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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색경단 Sep 20. 2024

저 스물하나예요. 삼만보를 걸어도 쌩쌩해요.

안녕하세요.

제목에서부터 스물하나, 나이를 밝히고 시작합니다.

이 말이 저보다 어린 사람에게는 꼰대 같은 과시일 수도,

인생 선배님들껜 조금은 과감한 자랑이 될 것 같네요.


맞습니다. 삼만보를 걸어도 쌩쌩해요.

여행 첫날 기나긴 야간버스를 타고도 삼만보를 걷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삼만보를 걷고 새벽에 숙소로 돌아와요.

그다음 날, 세 시간밖에 못 잤어도 또 삼만보를 걸어요.

또 그다음 날, 택시 대신 두 발로 삼만보를 걸으며 모든 야경 스팟을 섭렵하는걸요.


여행을 다녀오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 사진첩을 펼쳐보는데 스스로가 얼마나 대견하던지요. 분명, 다리도 아프고 추운 날씨를 견디기 어려웠을게 확실하지만 그런 내색 없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진 속 제 모습이 말입니다.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것, 부당해 보이지만 생각해 보면 젊음의 특권이에요. 몰랐으니까, 모든 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니까. 무작정 걷기만 했던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그때만 할 수 있는 귀한 경험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유럽은 버스조차 비싸죠. 택시는 고려대상도 아니에요.

스물한 살의 저는 모든 것을 최저시급 9,860원으로 치환합니다.


"택시비 15,000원"이란, 햄버거 가게에서 한 시간 반 동안 땀을 흘리며 패티를 굽고 감자를 튀기고, 밀린 주문의 컴플레인을 해결하다가 두피 깊숙이 베인 기름 쩐내까지 박박 닦아야 겨우 통장에 꽂히는. 혹은, 카운터에서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이 100명의 손님들에게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가세요'를 반복하고,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죄송해하며 찡그린 얼굴 앞에서 미소를 지어야 받을 수 있는. 소중한 돈입니다.


그러니 걸어갈 수 있는 거리를 두고 시간과 체력을 돈과 바꾸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시간에 9,860원 이상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고, 알바에 비하면 유럽의 거리를 걷는 건 몇 배로 행복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천 원, 이천 원, 오천 원의 가치를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삼만보를 채우곤 합니다. 독일에서부터는 아킬레스건이 부어서 신발을 구겨 신고 다녔어요. 그런데, 제가 타고난 짠순이인 걸까요? 발바닥이 뚫릴 것 같아도 행복했습니다. 저에게는 걷는 게 '효율'이었거든요.


그러다 튀르키예 카파도키아 투어에서 한 어른을 만났습니다. 대기업에서 평생을 바쁘게 일하시다 큰일을 겪고 혼자 세계여행을 다니시는 분이신데, 항상 택시를 타고 이동하셨고 최고급 호텔에 머무셨어요. 하루는 투어 점심시간에 밥을 먹는데 관광지다 보니 평범한 캔콜라 값이 4,500원이더라고요. 그래서 모두 목이 막혀도 참고 나중에 마트에서 물을 사 먹어야지 하는데 그분이 조용히 종업원에게 가더니 콜라 열 캔을 사 와 나눠주셨습니다. 나를 위해 번 돈을 나에게도 쓰기 아까워하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45,000원을 쓰다니요. 스물하나의 계산기로 따지자면 네시반 반을 꼬박 일해야 버는 돈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한식을 못 먹은 저희를 위해 한식당에 데려가 주시고, 들고 온 돈을 다 쓰고 가셔야 한다며 숙소에 돌아가는 택시비까지 챙겨주셨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에까지 이런 호의를 베풀었을까요. 나이가 든다고 해서 돈을 쉽게, 많이 버는 것만은 아닐 텐데 말이죠.


돈은 모두에게 소중하지만 얼마나 어떻게 소중한지는 인생을 겪다 보면 달라진다고, 그리고 그 변한 가치가 여행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거라고 감히, 아주 감히 예상해 봅니다. 여전히 저는 1시간 걸리는 70,000원 비행기보다 8시간 걸리는 20,000원 야간기차를 타는 사람입니다. 일곱 시간 덜 고생하는 것보다 오만 원을 아끼는 게 훨씬 중요한. 하지만, 언젠가 삶의 다양한 측면을 겪다 보면 오만 원을 쓰는 대신 호텔에서 편히 자고 이동하는 게 더 가치 있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요? 물론, 쉴 새 없이 바뀌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르는 사람과 여덟 시간 동안 마주 보고 있는 기차의 낭만을 누릴 수는 없겠지요.


걷는다는 건 기차의 낭만과도 같아요. 느리고 허리가 아프지만 특별하거든요. 다리가 무지하게 아파도 가슴과 머리에 단단히 박혀버린 한 청년의 절약 정신이 아픈 다리를 끌고 한 발 더 나아가게 하는데, 그렇게 걷다 보면 도시 곳곳에 전부 발자국을 남깁니다. 나만 아는 골목이 생기고, 우연히 맛집을 발견하게 돼요. 잠시 쉬려고 앉은 벤치에서 재밌는 이야기가 나와 큰 웃음을 터뜨리면 그것 또한 낭만이고요. 어쩌다 여러 번 지나간 다리에서 보는 풍경은 낮과 밤이 다른 모습인 거 아시나요? 분명 네이버에서는 끝났다고 해서 굳이 찾아가지 않았던 크리스마스 마켓이 알고 보니 문을 열었더군요. 추위를 피해 들어간 바에서 처음으로 와인을 마셔봤어요. 오랜 시간 걷다 보면 생기는 정적의 어색함 때문에 의도치 않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아침에 잘생긴 사람이 일하는 카페를 보고 이미 마신 커피를 한 잔 더 들이켤 용기를 가지게 되었죠. 길을 걷다가 들어간 옷가게에선 교환학생을 갔던 대학 친구를 우연히 만나기도 했답니다.



.



언제까지 삼만보를 걸을 수 있을까요. 언제쯤 시간과 체력을 돈과 맞바꿀 수 있을까요. 한편으로는 나의 편의를 위해 사는 쿨한 어른이 되고 싶다가도, 가끔은 막무가내로 걷고 보는 스물한 살로 남고 싶습니다. 어쩌면 젊은 이 몸으로 지칠 때까지 걷고 또 걷는 게 지금만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삼만보를 걷다 보면 도시를 삼만 번 다르게 느낄 수 있거든요.


자꾸 걷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노래 한 소절이 생각나네요.


"걷다가 걷다가 걷다 보면 바라던 내가 널 기다려~"







문 닫은 님펜부르크 궁전을 보고 돌아오는 길
독일의 영국정원 그리고 핑크 하늘
뮌헨에서 음식점을 찾아 헤메다
뉘른베르크의 예쁜 집
우중충한 날씨의 포르투는 이렇게
해 질 무렵 바르셀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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