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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재개. 선뜻 나이지리아가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야기할 수 있는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기 검열이란 치열할 수는 있으나 객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must-cannot-able to의 구분은 언제나 어렵다.
1.
이번 프로젝트는 범죄자금의 국가 간 이동과 이를 어떻게 막을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법집행기관들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중요성에는 모두 공감하지만 실행은 쉽지 않다. 그 구조를 짜고 실천전략을 마련하며 실제 사건들을 통해 성공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 그것을 만들어 내는게 우리들의 역할이다.
목표와 현실, 극복 방안과 실행전략, 논리적으로는 이러한 순서로 논의가 이루어 진다. 기존 현금흐름에서 나아가 가상자산으로 자금 이동이 이루어지는 경우 법적, 기술적 쟁점들은 이제 부가적인 논의가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주된 현상이 되고 있음을 체감한다. 바야흐로 금융생태계 혁명은 범죄와의 전선에서도 게임 체인저가 되고 있다.
2.
워크숍은 성황리에 마쳤다. 인구 2억 5천만이 넘는 대국, 나이지리아에서 형사사법절차와 관련이 있는 거의 모든 정부기관들의 대표단을 만났다. 특히 나이지리아 경찰(NPF, Nigeria Police Force), 금융정보분석원(NFIU, Nigeria Financial Intelligence Unit), 경제경찰국(EFCC) 동료들과 네트워킹을 맺은 것은 큰 성과다. 4일에 걸쳐 우리가 준비해 간 것들과 그들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맞바꾸었다. 이 나라에서 작전을 전개한다면 누가, 어떤 활동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대강 가늠이 됐다.
농작물의 성장환경을 검토했다면 씨앗을 뿌려야 작물을 수확할 수 있다. 인터폴 오퍼레이션을 담당하는 오피서들이 저마다 개성이 있다면, 내 '스타일'은 굉장히 한국적이라 할 수 있는데, 결국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믿음으로 한 명 한 명 신뢰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전문성과 실행역량이라는 토양 위에 그 신뢰자본은 위력이 배가된다. PoC(Point of Contact)들을 파악하고 별도 회의를 요청한 뒤, 개별 기관을 방문해 가져간 사건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출장 이후에도 누군가 현지에서 도와주었으면 해서 대사관에 파견나온 우리나라 경찰 파견 주재관께도 참석을 부탁했다.
3.
국제 마약상, 마피아, 국가를 넘나드는 범죄조직이 있다면 그에 맞서는 히어로물도 필요하지 않을까. 인터폴은 - 영화들 덕분에 - 그 브랜딩은 성공했으나 현실에서는 집행력이 없는 조직이다. 그래서 실제 일하는 것은 마켓팅과 코디네이션이 주 업무이다. 물론 수사와 법률이라는 전문영역에 기반해야 그걸 잘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본질은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 활동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늘 영업사원이라는 생각으로 임했는데, '정의'를 판매하는 대신 회원국에 줄 수 있는 건 멋진 셔츠와 모자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나이지리아 경찰 당국과 금융정보분석원, 그리고 경제경찰국 동료들이 관심을 보이고 함께 협업하자는 제안에 응하기로 했다. 천리 길도 한 달음에 가고싶던 마음으로 아부자에 왔는데, 첫 걸음을 잘 딛은 느낌이다. 실무적으로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나이지리아 대표단을 서울로 초빙하기로 했다. 다음에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안고 헤어지는 회의는 성공적이다. 각자가 준비해야 할 부분들을 명확하게 하고 별도 회의도 무사히 마쳤다. 나이지리아 인터폴 사무실을 방문하고 운용현황을 살펴볼 기회를 가진 것은 덤이다.
4.
일정 4일차.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오전 마무리회의 마치고 여유로운 오후를 기대하고 있었다. 테니스를 칠 생각이었는데 몸이 무겁다. 내일 오후 출국까진 아직 20시간 가량 남았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염려하다가, 이윽고 컨디션이 악화되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위장병과는 다르다. 식중독이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풍토병에 걸려 버렸다. 수돗물로 양치를 해서 그런가, 샐러드를 먹어서 그랬을까. 배도 아프고 눈 앞이 캄캄하다. 거의 비슷한 식사를 함께 했을텐데 다른 친구들은 괜찮을까.
오후 내 누워 있으며 병원에 가야할지 고민했고, 현지 병원에 찾아가는 것도 실은 두렵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체온은 몇도인지, 여행자 보험 한도 등등 그런 것들을 생각했던 것 같다. 출장을 다닐 때마다 한아름 온갖 약들을 챙겨 다니는데 지금 내가 쓸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방으로 동료들이 찾아왔다. 일단 약을 사와보겠다고 한다. 해질녘이 되어 호텔 밖으로 나가는게 염려되었는데, 그런 안위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한국인 한명은 앙골라 사람을 앞세워 약국으로 향했다. 현지인처럼 보이는 아달베르토가 있으니 별일 없겠지 하며 눈이 감기는 중에 욱킴과 아달베르토가 돌아왔다. 식중독이 꽤 흔하게 있는 일이라 병원 방문이나 처방 없이도 약국에서 바로 항생제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벌써부터 열이 내리는 것 같다. 약을 먹고 두어 시간 뒤 못 친 테니스가 아쉽고, 여유로웠을 출장 마지막 날에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 이제 나는 살았나 보다.
5.
금요일 오전 열이 내렸다. 욱킴이 공항으로 가는 우버를 잡아주었다. 욱킴과 아달베르토는 하루 더 지낸 뒤 가나(Ghana)로 가는 일정이고, 나는 방콕으로 향했다. 아디오스 아부자.
- 202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