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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색경단 May 08. 2024

1화_노오오란 불빛을 따라

웰컴 투 

쿠웨이트에서는 잘 다녀오라며 받은 손인사, 터키에서 경유할 땐 웰컴 투 이스탄불을, 몇 시간 만에 “웰컴 투 헝가리.” 나의 안전한 여행을 응원해 주고 짧은 인연 또한 반겨주며, 새로운 만남을 두 팔 벌려 맞이하는 듯한 이 말들이 은근 나의 기분을 들뜨게 한다. 단순한 인사말을 너무 과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화살표를 따라 도착한 입국심사장 앞엔 사람들이 쭉 서있다. 아무리 긴 비행으로 지쳐있더라도 눈은 아주 살아있다. 내가 살던 곳과는 또 다른 이국적인 풍경에, 언어에, 사람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

어느 나라 사람일까

무슨 색 여권이지

에이 우리나라 여권이 제일 이쁘다

새로운 여권으로 바꾸길 잘했네

앞사람 패션 멋진데

헝가리에는 무슨 일로 온 걸까

여행? 출장? 가족?

앗, 한국 사람이다

저 언니 왜 이렇게 예뻐

-


아직 해외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예를 들어 ‘나’ 같은 사람은 외국인만 봐도 여행 온 기분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언제쯤 외국인이 신기하지 않을지. 외국인 친구를 사귀고, 인종에 상관없이 마음이 통할 수 있다는 걸 경험했음에도 여전히 외국인이 신기해 쳐다본다. 그들도 알고 있을… 분명 알고 있다. 쿠웨이트 대학교 분수대 앞에서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그 눈빛을 확실히 눈치챈 나처럼 말이다.


사람 구경 하며 여권에 도장을 쾅,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왜인지 다시 서울로 돌아온 기분이다. 괜히 영어 대신 헝가리어를 보고 길을 찾아가 본다. 버스 안에서 창문 밖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라즈베리 에이드를 엎어놓은 듯 빨갛게 물든 하늘이 참 예쁘다. 구글 지도대로 가 도착한 곳은 어느 지하철역이다. 20kg 가방을 들고 계단을 오르느라 숨이 헐떡이고 눈앞이 약간 흐려지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건물들이 나를 한 계단 더 오르게 한다. 드디어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땀을 말려 패딩을 뚫고 들어오는 서늘한 기운이 더 크게 느껴진다. 그럴 때마다 몸을 더 움츠린다.



아 맞다.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유럽의 크리스마스. 아주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현실은 여행객을 왕따 시키는 날이다. 모든 가게의 문을 닫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크리스마스라면 장사가 더 잘되어 추가수당을 주면서 라도 일일알바를 구하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모습이다. 마트도 식당도 불이 전부 꺼져있다. 그 가운데로 문을 연 가게가 하나 보인다. 그런 바로, 베트남 음식점..! 역시나 해외에 나가면 언제나 반가운 아시아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 야경을 보고 쌀국수를 포장해 숙소로 돌아가는 일정이겠다. 무거운 짐은 두고 지갑과 핸드폰만 챙겨 밖을 나왔다. 숙소로 들어가는 길엔 보지 못했던 사소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해서 그런가. 이상하게도 굳게 닫힌 상점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설레는 것 있지 않은가? 분명, 설렘보다 지치고 힘든 마음이 더 컸다. 여행을 하러 온 건지, 오기 위해 여행을 한 건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설렘이 없었는데. 음식점 찾기가 힘들다고 불평불만했던 유럽의 크리스마스가 여행의 시작을 설레게 만들다니.


유리창에 다가가 그 안을 바라보았다. 불은 전부 꺼져있지만 가로등의 옅은 조명 덕분에 건물 안이 살짝씩 보인다. 작업실이다. 그림이 걸려있고, 미술도구들이 여기저기 어질러져 있다. 이곳에서 누가 언제 어떻게 그림을 그릴지 상상해 본다. 눈에 레이어가 하나 더 생긴 듯 불 켜진 작업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왠지 30대 당찬 여자가 이 작업실의 주인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늘색 페인트 묻은 앞치마를 입고 있을 것 같다. 


카페를 들여다보았다. 평소에 어떤 사람들이 이 카페에 앉아 있을까? 그들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일까. 음식의 비주얼을 볼 수도, 손님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냥 느낌대로 맛집을 찾아본다. 문이 열려있었다면 쑥 하고 지나갈 곳이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보고, 원하는 대로 상상한다. 마치 구글 평점이 없는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발걸음이 멈추는 곳 앞에서 얼마나 오래 있든지 상관없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저 멀리로 노란 불빛, 노오란, 노 오오란 불빛이 보인다. 국회의사당이다. 



점점 커지는 국회의사당과 노란 불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 불빛에 익숙해져 꽤 오랜 시간 바라보고 있다 보니 훅 치고 들어오는 괜찮은 기분. 나... 유럽에 있다...! 그리곤 잠시 생각해 본다. 오늘은 25일간의 여정 중 첫 번째 날. 앞으로 24일 동안 유럽 곳곳을 누빌 것이다. 이 얼마나 설레는 상상인가. 첫 번째 날에 되찾은 설렘의 감정에 안도했는지, 셀카를 찍는 나의 표정이 밝아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긴장했던 눈의 근육이 조금 풀렸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시 생각했다. 불 꺼진 카페, 갤러리, 마트, 펍 이것들이 내가 앞으로 갈 곳이다. 





쌀국수를 포장해 숙소로 가는 길,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걸었다. 

쿠웨이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자유로운 느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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