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호수에서

나체 호수.

by 반하의 수필

3월의 베를린에서 쓴 맛을 본 후 여름의 베를린을 꿈꿨다. 베를린에 가면 호수 수영을 해야지. 구글맵에 이곳 저곳 보이는 많은 호수에 별표를 찍어두었다. 한국 대학의 친구가 놀러왔고, 우리는 베를린으로 향했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정원이 있던 에어비앤비에서 나와 한참을 걸었다. 고급스럽고 따뜻한 주택보다는 허름한 건물과 밋밋한 벽이 많은 베를린 외곽 마을이었다. 사람도 가게도 많이 없는 거리를 걷는 우리를 차들이 쌩쌩 지나쳤다. 낡은 우반 역에 도착해 꽤 오랫동안 우반을 탔다. 열차에 사람이 거의 다 내린 종점역이 되어 내렸다. 역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쨍쨍했다. 우리는 젤라또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거리에는 마트도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의 지도를 보고 앞으로 쭉 걸었다. Krumme Lanke라는 호수에 가는 길이다.


걷다 보니 산길이 시작되었고 왼쪽으로 햇빛에 비추어 반짝 반짝한 호수의 물결이 보이기 시작했다. 철창 너머로 우거진 나무와 녹색빛의 투명한 물, 낮은 나무에 걸터 앉아 있는 아이들과 물에 떠 있는 부모님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빛나는 것이 비단 호수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걷고 있는 호수를 따라 비스듬히 구부러진 산길도 나뭇잎들을 지난 늦은 오후의 햇살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얼른 물에 도착하고 싶다! 기대되는 발걸음이 총총 빨라졌다. 수영을 하고 온듯한 사람들이 반대 방향으로 지나고 곧 사람들의 비치타월이 깔린 언덕이 나왔다. 내가 걷던 산 길에서 계단 식으로 아래로 내려가면 호수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흥미진진한 미소를 지은 채. 베를린 호수는 누드존이 있다고 들었긴 했지만 오늘 우리가 누드존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몸들이 하나, 둘, 셋, 넷… 참 많았다. 훌렁 벗은 맨 몸들을 처음 보는 친구는 조금 당황한 눈치였고 이미 누드 사우나를 경험한 나는 가보고 싶었던 호수의 누드존을 만나 반가웠다. 노란색 비치타월 위에서 나체로 요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이미 물에 들어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냥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옷을 다 벗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 지 입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노골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고 주의했지만 낯선 광경에 시선이 가는 건 못 말렸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자유롭게 눈동자를 굴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돗자리를 폈다. 나무 뿌리나 돌, 흙으로 매끄럽지 않은 곳이었다. 대신 나무 그늘이 있어 덜 더웠다. 비스듬한 경사 아래 앞쪽에는 세 명의 언니들이 돗자리에 앉아 영어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검은색, 노란색, 카키색 팬티만 입고 위에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였다. 살짝씩 들려오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다가, 나도 그들처럼 바지와 브래지어를 벗었다. 바람이 살결에 부드럽게 닿았다. 햇빛이 닿는 게 좋았다. 마음이 편안하고 주위가 의식되지 않으니 마치 안 입은듯 편안한 옷을 입은듯 하다. 꽉 끼는 수영복을 입을 이유가 없는 듯 했지만 물가로 이동하기 전에 옷을 입었다. 질긴 끈이 살을 누르고 답답하게 몸을 조였다. 땅에 있는 돌들에 발바닥이 따가워 조심 조심 걸었다. 이곳은 호수 수영장이 아니고 그저 자연의 호수이기에 안전하게 물로 들어갈 수 있는 매끄러운 길이나 사다리는 없었다. 물 아래에 큰 돌과 나무 둥치, 자갈, 흙 등 다양하게 있었고 무엇이 있는 지 언제 깊어 지는 지 알기가 힘들었다. 멀리 수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지만 수영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아주 살금 살금 보이는 만큼만 물에 들어갔다. 나보다 더 조심스러운 친구는 물가에 서서 나를 지켜보았다.


물 속에 잠긴 상태로 어깨 끈을 내렸다. 수영복을 벗고 호수에 들어가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다. 가려져있던 상체가 질긴 수영복 없이 호수의 물결과 만났다. 물결은 바람처럼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다음에는 정말로 호수에서 조금 더 멀리까지 나가고 나무 위에도 앉으며 재미있게 놀고 싶다고, 또 언젠가는 사람이 없는 호수에 둘이서만 몸을 담그고 싶다고, 또 언젠가는 어스름한 새벽에 물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돗자리로 돌아갔다.

친구는 이곳에 아시아인이 우리밖에 없다고 말했고 그제서야 그런 줄 알았다. 물 안은 따뜻한데 물 밖에 나오니 추웠다. 머리가 시려워서 금방 두통이 올 것 같았다. 얼른 옷을 입었다. 마른 옷이 몸에 닿자 따뜻했다. 친구는 남은 맥주를 다 마셨고 나는 수채화를 가지고 스케치북에 간단히 그림을 그렸다. 곧 친구는 자신에게 푹 빠진 애인과 전화통화로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사실 그는 막 한국에서 연애를 시작하고 독일에 온 터였다. 사귄 지 한달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라 막 피어나는 사랑에 빠져있었다. 그런 그녀와 다니며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는 그녀와 애인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는데, 아마 그녀가 그를 잊지 못하고 그가 그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7시간 시차가 나는 다른 나라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연인과 그런 친구의 옆에 있지만 어쩐지 많이 멀어진듯한 나. 내 짝꿍같은 친구였기에 곁이 많이 허전했다. 그들의 풋시절 연애를 구경하며 상대적으로 혼자가 된 나는 호수의 언덕 둔치에 앉아 있는 이런 생각을 한다. 부러워만 하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꿈이 없으면 꿈이 없는 대로, 애인이 없으면 애인이 없는 대로. 내 상태가 지금의 내게는 가장 완벽한 걸 거야. 남의 시절을 부러워할 필요 없어. 내가 할 건 내 시절을 가장 잘 즐기는 거야. 이 시절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나를 키워야 그 다음 시절도 온전히 즐길 수 있을 테니까. 인생에서 건너뛰기 같은 건 없어.


지는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날씨는 더욱 쌀쌀해진다. 젖은 머리가 여전히 차갑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던 세 명의 언니들은 한 명씩 볼일을 보러 가는 듯 자리를 떴다. 호수에 앉아 있던 많은 사람들도 이미 집으로 돌아갔는 지 듬성 듬성 비었다. 우리는 돗자리를 정리하고 왔던 산길을 따라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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