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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색경단 Sep 11. 2024

우리의 새벽은 낮보다 뜨겁다

사실, 이 기나긴 여행을 마무리한 건 무려 6개월 전이다.

현재진행형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원인은 전부 나의 게으름 그리고 수많은 변명들에 있다.

시간이 흐른 글이라고 해서 당시의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소중한 독자들이 나의 고백으로 이 창을 닫지 말길...



다시 현실로 돌아온 지금, 35도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을 찾아 들어온 빽다방 대학로점,

아샷추(아이스티 샷추가)와 함께 지난날을 그 어느 때보다 아--주 깊이 추억하고 있으니까.


코르타도를 홀짝이던 시절을 생각하며, 대용량 커피를 살짝 흘겨보고 있으니까.


재즈가 흘러나오던 유럽의 카페가 떠올라, 매장의 케이팝 음악 대신 '잔잔한 팝송 플레이리스트'로 귀를 막고 있으니까.



여행의 아름다운 추억인지, 사대주의인지 모를 이 느낌이 오랜만에 이곳으로 이끌었다.


그럼 문밖의 더위는 뒤로 하고 12월 26일 부다페스트로 떠나보자.



<이 글은 거금을 들인 유럽여행의 본전을 뽑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아침 6시에 일어난 첫 삼일의 기록을 담고 있다>




12/26 (크리스마스 다음날)



"춥다... 아니! 시원하다."


영하 4℃의 추운 날씨마저 부정하며 베이커리를 찾아 밖으로 나온 이유는 명확하다. 즐겨야 한다. 즐겨야만 한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고프지도 않은 배를 핑계로 숙소를 나왔다. 친구들이 깰까 작게 맞춰 놓은 알람소리를 끄고 일어난 건 6시, 화장까지 마친 시각은 오전 7시다. 히터 공기가 가득하던 숙소 문을 열었을 때 훅하고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잊을 수 없다. 빛과 바람이 얼굴에 딱 닿았는데 인공눈물을 넣은 것처럼 눈이 번쩍 뜨이는 그 쾌감. 선명해진 시력으로 바라본 정면은 유럽 건물들이었고, 100% 충전된 핸드폰과 미리 다운받아놓은 오프라인 구글 지도를 보니 어디든지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어찌나 차오르던지. 이곳에서는 길을 잃어도 문제없겠구나.


건물에 햇빛이 들어와 벽돌 하나하나에 그림자가 생기는 모습이 좋다.


어쩌면 추위를 부정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진짜 춥지 않았던 것이다. 설렘으로 가득한 나를 위해 내 몸이 강하게 견뎌준 걸까. 놀라운 인체의 신비다. 아무튼 나는 베이커리를 찾아야 했다. 유럽에 왔으면 바게트, 못해도 커피 한잔은 손에 들고 다녀야 한다. 누가 정한 규칙인지는 모르겠다. 얼른 이 계획을 실행해야 하는데 불 켜진 가게를 찾을 수 없다. 크리스마스는 어제였는데, 다들 출근 안 하나? 이제 휴일 끝, 일상생활 복귀, 달콤했던 쉬는 날은 뒤로하고 다시 출근, 지하철은 지옥철로, 여행자인 우리를 위해 빵 굽는 냄새 솔솔 풍기며 가게 오픈!


... 몰랐다. 유럽은 26일까지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는지. 그렇게 구글맵 화살표를 따라 기차역에 있는 맥도날드에 도착했다. 정말 많은 한국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구나. 부다페스트 시내 한복판에서 한국인 모임이 열렸다. 이렇게 첫 번째 미라클 모닝이 끝났다.


기록용이라기보다는 멋 부린다고 안경을 안 쓰고 나가서 메뉴판이 보이지 않아 찍은 사진




다음날...



12/27 (연휴 끝, 본격 여행 시작)




"온천 가야 돼!!!!!!!!!!!!!!!!!!"


