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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2 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정면돌파 외에는 답이 없을 때

by 다소니

내 머릿속에 폭풍이 몰아치는 것과는 상관없이, 11시가 되자 사람들이 컨퍼런스 룸 문을 밀고 들어왔다.

거의 다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몇몇 새로 합류한 세일즈 디렉터들이 눈에 띄었다. 리로이는 건들거리며 들어와 룩 옆에 앉았고, 둘은 피스트 범프를 주고받았다. 곧이어 동부 파이낸스 디렉터 닐과 서부 파이낸스 디렉터 로건도 들어와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이건 내 무대였다.


나는 내 랩탑을 스마트보드에 연결한 뒤, 스위치를 켜고 뒤를 돌아 청중을 맞이했다.

"Welcome. Thank you for attending today’s meeting. For those who don’t know me, my name is Junsu Kim, and I report to Niles Brown." (환영합니다. 오늘 회의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소개하자면, 저는 김준수이고 나일즈 브라운 밑에서 일하는 직원입니다.)


그 순간, 리로이가 몸을 숙이며 노트로 얼굴을 가린 채 룩에게 뭔가 속삭였다. 룩은 내 뒤의 스마트보드를 다시 한번 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웃음을 참았다. 리로이는 아예 대놓고 킥킥거리고 있었고, 바로 옆의 닐도 자료를 보는 척했지만 입가가 실룩거리며 웃음을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회의실 전체가 낮은 소음으로 진동했다. 누군가는 속삭였고, 누군가는 입을 가린 채 키득거렸다.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등 뒤를 돌아보았다.

"S&M Technical Training Budget 2014"

스크린에는 단 한 줄의 미팅 타이틀이 적혀 있었다.

내 얼굴에 밥풀이 묻어 있지 않은 한, 아니, 설령 묻어 있다 해도 이렇게까지 웃길 일은 아니었다.


그때, 세일즈 디렉터 중 최고참인 마가렛이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They are being children, dear. Don’t mind them and go ahead." (이 사람들 애들처럼 굴고 있는 거야.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그 말 한마디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 뒤,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보고된 세일즈 예상 수치부터 시작해, 백 가지가 넘는 비용 중 어떻게 세일즈와 마케팅 트레이닝 예산을 짜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불과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내 프레젠테이션이 지루하고, 소소하고, 무엇보다도 변명처럼 들릴 거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원래도 긴장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영어가 엉키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청중을 둘러보았다.


내가 말을 멈추자 장내는 더욱 조용해졌다.

나일즈를 위해 준비해 뒀던 물병을 집어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새삼 분노가 치밀었다.

이 인간을 그냥 확… 두고 보자.

나는 프레젠테이션 페이지 5에서 마지막 장으로 건너뛰었다.

이판사판이다.


"Look, I know this is not what you guys wanted or expected. But with the sales figures we currently have, it is what it is. This is where we are heading. I know you guys are uncomfortable with Salesforce. So let me offer you my personal help. If you have any issues using Salesforce, reach out to me. I’ll help you get through this. But this is the training budget we have, and it is not negotiable. I’ll send this deck via email so you can look through the details when you want to. Let me know if you have any questions." (보시다시피, 이건 여러분이 원하거나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현재의 매출 수치를 감안하면, 이게 현실이에요.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Salesforce를 불편해하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직접 돕겠습니다. 사용하면서 문제가 생기면 언제든 저에게 연락하세요. 도와드릴게요. 하지만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트레이닝 예산이며, 협상은 가능하지 않아요. 이 자료는 이메일로 보내드릴 테니 원할 때 살펴보시고, 질문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잠시 동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컨퍼런스 룸 벽시계는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Well, that’s all I have. If you don’t have any questions, I’ll give you 40 minutes back." (그럼 여기까지입니다. 질문이 없으시면 40분 일찍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타이틀 페이지로 돌아갔다.


리로이가 피식 웃더니 자기 랩탑을 챙겨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샤넬 넘버 5의 향기를 풍기며, 질 좋은 캐시미어 스웨터 위에 랄프 로렌 울 재킷을 걸친 마가렛이 다가왔다.

"My dear, you did well. I like how efficient and direct you are." (잘했어. 효율적이고 직설적인 방식이 마음에 들어.)

