펫이 아니라 바닥에 손을 짚은 아나벨이 두 시간을 머물렀다. 그리고 그가 떠나자 “해냈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저 방에 앉아 대접할 음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 낯을 많이 가리는 아나벨과 그것을 했다는 것에서 우리가 여기까지 올 정도로 시간이 쌓였구나,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녀와 이야기하는 나는 온전한 나 자신보다 훨씬 단순하고 쉬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단순하고 쉬운 영어를 쓰기 때문일 것이다.


7. 용기내어 나가기


6월에 했던 음악세미나, 그때 내가 되게 좋아했던 음악 친구들을 한 달만에 다시 만나는 날이었다. 나만 외국인이고, 나만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데 이건 일대 일 만남에서보다 여러명이 만날 때 훨씬 어렵다. 내가 가지 않는 게 이 아이들에게는 더 좋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를 더 재밌게 해주기 보다는 불편하게 할 것이다. 아이들은 나 하나 때문에 영어를 사용해야 하고 나를 고립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난 외톨이가 될 것이다. 그래서 굉장히 망설였지만, 내가 이들이 보고 싶으니까, 그들 입장 말고 내 입장에서는 가는 게 더 나으니까 가기로 했다. 익숙한 바의 야외 자리에 내가 아는 얼굴과 모르는 얼굴이 섞여 있었다. 전부 여섯명 정도였는데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잡다한 이야기가 진행됐다. 나는 덜 어색해보일 시선처리를 고민하다가 가운데에 있는 꽃병을 보고 있기로 한다. 얼마 후 슈테판이 말을 건다. “그래서 너는 어떻게 지냈어? (So Hari, how is your life going in Germany?)” 영어로 말을 걸어줄 때나 공기처럼 독일어로 벌어지고 있는 대화에서 영어로 답하므로 언어를 바꾸어 줄 때, 그 순간은 매번 힐링이었다. 폭닥하게 감싸안아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마웠다. 슈테판과 이야기를 나누다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말을 붙였다. 이름을 묻고 여러 질문을 하면서 그 대화를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애썼다. 다시 혼자 떨어져 화분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대화는 꽤 오랫동안 흘렀고 나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았다. 안자르라는 이름의 그 친구는 음악학부에서 학생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이였다. 작년에 음악학부 여행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갔는데, 유명한 음악가의 묘지 앞에서 열댓명의 학생들이 그 음악가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에 감탄했다. 이런 단체 여행이라니, 상상하지 못한 것을 그릴 수 있게 될 때 여기까지 오길 참 잘했다고 느낀다.



8. 도자기실 가기


1층 구석에 있는 도자기실에 갔다. 무척 단순하고 무거운 원통형의 속이 빈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아무런 특색도, 필요도 없는 흙덩이를 사포질하며, 원형의 의자에 앉아 멋진 미술 작품이나 도자기 인형 같은 걸 만드는 미술 학생들을 곁눈질한다. 내 손에 든 것은 이곳에 존재하는 데 필요한 소품 같은 것이다. 아무래도 그저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좋다.

이전 02화혼자라는 전투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