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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영 Jan 13. 2024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 모두 무대에 갇혀 있잖아

부조리극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가 돌아왔다. 황홀한 캐스팅과 함께. 일찌감치 예매를 해두고 퇴근 후 달오름극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꽤 풀려 걸어가는 길이 더웠다. 대학교 때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레포트를 쓴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고도를 '신'이라고 해석한다고 배웠던 것 같다. 나는 꿋꿋하게 고도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희망'이라고 해석했던 것 같다.

박근형, 신구, 박정자 등 원로 배우 세 분이 정말 열정 가득하게 극을 이끌어나갔다.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건지 신기했다. 많은 부분들이 반가웠다. 나는 원작을 원문으로 배운 적이 있기에, 대사 하나 하나가 익숙했다. 문학은 항상 이렇게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무르곤 한다.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포인트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을 제외하고는 함께 웃지 못했다. 그냥, 슬펐기 때문이다. 결코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리며 행하는 행동들을 보는 것 자체가 슬펐다. 웃긴 대사마저도 절망으로 보였다. 내 마음이 힘들기 때문일까? 2막을 보면서는 조금 울 뻔 했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 이제 여길 떠나자고 하면서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배우들의 모습, 그리고 암전. 내일도 똑같은 곳에서 오지 않을 고도를 기다릴 그들의 모습.

고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답이 정해져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답은 각자가 찾는 것이고, 개인의 삶에 따라 다를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태어나고 언젠가 죽는다'는 대사가 머릿속에 콕 박혔다. 그래, 언젠가 죽겠지. 내가 수 년 간 고민했던 그 실존적인 문제 말이야. 이 부조리하고 끔찍한 삶에서 그나마 붙들고 살 수 있는 나만의 가치, 그것이 고도라고 생각했다. 고도를 기다리는 그 순간만큼은 부조리에 빠지지 않으니까, 그것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이 삶이 반복될 걸 알면서도 계속 기다리는 것. 극중에서 이 무대를 떠난다는 건 '죽음'을 의미하지 않을까. 나만의 고도를 포기하고 삶을 버려버리는 것. 그러니까 배우들은 마지막까지 무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이해하기 힘들고, 부조리하다.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우리 모두 무대에 갇혀 있잖아"

"어딜 가? 고도를 기다려야지"

나에게는 이 대사들이 이렇게 들렸다. "이런 부조리한 삶이라도 살아내야지". 한편으로는 이렇게 들리기도 했다. "삶은 부조리해. 그러니까 너의 자유로 삶을 끝낼 수 있어". 아이러니하다. 나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조리한 삶에 동참하고 있다. 단, 그때는 인지하지 못했고, 지금은 그 사실을 인지한 채로 말이다. 연극을 보고 많은 걸 생각하고 고민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학이 가진 힘인 걸 알지만, 글쎄, 우울증 환자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치열하게 삶에 대해 탐구하면서 살아가자. 그 끝이 죽음이라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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