아침 6시, 오늘은 중요한 날이라 모두 서로가 서로를 깨우며 일어났다. 헝가리 필수 여행코스인 세체니 온천에 가는 날이다. 네이버 블로그에서 봤다. 아침 일찍 가야 사람도 없고, 물도 깨끗하고, 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일찍 도착해 온천물을 차지해야 한다. 세수는 가서 하지 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버스에 올라탄다.  



우리 여행자들에겐 버스도 빠르게 길거리를 구경할 수 있는 하나의 코스다. 눈을 부릅뜨고 이 도시의 아침은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에 담는다. 헝가리 사람들의 패션은 어떨까, 다들 어디로 향하는 건가, 또 무슨 일을 할가, 삶의 고민은 무엇일까. 낯선 사람을 만나 깊은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가 여행의 가장 재밌는 순간이다. 내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진다. 주눅 든다는 뜻이 아니다. 앞으로의 남은 생에 차차 알아갈 넓은 세상이 있음에 신난다는 뜻이다. 내가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온천에 도착했다.


모두가 즐거워 보이니 나도 신난다!


제2회 한인 모임이 열렸다. 여기가 온양온천인지. 세체니 온천인지. 사실, 처음 여행길에 오를 때만 해도 여행에서 한국인을 만나는 게 살짝 민망했다. 왜인지 모르겠다. 뭔가 서로 누군지는 알지만 인사는 딱히 안 하는 다른 반 친구와 시내에서 딱! 마주친 느낌? 근데, 이때는 아주 반가웠다. 표를 사는 법도 물어보고, 가다가 실수로 부딪혀도 당당히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한국인들이 많이 없는 곳에서 유학을 하다가 여행을 와서 그런지 든든한 기분이 든다. 모두가 블로그를 보고 깨끗한 물과 넓은 온천과 할인을 누리려 모인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가 한국 사람을 이 시간에, 이곳으로 인도했다.



온천수에 몸을 담그며 두 번째 아침이 지나간다.

세체니 온천의 아침




그다음 날...


12/28 (이동의 날)



어김없이 돌아온 아침 6시. 오늘은 무조건 6시에 침대에서 과감히 나와야 한다. 깨끗한 물, 그리고 할인을 받기 위한 그런 문제가 아니다. 7시 30분 기차를 타고 체코 프라하로 이동한다. 하지만, 우리는 어젯밤 재즈 클럽을 갔다 2시에 귀가했다. 한마디로, 아침 6시에 일어나 새벽 2시까지 쉴 틈 없이 달려 피곤이 쌓일 대로 쌓인 상태. 그래서 30분이라는 실수를 범해버린다. 6시 30분, 부랴부랴 닫았던 캐리어를 다시 열어 옷을 입고, 샤워용품을 눌러 담고, 캐리어에 넣지 못한 짐은 손에 덜렁덜렁 들고 숙소를 나왔다. 밤늦게 도착한 첫날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는데 느낌이 다르다. 그땐 모든 것이 낯설었으나, 3박 4일 동안 주변 가게와 길을 외워버리며 부다페스트의 이 거리와 조금의 정을 쌓아버렸다. 언젠가 여기에 돌아올 수 있을까? 혹은 돌아오고 싶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걷다 보니 어느새 기차역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휴. 딱 맞네.


(위) 코스트코에서 산 소중한 캐리어다. 예뻐서 샀는데 작고 확장도 안된다는 사실... 매 여행지에서 그 많은 짐을 구겨 넣는 게 일이었다.


(좌) 낮인지 저녁인지 구분이 어려운 부다페스트의 아침 / (우) 체코로 향하는 길






이렇게 낮보다 뜨거운 설렘으로 가득했던 3일간의 아침이 끝났다. 앞으로 우리의 여행에서 "아침"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부다페스트에서의 아침이 소중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갑자기 세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이 왠지 그때의 신선한 아침 바람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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