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곳을 그리워하는 나에게

유럽 여행을 하며 느낀 것

by 반하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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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맞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름 방학이다. 저렴한 가격에 기차와 비행기에 자주 몸을 싣는다. 스페인에 가는 비행기를 3만 원대에 끊었으니, 그보다 비싼 가격에 수하물을 추가할 생각은 없다. 기내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배낭 하나에 이주일을 담는다. 이북을 보기 위한 아이패드나 스케치북, 물감, 일기장을 넣은 탓에 꽤 나가는 무게는 어쩔 수 없다. 여행에서 쓰고 그리는 걸 포기하는 건 내게 잘 곳 없이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걱정스러운 일이 된다. 기숙사에서 슈투트가르트 공항까지는 열차로 한 시간쯤 걸린다. 그 공항은 제주 공항처럼 작아서 몇 단계만 거치면 금방 비행기 타는 곳 앞까지 갈 수 있다.

기내에는 맥주를 거나하게 마셔 얼굴이 벌게진 독일 아저씨들의 큰 목소리가 들린다. 함께 앉은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의 소음을 피해 헤드폰을 끼고 눈을 감은 사람들이 있다. 맨정신이 쭈뼛해지는 긴장이나 설렘은 한 톨도 없는 취중 비행이라니, 한반도에서 태어난 이는 사뭇 놀랄만한 저가 항공기의 풍경이다. 승무원은 음료나 물건이 담긴 카트를 끌고 좁은 통로를 지나가고 기내 방송은 그것을 팔기 위한 홍보 멘트를 내보낸다. 공짜 물도, 오렌지 주스도 없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빨간색 기내 등이 표시되고 착륙 방송이 나온다. 바퀴가 땅에 닿으며 와장창 큰 소리가 나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그 소음은 비행기가 크래커처럼 쉽게 부서지는 물체였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무사히 비행기에서 나오니 바뀌어 있는 세상의 언어가 국경을 넘었음을 티 낸다. 한 단어도 읽을 줄 모르는 스페인어 앞에서 초보 수준이었던 독일어가 그립다. 수하물을 찾을 필요도 유심을 사거나 환전할 필요도 없이 재빠르게 공항에서 벗어난다.


이번 여행에서 처음 해보기로 한 도전은 세비야에서 가장 싼 혼성 호스텔에 묵기였다. 사기를 당하지는 않을 지 너무 더럽거나 위험하지는 않을 지 많은 걱정을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갔던 도미토리는, 내가 짐을 보관할 때 필요한 자물쇠와 나눠주지 않는 수건을 챙겨오지 않았다는 것만 빼면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작은 아이패드와 지갑, 여권 등을 몸 옆에 붙이고 잔뜩 긴장한 채 잠에 들었다. 더운 날씨에 창문을 활짝 열어두어서 차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지나는 것처럼 시끄러웠다는 것과 2층이었던 침대가 조금만 움직여도 끼익 끼익 소리를 냈던 것은 의외로 괜찮았다.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남아 있는 사람은 휴대전화로 축구를 보는 할아버지와 여전히 쌩쌩 지나는 차 소리뿐이었다. 내 물건들은 무사했다.

쉽게 도착한 여행지에서 나는 쉽게 장소들을 지나친다. 긴 줄을 서는 건 귀찮으니 유명한 관광지를 들여다보지 않고, 여행을 위해 따로 모아둔 돈이 없으니, 일상처럼 간단한 음식을 먹는다. 조리가 가능한 숙소라면 아시안 마트에서 한국 라면을 사서 끓여 먹는 것도 저렴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가 된다. 눈길을 끄는 쨍한 색깔의 옷들과 가죽 장인이 만든 신발, 무게가 나가는 값비싼 노트는 눈으로만 볼 뿐 사지 않는다. 가격은 둘째치고도 배낭에 담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산책하고 가끔 멈춰서 그림을 그리고 배고파한다. 사는 동네만 바뀐 꼴이다. 그럴 거면 집에 있지 왜 거기까지 갔냐는 핀잔을 들을 것만 같아 허공에 대고 말한다. “저도 한국에서부터 비싼 돈 들여왔으면 이러지는 않았겠죠. 제주도 오듯 편하게 올 수 있는 교환학생의 특권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특별하지 않은 기분으로 특별해 마땅한 곳을 정처없이 걷다 보면 지친다. 어느새 여행은 아무런 약속도, 돌아갈 방도 없이 거리를 방황해야 하는 재미없는 하루에 불과하다. 여행을 떠난 이들은 어렵지 않게 이 감정을 맞닥뜨릴 것이다. 예쁜 것, 아름다운 것, 귀한 것, 유명한 것 앞에서의 공허함. 그건 슬픔의 다른 이름. 이 순간을 고이 모래시계 속에 넣었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꺼내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늘 그래왔듯 시간은 멈출 수도, 담을 수도 없다. 몰래 내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포털이 생긴다면 그것을 마다할 리 없이 달려나갈 기분으로, 그 부담스러운 풍경을 버틴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먼 곳에서는, 자유롭고 낭만적이라 부른다.

가보지 않은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큰 다리를 건너 강가에 앉았다. 햇빛은 쨍쨍하고 사람은 많지 않다. 천천히 흐르는 물 위로 카약을 탄 사람들이 간간이 지난다. 작은 물감 팔레트와 직접 만든 스케치북을 꺼낸다. 물통이 없어 허리를 숙여 강물에 붓을 적셨다. 다양한 색으로 종이를 채워보고 붓을 툭툭 쳐 물감을 흩뿌려보기도 하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쿡쿡 찍어보기도 한다. 여러 색의 끈적한 물감이 묻은 손을 대충 강물에 담가 헹군다. 허리를 푹 숙이고 있어 누군가 툭 치면 물에 빠지고 말 것이다.

어떤 문장은 머리가 아니라 손에서 나온다. 덜 마른 그림 옆에 적었다.


Everywhere is nothing more than here. 모든 곳이 ‘여기’ 이상 그 무엇도 아니다.


입사귀처럼 가볍게 이곳 저곳을 날아다녔던 독일에서의 여름방학이 내게 남기는 한마디였다. 모든 곳은 here,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기는 내가 존재하는 자리일 뿐 여기가 어디인지보다 내가 누구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삶의 모든 가능성은 장소가 아니라 내 안에 있다. 피렌체에 간다고 운명 같은 사랑을 만나고, 뉴욕에 간다고 꿈을 찾고, 베를린에 간다고 아티스트가 되는, 그런 기대는 말자. 장소는 때로 멋진 재료가 되지만, 그곳에서 깨닫는 건 고작 내 요리 실력이 하찮다는 사실.

한국에 돌아간 나를 생각한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라면 더 멋진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먼 곳에서의 공허함을 다 잊은 양 그 강력한 숙취에 시달릴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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