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의 산책처럼

산책

by Jerome

산책은 무엇보다도 수년간 내 일상의 행복을 지탱해 주 있다.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가서 걷는 일은 내 존재를 알리는 그날 최초의 공식적인 세리머니이다.

위쪽으로 올라가면 숲 속의 솔밭길을 따라 걷는 것이고,

아래로 내려가면 호수 공원으로 이어져서 가볍게 산책할 수 있다.

숲으로 가는 길은 곰(블랙베어)이 가끔 출몰하여 겨울철을 제외하고는 잘 걷지 않는다.

산책은 그냥 걷는 것이지만 눈과 귀는 열려있고 머릿속은 어제의 낡은 것을 날려버리니 상 새롭다.

계절별로 색을 바꾸는 나뭇잎, 피고 지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 더없이 푸른 잔디밭, 풀 잎에 맺힌 작은 이슬들...

호수 주변의 산딸기 덩굴과 사이프러스 나무들.

창공, 태양의 뜨거운 얼굴과 찬란한 햇빛, 천지를 두드리는 빗소리, 한겨울의 크리스털 스노우, 자유로운 영혼과도 같은 구름, 몸으로 파고드는 공기의 감촉과 온도...

호숫가의 물과 윤슬, 연꽃의 수초와 추억의 물안개.

호수에서 공존하는 캐나다 스(거위)와 비버, 오리, 거북이, 를 닮아 보이는 백로, 까마귀, 갈매기 그리고 이름 모를 물고기들....

호숫가 끝, 작은 정원서 어쩌다 보는 허밍버드.

한여름에도 보는 먼 산의 만년설.

열심히 꿈과 희망을 뿜어 올리는 분수대.

산책하는 동안, 적어도 그때만큼은 대자연과 삼라만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애견과 산책하는 사람들.

엄마와 유모차로 나온 애기의 미소.

호숫가의 강태공들.

가끔은 카누를 타는 사람들...

산책자체가 평화로움이요, 비발디의 사계이며, 고흐 모네의 풍경화가 는 순간이다.


유명한 철학자나 사상가, 예술가들도 나처럼 이렇게 산책을 했을까?

그중에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Reveries of the Solitary Walker'
'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이라는

책 제목을 보면 나 같은 산책을 즐겼을 것 같다.

나도 예전부터 고독. 산책, 꿈(몽상보다는)이라는 단어들을 좋아했다. 내게 긍정적 에너지를 주고 진한 커피 향 같은안함을 준다.

좋아하는 단어가 서로 같고 글에 공감이 다면 취향이 같다고 볼 수 있 것이다.


몇 달 전 호수 공원을 산책하다가 생긴 일이다. 뜬금없이 갈릴래아 호수가 생각났다.

호수의 크기로 따지자면 비교도 안 되겠지만, 그날은 그랬다.

난 구교집안에서 태어나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을 키웠으나 요즘은 주일 미사만 참례하는 정도이다.

그것이 내겐 가끔 가슴을 답답들었다.

그날따라 한걸음 한걸음 호숫가를 걷는데 갑자기 예수가 공생활 하던 갈릴래아 호수와 오버래핑되기 시작했다.

성지순례한 적도 없건만 나는 머릿속에서 미 갈릴래아 호수를 상상며 순례했다.

.... 예수는 호숫가에서 어부인 제자들을 만나고 여러 호숫가 마을 걸어 다니면서 기적을 베풀고 사랑다...

이후 보름동안은 잠자던 신약성경을 다시 펼치 묵상하는 열정을 보였고, 유튜브로는 랜선 성지순례를 했다. 예수가 미션을 수행하 걸어 다닌 동선을 렸다. 예전엔 억되지 않던 이스라엘 지명이 신기하게도 쉽게 각인되었다.

오늘도 나는 호수공원을 걷는다. 아니 머릿속에서는 갈릴아 호수를 대입하며 걷는다.

나는 호수공원 북서쪽을 걷고 있다. 아니 예수가 제자를 불렀던 카파르나움을 지나고 있다.

나는 공원 남서쪽으로 걷는다. 러면서 언덕 너머로는 혼인잔치의 포도주 기적이 일어난 카나지방을 올린다.

계속해서 호숫가 북동쪽으로 걷는다. 예수가 눈먼 사람을 고다는 벳사이다를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멀리 만년산 C 마운틴을 바라보며 잠시 쉬어간다. 아니 예수와 제자의 신비를 간직한 헤르몬산을 상상며 희열하고 있다.


이 정도의 산책라면 장 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너무나도 닮은 산책일 것이다.

이처럼 음을 비우러 나간 산책은 결국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 채워 돌아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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