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한 미용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 진짜 하나님이 하나는 주실 만도 한데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안 주셨는지…….”
몇 년 동안 서너 달에 한 번씩은 봤던 미용사가 그날은 나를 매우 친근하게 느꼈는지, 아니면 아주 기분 좋은 일이 있었는지 내 머리카락에 대한 솔직한 심회를 밝혔다.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들었고, 몇 시간과 몇십만 원을 들여 나온 찰랑찰랑한 생머리에 유난히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 머리카락은 세상이 예쁘다고 하는 미의 기준에 한참 떨어져 있다.
심한 곱슬머리에, 머리카락이 얇아 힘이 없는 모질을 가지고 있다. 한 번은 눈에 들어가 한쪽 구석에 붙은 있는 눈썹을 뗐는데 계속 줄줄줄 나오는 게 아닌가. 다 빼고 보니 머리카락이었다.
너무도 가늘어서 대부분의 미용사들은 내게 머리숱이 없다고 말하는데, 약을 바르다 모자라서 추가로 더 가지러 가는 경우가 많다. 즉, 머리숱은 남들 못지않게 많으나 머리카락이 너무 가늘어 남들의 반만큼도 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힘이 없는 머리카락에 곱슬이니 잔머리가 얼마나 많이 올라가겠는가. 장마철에는 진짜……, 하, 눈물 없이 말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머리카락을 모시고 살았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영양을 최대로 넣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손상이 가장 적다는 약을 쓰다 보니 내 수입에서 가장 많은 지출을 차지하는 게 미용실이었다. 세상이 예쁘다고 하는, 차분하고 단정한 생머리를 유지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더구나 미용실에 가면 최소 4시간을 앉아 있으니 정말 제일 가고 싶지 않은 곳이 치과 다음으로 미용실이었다.
하지만 내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계기도 다른 미용사의 말이었다. 단골 미용사가 그 미용실을 그만둔 후 나는 마음에 맞는 미용사를 찾기 위해 여러 미용실 탐방(?)에 나섰다. 그때 만난 한 미용사가 내게 머리숱이 정말 많으시네요, 했다.
“많으면 뭐 하나요? 가늘어서 티도 안 나는데요.”
“에? 여기서 머리카락까지 두꺼웠으면 어휴, 고객님, 감당하기 어려우셨을 텐데요. 지금은 머리가 곱슬에 부드러워서 손질하기도 너무 좋잖아요. 이렇게 말 잘 듣는 머리가 흔하지 않아요.”
아!
지금 내 머리카락은 하나도 못 받은 게 아니라, 가장 조화로운 결과물이었던 거구나!!
머리카락이 생머리였다면 힘없이 두피에 들러붙어 웨이브 파마를 했을 것 같고, 모발이 두꺼웠다면 박물관에서 자주 만나는 선사시대 선조님들을 매일매일 거울에서 확인하지 않았을까.
또, 내 머리카락의 장점을 알고 나니 흔하지 않은 모질을 처음 만나는 미용사들의 경험치나 미의 기준을 확인하는 용도로 잘 사용하게 되었다. 유행하는 머리모양만 추천하는 사람인지, 내 모질을 제대로 파악하고 나한테 맞는 머리 모양을 추천하는 사람인지 쉽게 알 수 있어 단골 미용사를 찾기에도 좋았다.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고, 대부분 세상을 관통하는 미의 기준이 있다. 하지만 옷을 살 때 그 옷을 입는 ‘나’가 중심이 되지 않으면 옷장을 채우는 용도로만 끝날 옷을 사게 되는 것처럼 그 미의 기준에 ‘나’의 개성이 포함되지 않으면 세상에게 계속 가스라이팅을 당하게 된다. 나의 단점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때때로 장점이 단점이 되고, 단점이 장점이 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은가.
내 머리카락이 가진 최적의 조합을 깨달은 후, 미용실에 가도 영양은 기본만 하고 스트레이트 펌은 더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평소 두피에 좋은 샴푸를 쓰면서 머리카락의 건강을 관리하고, 뜨겁지 않은 바람으로 제때 잘 말려주기만 해도 컬이 잘 정돈된 곱슬머리가 된다.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머리를 좋아하겠지만 나의 생(生)머리는 곱슬, 하느님께서 가장 잘 맞춘 조합(사실은 유전자의 조합이겠지만)으로 주신 내 개성이다. 내 개성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니 지갑도, 시간도, 거울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여유로워졌다.
가끔은 세상의 중심에 내 개성을 놓아도 좋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