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는 삶, 가격은 시간과 사랑

독일 친구의 집에 가다 (2)

by 반하의 수필

10월 중순의 가을날이다. 창밖 나무에 달린 넓적한 잎들이 하나 둘 떨어질 때 현서와 나는 독일 남부의 한 작은 마을에 도착한다. 그곳은 보든제Bodensee(독일 남부에서 가장 커다란 호수)와 가까운 마을이라 물안개가 자욱한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다.


먹먹한 하늘 아래 엄마의 차를 가지고 나온 잔나를 만난다. 반년 전처럼, 기차역에서. 잔나의 어깨에 걸쳐진 검은색 코트는 어깨에서 둥글게 떨어져 A라인으로 우아하게 퍼진다. 그는 검은 코트가 너무 심심한 것 같았다며 실크 스카프를 코트의 단춧구멍에 끼워 리본을 만들어 묶었다. 나는 잔나가 마치 제인 오스틴 소설에 나오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언니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잔나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꽤 오랫동안 마을을 달리다가 점점 높은 지대로 올라간다. 창밖에는 뿌연 안개 대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드러난다. 잔나는 자기 집이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정말 작은 마을에 있다고 말하고, 정말이지 창밖에는 집보다 너른 밭의 소가 더 많이 보인다. 이 마을의 집들은 걸어서 5분에서 10분 정도는 떨어져 있는 듯하다. 매일 얼굴을 마주칠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마을에 딱 하나 있는 교회에서 그들의 정기 모임이 이루어질 테다.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데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잔나도 이 마을의 누가 누구와 결혼했고 이혼했고 바람을 피웠고 돈을 훔쳤고 따위의 오래된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구불구불 시골길을 다 올랐을 때, 잔나의 차가 멈춘다. 교회와 집들로 이어지는 길과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만나는 곳에, 푸른 들판을 마주 본 잔나의 집이 있다. 흰 바탕에 짙은 나무가 사선으로 드러난, 독일의 전통적인 3층 반목조 가옥이다. 차에서 내려 축축하고 짧은 풀들을 밟는다.


잔나는 무거운 컨테이너를 번쩍 들어 올려 차를 차고에 넣어두고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는 바깥쪽 나무 계단을 따라 어머니의 테라피룸으로 올라갔다. 거실과 가족들의 방이 있는 건물과 연결되어 있지만 새로 지은 부분이라고 한다. 문을 열자, 한쪽 벽면이 모두 창문으로 지어진 커다란 방이 나왔다. 높은 천장에 창밖으로는 나뭇잎들이 가득했고 방 안에는 숲 내음이 나는 듯했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곳에서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을 맞이하는 잔나의 어머니를 상상하며 윗층으로 올라갔다. 아래층보다는 천장이 조금 낮고, 역시나 풀들이 보이는 창문 앞에, 정갈하게 세 명을 위한 잠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잔나도 여기에서 자?”

“응 너희와 같이.”


나는 설레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물건이 거의 놓여 있지 않지만, 온통 나무로 이루어져 있어 편안하다. 천장은 높이 치솟은 세모 모양인데, 그곳에 나무를 대어 바닥을 만든 작은 공간이 있다. 벽에 기대어 둔 사다리와 그 위에 달린 작은 독서 등을 보며 잔나가 그곳에 누워 책을 읽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쿠션을 배에 대고 그녀는 어떤 책을 읽었을까? 그런 상상만으로 잔잔한 영화를 보는 것처럼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그사이 현서는 잔나의 어머니가 준비해 주신 과일 바구니를 발견한다. 짚으로 엮어 만든 바구니 안에 사과 네 개, 귤 네 개, 청포도 한 송이, 건강한 쌀과자가 있다. 그것에 감탄한 나는 “나도 누군가 내 방에 왔을 때 그를 위한 작은 간식을 준비해 두어야지” 하며 환대의 방법을 기억에 담는다.