"Oh, thank you for your help in the beginning. Even though... I still don’t know what people were looking at…" (처음에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왜 웃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폰을 꺼내 카메라로 내 얼굴을 비췄다. 나일즈가 남편인 마이크와 애들 학교 번호만 저장된 내 플립폰을 어이없어하면서 최신형으로 주문해 준 새 회사 아이폰이 가끔 이렇게 유용할 때가 있었다.


마가렛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Oh, no, it’s not your face. Uh... it is the title. You may... want to change the title of the deck before sending it out." (아니, 그건 네 얼굴 때문이 아니라… 음, 제목 때문이야. 자료 보내기 전에 제목을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Why, what’s wrong with it?" (왜요? 뭐가 문제죠?)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Well, those boys are making ‘S&M’ stand for Sadists and Masochists, not Sales and Marketing. So combined that with ‘Technical Training’… Well…" (음, 그 남자들이 ‘S&M’을 Sales & Marketing이 아니라 Sadists & Masochists라고 해석한 거야. 거기에 ‘Technical Training’이 붙으니… 그게 좀…)

마가렛은 말끝을 흐리며 웃음을 참았다.


나는 두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 보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 이 망할 인간들….

타이틀이 너무 길어서 내 딴에 줄임말을 쓴다고 쓴 건데, 사람들의 상상력이 그쪽으로 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신 성장이 12살에서 멈춘 리로이가 시발점이었으리라... 나는 끙하고 신음을 했다.

마가렛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조용히 컨퍼런스 룸을 나갔다.


"Well, that was impressive. Usually those meetings drag out to an hour and a half to two hours." (정말 훌륭했어. 보통 저런 미팅은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끄는데.)

제프였다.

나는 아직도 보드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창피해서 머릿속이 하얘졌다.

"Don’t worry about it. It was funny." (걱정하지 마. 재밌었어.)

제프가 웃으며 말했다.

"No, it wasn’t. And I cut it short because I couldn’t speak in English that long."
(아니, 전혀 안 웃겨. 그리고 내가 짧게 끝낸 건 영어로 그렇게 오래 발표할 수가 없어서였어.)

그 말은 진심이었다. 내 영어 실력은 한 시간 동안 프레젠테이션을 할 만큼 좋지 않았다. 발음도 문제였고, 문법도 문제였고, 커뮤니케이션 스타일도 문제였다.


제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Have you ever heard of Toastmasters? It's a public speaking training program." (Toastmasters라고 들어봤어? 대중 연설 훈련 프로그램인데.)

나는 눈만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Let’s grab lunch. I’ll explain it to you." (점심 먹으러 가자. 가서 설명해 줄게.)

긴장이 풀리면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People must be really upset, right?"(사람들 많이 화났겠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일즈라면 어떻게든 돌려서 부드럽게 전달했을 것이다.


"Nah, with sales dropping that much, they probably expected it. And since you offered to help with Salesforce, they’re probably a lot more relieved." (아니야, 매출이 그렇게 떨어졌으니 이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게다가 네가 Salesforce 도와준다고 했으니까, 그걸로 많이 안심했을걸?)

"Oh, about that, the thing is…" (근데 그게 말이야…)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나는 손가락 끝의 굳은살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I actually don’t know how to use it, either. I only watched the demo during their sales pitch. I’ve never actually used it." (나도 사실 아직 그거 어떻게 쓰는지 몰라. 제품 설명할 때 데모만 봤지, 한 번도 안 해봤거든.)

"Wait, WHAT?" (뭐라고???)

제프는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Then why the hell did you say that?" (그럼 어쩌려고 그런 말을 했어?)

"I don’t know, I figured I’d learn before the training starts. It just… came out." (몰라, 트레이닝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그동안 배우면 되겠지 생각했나 봐. 나도 그냥 엉겁결에 나온 말이었어.)

제프는 잠시 나를 뚫어지게 보더니,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Damn, you’ve some guts. I’m impressed."(너 배짱 한 번 두둑하다. 다시 봤어.)

그는 주차장으로 나가면서도 계속 웃으며 나를 그의 콜벳에 태우고 우리가 늘 가던 식당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일즈가 초콜릿을 사고 있는 몰이 보였고, 나는 그 방향으로 힘차게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줬다.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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