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 입장에서 말해드립니다
정신과 치료 2년 3개월차, 나는 지금까지 2명의 의사를 만났고, 현재 만나는 주치의와는 10개월째 치료를 이어나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최악과 최선의 치료자를 다 만나봤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을 쓰기 전에 한가지 당부하고 싶은 건, 나에겐 최악이었던 의사가 다른 사람에겐 최선의 치료자일 수도 있다는 점. 그러니까 ‘좋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란 애초에 꽤나 주관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내가 처음 만났던 의사 선생님 A와는 1년 반정도 치료 관계를 유지했다. 처음 병원을 알아볼 때 나는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은 상태였기에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했다. A 선생님은 직설적인 분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최악이었던 치료자였던지라 부정적인 단어를 많이 사용하게 된다. 어쨌든, 선생님은 환자를 쉽게 ‘판단’하고, 본인의 주관이 뚜렷하며, 지시적인 분이었다. 진료 기록을 다시 살펴보니 이런 어투의 말을 많이 사용하셨다.
“자영씨는 어떠어떠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 해요.” (환자를 본인의 기준에서 판단)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또 약을 많이 먹었어요? 왜? 죽고 싶어서?” (혼내는 말투)
2-30분의 진료시간동안 8:2 비중으로 선생님이 말을 많이 했고, 그건 대부분 설명과 판단이었다. 나는 항상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된 느낌이었고, 진료실을 나오면 항상 무언가가 턱 막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첫 정신과였기에 병원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고, 증상은 점점 악화되었다. 결국 나는 선생님에 대한 반항으로 졸피뎀 2주치를 한번에 먹는 자살시도를 했고, 선생님은 내 행동에 화가 나셨다.
“더이상 치료 못해드립니다. 여기서 나가세요.“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며 한 말. 이것이 내가 A 선생님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자살충동과 불안에 휩싸여 있는 환자를 쫓아내버리는 의사. 병원을 나오며 나는 횡단보도로 뛰어들려 했다.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 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 같았다. 나는 분명 살려고 병원을 다니는 건데 왜 더 힘들어지기만 하지? 왜 선생님은 내 마음을 몰라주지? 아니, 애초에 왜 내 마음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시고 멋대로 판단하고 결정하시지? 나는 억울했다.
이 시기의 나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다. 습관적으로 약물 과다복용을 했으며 자살사고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무의미감과 무기력감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마치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병원에서 쫓겨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 근처 대학병원 진료 예약을 잡았다. 진료 의뢰서조차 받지 못하고 쫓겨난 탓에 동네 다른 1차 병원에 가서 처음 보는 분에게 의뢰서를 부탁했다.
그렇게 지금의 주치의 B 선생님을 만났다. 나는 의사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상태였고, 초면에 “저는 이제 의사를 믿지 않기로 했어요”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선생님은 차근차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나에게는 약물치료보다는 면담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셨고, 그렇게 나는 대학병원을 주 1회 다니게 되었다.
치료 초반에 가장 적응이 되지 않았던 건 선생님이 항상 내 ‘마음‘에 집중하신다는 사실이었다. 이전 병원에서는 내 마음보다는 선생님의 판단이 중요했기에, 내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어려웠다. 선생님은 아래와 같은 화법을 자주 사용하셨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동을 했는지를 같이 이야기해보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치료 과정에서 저에게 서운하거나 불편함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그럴 때 피하지 않고 함께 얘기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은 항상 내 상황과 마음에 집중하셨고, 우리는 치료 과정을 함께 해나가는 치료동맹이라는 점을 알려주셨다. 내가 또 버림받을까봐 불안해하면 선생님은 항상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 하셨고, 그럼에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내 마음에 대해 이해하셨다.
나는 최근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제가 죽어도 별로 신경 안 쓰실 것 같아요.” 등의 말을 하며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진료실 안에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수용받는구나, 내 마음을 솔직히 이야기해도 이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는구나. 이건 내 생애 처음 느껴보는 지지 경험이었다.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낸 나에게 없었던, 내가 온전히 수용받는 경험말이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더이상 선생님이 나를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A 선생님은 내가 내 마음을 인지하고 표현하는 걸 기다려주지 못하는 분이었다. 반면 B 선생님은 나에게 결여된 점이 감정 표현이라는 걸 알고 내가 그걸 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분이다. B 선생님을 만나고 반년쯤 지나자 나는 약물 과다복용을 그만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그걸 자해로 풀지 않고 말로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좋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어떤 사람일까? 사람마다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만약 내 주위의 소중한 사람이 병원에 간다면 이런 기준을 제시할 것 같다.
- 환자 1인당 최소 20분 이상 상담해주는 의사
- 환자를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는 의사
-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의사
- 다양한 전문적 기법을 사용해 환자 스스로 자아성찰을 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의사
- 환자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의사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리고, 또 죽일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