계단이 있는 벽면에는 내 키의 반 정도 오는 작은 문이 있는데, 그 문 너머는 잔나 남동생의 방이라고 한다. 그 방을 가로질러 나가면 거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잔나가 남동생에게 허락을 구한 후, 우리는 불이 꺼져 어두운 그 다락방을 빠르게 지난다. 다시 한번 문을 열고 나가자 계단이 있는 좁은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의 벽면은 책장으로 채워져 있다. 책 제목을 보면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지 대충 알 수 있어 늘 책장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그 독일어 책 제목도 눈으로 훑어본다.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여행 안내서, 피카소를 포함한 미술 도록, 그리고 에이리히 프롬이나 달라이 라마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미 계단 아래로 내려간 잔나와 현서를 따라잡아야 한다. 둥글고 부드러운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보이는 왼쪽 벽은 액자로 가득 차 있다. 사진 낱장이 아닌 액자가 걸려 있자 빈티지한 카페의 인테리어처럼 고전적인 분위기를 주고, 잔나 세 남매의 어릴 적 사진은 누가 봐도 사랑스럽다. 구석구석 구경하느라 걸음이 자꾸만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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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로 들어가는 문에 “문을 살살 닫아주세요!” 라고 써 있는 알록달록 스티커로 꾸며진 종이가 붙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 써둔 듯한 모양이다. 거실 문을 여니 전면에 피아노와 기타가, 그리고 그 옆에 하프와 북이 보인다. 나무가 드러난 흰 페인트 벽에 바닥은 커다란 갈색 타일이다. 벽 곳곳에는 액자에 담긴 그림이 걸려 있다. 주로 꽃과 들판 그림인데 잔나의 어머니나 레아, 잔나가 직접 그린 것들이다. 몇 걸음 걸어 안으로 들어가자, 노란 들꽃이 올려진 둥근 나무 식탁이 있고, 독특한 형태의 주방과 베란다가 있다. 전형적인 독일 집이었던 외관과 달리 직접 지은 집 내부는 한번도 본 적 없는 형태라 흥미롭다.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거니는 고양이 두 마리, 링크와 셀다가 훌쩍 난로 위로 올라가고, 풍성한 털에 눈이 반쯤 가려진 커다란 개 마크는 베란다 앞 시원한 타일에 자리를 잡는다. 잔나는 창고에서 장작을 가지고 와 난로에 불을 붙이고, 곧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현서는 그 난로에 등을 붙이고 앉아 이곳을 느낀다. 숨을 크게 들이쉬면 어린 잔나의 크리스마스가, 커다란 마키가 새끼 강아지였던 시절이, 세 남매가 나눠 먹던 폭신폭신한 팬케이크가 느껴지는 듯하다.



기억나는 시절은 전부 이사를 다니며 여러 아파트에서 보낸 나는 앞으로의 삶을 두고 주택을 꿈꾸지도 않았다. 물론 좋겠지만 집을 짓는다거나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 우선 순위로 둘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집에 오자 내가 처음 느껴보는 시간의 결이 느껴졌다. 집은 거대한 앨범이었고 그들 공동의 창작품이었다.

메모지와 색연필이 손에 없음을 아쉬워하다 나는 잔나에게 A4용지를 받아 여덟 페이지짜리 작은 책을 만든다. 그곳에 내가 본 풍경을 담는다. 돈보다 시간이 더 필요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면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진다. 마음이 일렁인다. 아, 나도 이런 것을 꿈꿔보고 싶다. 몇십 년 동안 익숙하게 쓰던 찻잔을 쓰고 젊었을 때 아이들과 심었던 나무를 보며 천천히 나이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공간에서 익숙하게 움직이는 잔나를 본다. 그동안 “그 팔찌는 어디에서 샀어?” “그 옷은 어디에서 샀어?” 하고 묻던 나의 질문이 이제야 해소되는 듯하다. 그런 말은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내가 내뿜은 호기심이었고 이 집은 그 답변이었다. 정성과 사랑이 겹겹이 쌓인 그들을 위한 집에서 잔나의 심지 굳은 아름다움은 이윽고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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