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하나가 불러온 재앙
아침 8시도 되지 않았는데 이미 주차장의 절반 이상이 차 있었다. 평소에는 회사 법인 차량인 포드나 GMC에서 만든 덩치 크고 묵직한 SUV들이 주를 이루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달랐다. 반짝거리는 벤츠와 비머는 물론이고, 심지어 재규어에 벤틀리까지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외에도 이름도 모를 비싸 보이는 차들이 나란히 늘어선 걸 보니, 전국 세일즈 디렉터들이 다 모인 모양이다.
아, 그냥 이메일로 보내도 될 일을 굳이 얼굴을 보고 미팅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11시까지 아직 세 시간이 남았다. 나는 누가 부를까 싶어 고개를 푹 숙이고 세일즈 디렉터들의 오피스 앞을 빠르게 지나쳤다. 모두들 벌써 이어 피스를 꽂고 통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작년의 탑 세일즈맨이었던 제프가 창가에서 셀폰을 턱에 끼운 채 전화를 하다가 나를 보며 윙크했다. 내가 세일즈 커미션을 정리하면서, 그가 누군가의 계산착오로 지난 몇 년 동안 적지 않은 금액을 덜 받은 걸 발견했고 덕분에 그는 회사로부터 웬만한 중형차 한 대 값은 되는 돈을 소급해서 지급받았다. 그 이후로 그는 오피스에 들를 때마다 나를 데리고 나가 근사한 점심을 사주었다.
"It’s not because I like you or anything. If the mistake had been the other way around—if you had been overpaid instead—I would’ve handled it just the same." (네가 예뻐서 그런 거 아니야. 만약 실수가 반대였다면, 네가 돈을 더 내야 하는 상황이라도 똑같이 처리했을 거야.)
나는 그에게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는 늘 웃으며 "물론이지."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점심을 먹으며 세일즈 업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제프는 환갑을 넘긴 나이였고, 머리는 반짝이는 백발이었지만 특유의 활기와 유쾌한 성격 덕분에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항상 장난기 어린 파란 눈으로 웃고 있었고, 그 에너지만으로도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타고난 세일즈맨. 나는 그에게 힘차게 손을 흔든 뒤, 내 큐비클에 앉았다.
내 책상 위에 밸런타인데이 한정판 미니어처 허쉬바가 놓여 있었고, 포장지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From: Niles To Junsu라고 직접 손으로 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둘러보니, 각 큐비클마다 똑같은 초콜릿이 하나씩 올려져 있었다. 나일즈가 아침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 커다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이 작은 캔디 포장지에 20명이 넘는 부하직원의 이니셜을 하나하나 적고 놓아두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랩탑 가방을 의자에 던져두고 그의 오피스로 향했다. 그는 오늘 오후 미팅 자료인 내 프레젠테이션을 보고 있었다.
"Well, thank you for the chocolate. How early did you come to the office to do this?" (초콜릿 고마워. 이거 하려고 오피스에 얼마나 일찍 나온 거야?) 나는 그를 놀리듯 허쉬바를 흔들어 보였다. 나일즈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꼭 그 때문이 아니라 오늘 여자친구가 오는 날이라 조퇴하려고 일찍 왔다고 웅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사귀기 시작한 여자친구가 일주일간 타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날이었다.
"Why are you leaving so early? Didn't you say the flight isn’t until the evening?" (저녁 비행기로 온다면서 왜 그렇게 일찍 가?) 그랬더니 그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긁적이며, "I want to go home, clean up, and cook something..." (집에 가서 청소하고, 밥도 해놓으려고...)라고 대답했다.
소도둑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이 남자가 이렇게 스윗하다는 걸, 그 여자친구는 알고 있을까?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Did you get chocolates?" (초콜릿은 준비했어?)
그는 눈을 끔뻑거리더니, 내게 준 것과 똑같은 허쉬바에 여자친구 이니셜을 써놓은 걸 내밀었다.
"Haha, that’s funny." (웃기시네.) 나는 그의 농담에 웃었지만, 나일즈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What are you, a third grader?" (너, 초등학교 3학년이야??) 기가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그는 한숨을 푹 쉬며 진짜 초등학생처럼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Then… should I get something else?" (그럼... 다른 거 사?)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Of course! Get Godiva. And not just from anywhere—don’t buy it at a grocery store or Walmart. You have to go to the actual Godiva store at the mall. Got it?" (당연하지! 고다이바 사. 그리고 아무 데서나, 그로서리 스토어나 월마트 같은 데서 사지 말고, 꼭 몰에 있는 고다이바 스토어에서 사. 알았지?)
나는 거듭 강조했고, 나일즈는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마지막으로 한 연애가 35년 전 하이스쿨 16살 때였다지만 이렇게 모를 수가… 넌 내가 옆에 있어서 행운인 줄 알아. 나는 혀를 끌끌 찼다. 혹시 전와이프한테도 이랬던 거 아냐?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그러겠다는 대답을 받아낸 후 안심하고 돌아와 내 큐비클에 앉아 랩탑을 열었다. 내가 꼬박 일주일 매달려 준비한 자료는 60 페이지가 넘어갔지만 나일즈는 하나하나 다 꼼꼼하게 리뷰를 했다. 다행히 노트는 남겨져 있어도 고칠 건 없었는지 나일즈가 손을 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검토하고, 화장실에 다녀온 후 텅 빈 컨퍼런스 룸에 자리를 잡았다. 나일즈의 자리는 프로젝터 바로 옆으로 비워두고, 스마트 보드 연결선을 확인한 후, 나일즈를 위한 물병까지 미리 준비해 놓았다. 이제 내 할 일은 다 끝났고 가벼운 마음으로 나일즈를 기다리며 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미팅 시간 10분 전.
그런데…
"I was going to leave after 11:00 AM meeting but you told me to go to the mall and buy Godiva so I'm leaving now. You will do great. I trust you." (원래 11시 미팅 끝나고 가려고 했는데 네가 고다이바 사라고 해서 몰에 간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믿는다.)
나일즈에게서 온 문자였다. 30분 전에.
나는 자료 검토하느라 알람을 꺼놨고, 그 덕에 이걸 지금에서야 본 것이다.
내 입안에 물기가 싹 가셨다.
이걸 지금 말이라고…
나는 급히 그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역시나, 안 받는다.
공포와 함께 분노가 솟구쳤다.
이 미팅이 어떤 미팅인가?
회사의 수익이 25% 감소하는 상황에서, 세일즈와 마케팅 팀이 카리브해에서 해오던 연례 트레이닝—트레이닝이라기보다는 사실상 파티에 가까운 행사—대신, 새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시스템 Salesforce 도입을 위한 교육 예산을 짜내야 하는 자리였다. 우리 회사 세일즈 디렉터들은 기본적으로 화려한 호텔이나 미쉘린 스타 레스토랑에서 클라이언트들을 접대하면서 딜을 성사시키는 게 세일즈라고 믿는 구시대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에게 바하마 해변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대신, 컨퍼런스룸 형광등 아래에서 손주들 또래의 소프트웨어 컨설턴트에게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소프트웨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데 이 망할 내 보스가 나를 총알받이로 떠밀고 내빼버린 것이다. 이럴 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