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독과 가을 일상

배수아의 에세이와 독일의 저렴한 무화과, 매일 똑같은 옷

by 반하의 수필

여름이 지나가는 소리. 여름이 저무는 향기. 가을이 온다.

아침 저녁으로 냉랭한 공기가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창문 모서리부터 김이 서린다.

6개월의 교환학생을 끝내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간 친구는 내게 커튼을 남겼다.


한 학기 동안 미루던 커튼 설치를 시도할 마음이 나자 그 뒤는 미루었던 시간이 허무할 만큼 쉬웠다. 이제는 쭈구려 앉거나 불을 끄지 않고도 옷을 갈아 입을 수 있으리라. 커튼도 러그도 도마도 칼도 들이자 내 방은 훨씬 살기 좋은 곳이 되었다. 은행에 갔고 한 시간 동안 직원들이 사투하여 휴대폰으로 독일 계좌를 사용할 수 있는 온라인 뱅킹을 설치했다. 남은 날보다 지나간 날이 더 많아진 시점, 막 독일에 이사온 사람처럼 생활을 가꾸었다. 전부 다 “진즉할 걸..”하는 마음이지만 후회해도 소용 없다. 덜 게으르고자 한다면 지금도 할 수 있는 일은 무척 많다. 마늘을 다 까서 통에 넣어두기라든지 구멍이 난 옷을 꼬매는 거라든지.



독일의 가을은 풍족했다. 신선한 과일과 야채가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가득했다. 복숭아와 수박, 딸기의 철은 지났지만, 가을에는 사랑하는 무화과가 하나에 0.39유로라는 가격으로 진열대에 놓여있었다. 무화과와 사과, 가지와 토마토같은 것을 마음껏 사고, 1유로대의 최애 빵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었다. 컵라면을 먹던 여름 휴가는 부럽지 않았다. 가을의 꽃이 무과화라면 열매는 페더바이저였다. 막 수확한 포도로 만든 와인인데 그 시즌에만 판다. 페더바이저는 정말 맛있어서 한 병을 혼자서 비울 수 있을 정도다. 친구들과 나누어 먹겠다고 한 병을 사두고선 홀짝 홀짝 방에서 반 병을 먹기 일쑤였다. 살짝 어지러워진 채로 수업에 가기도 했다. 웃긴 건 수업에서 만난 은주도 현서도 비슷한 상태라는 것.



여름에도 잘 읽던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은 가을과도 잘 어울렸다. 길고 어두운 독일의 겨울 앞에서 한 줄기의 위안은 내게 그 책이 있다는 거였는데, 그녀는 검게 빛나는 호수나 살근히 지나는 뱀을, 햇볕을 머금은 호밀빵 같은 걸 아름답게 보기 때문이다. 그녀처럼 감탄하며 바라보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가 묘사한 것들은 내 일상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거였다. 나는 그녀의 글을 반복해서 읽으며 내 앞에 보이는 풍경을 감각하는 법을 배웠다. 그건 날아가는 나비의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 땅에 착지하는 잎사귀를 지켜보는 것, 어두운 하늘 위를 날아가는 검은 새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처럼 한 순간에 오래 머무는 법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고독과 글쓰기만을 원했고, 그것을 제외한 모든 것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여름의 정원에 고립시켰다. 아주 적은 생필품만 사용하고 물과 불을 거의 쓰지 않는 것을 먹었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절제와 단순함이, 어수선하지 않은 정신으로 그녀가 즐겼던 아름다움이 좋았다.


어쩌다 햇빛이 비치는 날, 마을 광장의 이탈리안 카페에서 즐기는 커피와 한 조각의 케이크는 우리가 누리는 최고의 사치이다. 여름이 끝나기가 무섭게 축축하고 냉랭한 날들이 이어졌다.

_배수아, <작별들 순간들>


늦은 밤에도 밝고 시끄러운 도시에 살던 한국 생활과 비교하면, 독일의 가을과 겨울에서 나도 무척 정적이고 절제된 생활을 했다. 때때로 파티나 모임에 대한 홍보가 우편함에 종이로 전달되었고 주변에 번쩍번쩍한 광고가 보일 일이 없었다. 온라인 쇼핑이 지워졌고 일 년동안 한번도 택배를 시키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찾아갈 카페가 없어서 많은 날을 노란 조명을 켠 내 방 창가에서 보냈다. 옷도 몇벌 없었다. 한 달의 반 정도는 엉덩이를 가리는 길이의 검은색 니트에 검정색 레깅스 혹은 갈색 코듀로이 바지를 입었다. 독일의 플리마켓에서 구매한 거였다. 한국에서 겨울 옷을 거의 가지고 오지 않았고, 내가 사는 곳에 있는 가게라곤 맥주와 빵집, 식재료 마트 뿐이었다. 시내에 나가서 찾을 수 있는 예쁜 옷은 비쌌으며 온라인 쇼핑은 하지 않았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시간이 빨리 갔다. 매일 비슷한 옷을 입는 것의 지겨움이나 재미 없음 말고는 불편하지도, 남들의 눈치가 보이지도 않았다. 영화 비포선셋에서 셀린은 폴란드에서 지낸 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티비는 내가 못 알아듣는 언어지, 살 것도 없지, 광고도 없지. 내가 하던 건 그저 걷고 생각하고 글을 쓰는 것 뿐이었어. 소비 강박에서 해방되니 자유로워지더라.

-비포 선셋


마치 나도 셀린과 같은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좀 잘 입고 싶은 날에 도무지 입을 게 없어서 옷장 앞을 서성일 때면 옷을 얼른 사고 싶었다. 조만간 빈티지 샵에 가야지, 그곳에서 어떤 옷을 산다면 그걸 또 일주일에 세 번은 입게 되리라.




IMG_4105.JPG Ludwigsburg의 공원에서



IMG_4107.PNG 벌렁 드러눕기


이전 14화옳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