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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8. 포세이돈과 하데스

든든한 내 편이 생겼다.

by 다소니

리로이는 여유라고는 전혀 없이 딱 몸에 맞는, 거의 형광색에 가까운 핑크 체크무늬 버튼다운 셔츠와 역시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고, 등에는 백팩을 멘 채 이쑤시개를 씹으며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카페테리아에 들어왔다. 그는 내게 고개를 까딱 인사하고 커피를 뽑았다.

"How was the meeting?" (미팅은 어땠어?)
내가 물었다.

"Meeting? What meeting?" (미팅? 무슨 미팅?)
리로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The 9 AM meeting. With Edward." (9시 미팅. 에드워드랑.)

"Oh, that? They changed the time. The board called Edward to Dallas for an emergency meeting. He sent an email last night. Didn’t you see it?" (아, 그거? 시간 바뀌었잖아. 이사회가 에드워드를 댈러스로 긴급소환했어. 어젯밤에 이메일 보냈던데, 못 봤어?)


… 못 봤다. 내가 열 시까지 일을 했으니 이메일은 그 이후에 왔고, 오늘 아침엔 아직 컴퓨터에 로그인도 안 했으니 당연히 볼 수가 없었다. 세속을 멀리하는 척 잘난 체하며 스마트폰에 이메일을 인스톨하지 않은 벌이다.

나는 쓴웃음을 지을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


"Hey, what’s wrong? Why are you crying?" (헤이, 무슨 일이야? 왜 그래?)
리로이는 내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호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이 와중에도, ‘흑인 남자들은 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라는 쓸데없는 의문이 들었다. 그의 아내가 깨끗이 빨아 다린 듯한 손수건에서 패브릭 소프너 냄새가 났다. 거기에 눈물, 콧물을 묻힐 수는 없는 거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싸구려 종이 냅킨을 뽑아 코를 풀었다.


"Something happened at home? Your husband? The kids? Your parents in Korea? What is it?" (집에 무슨 일 있어? 남편? 애들? 한국에 계신 부모님? 무슨 일이야?)

리로이는 온갖 시나리오를 나열하며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나는 계속 머리를 저으면서도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Argh, God dang it, woman, SPEAK!!!" (아, 젠장! 제발 말 좀 해, 이 여자야!!!)

마침내 인내심이 바닥난 리로이는 두 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HR이 들으면 대경실색할 소리를 내질렀다.

그건 내가 코워커가 아니라, 자기 아내나 여동생쯤으로 여겨져야 할 수 있는 소리였고, 그게 리로이 다워서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진정한 후, 나는 코맹맹이 소리로 아침에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리로이는 내 이야기가 끝나자 숙이고 있던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팽팽하게 폈다. 그러지 않아도 꽉 죄었던 셔츠는 단추가 튀어나올까 걱정될 정도로 팽창했고, 그의 이두박근도 손에 50파운드짜리 아령을 쥔 듯 커져서 반팔 소매 솔기가 터질 지경이 되었다. 그의 얼굴은 격노로 한층 더 검어졌고, 까만 눈동자가 깊은 골이 패인 눈썹 사이에서 이글거렸다. 손에 불이 뿜어져 나오는 삼지창 하나만 들었으면 지옥의 신 하데스로 딱 그만일 듯한 포스였다. 나는 한 시간 전에 만난, 역시 삼지창을 들고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칼을 가진 그 포세이돈과 맞짱을 뜨는 리로이를 상상하며 속으로 탄사를 연발했다.


"First of all, you shouldn’t have passed him on the right in a residential area." (일단, 주택가에서 우측 추월한 건 네가 잘못했어.)

리로이는 낮게 내뱉었다. 빼박을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에게 야단맞는 게 왠지 더 서러워서 나는 숨을 들이쉬고 다시 울 준비를 했다.


"However, what he did was 100 times worse than that. He’s a racist to the core." (하지만, 그 자식이 한 짓은 그거보다 백 배는 더 나빠. 그는 완전 뼛속까지 인종차별주의자야.)

리로이는 이를 악물었다.

"…Huh?" (…응?)

나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No matter what mistake you made, that guy put you in serious danger by chasing you over an hour like that. And trust me, if you weren’t a tiny Asian woman but a big black guy like me, he wouldn’t have dared to do it." (네가 어떤 잘못을 했든, 그 자식이 차로 한 시간이나 널 쫓아다닌 건 널 심각한 위험에 빠뜨린 거야. 그리고, 네가 작은 동양 여자가 아니라 나처럼 덩치 큰 흑인이었으면 절대 그렇게 못했을걸?)

리로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If that were me, I would’ve pulled out my gun, and that would’ve been self-defense." (나한테 그랬다면, 난 총을 꺼냈을 거야. 그리고 그건 정당방위가 됐겠지.)

"…Huh?. A gun?" (…응? 총?)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또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That’s why I keep one in my car." (그래서 난 차에 총을 가지고 다녀.)

리로이가 속삭였다.


내 입이 딱 벌어졌다.

눈길이 카페테리아 출입문에 붙은 ‘총기 소지 금지’ 스티커로 갔다.

HR이 알게 되면…

"It’s not illegal to keep it in the car." (차에 두는 건 불법이 아니야.)

리로이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재빨리 말을 이었다.

"Listen. Next time something like this happens, drive straight to the nearest police station. And call me while you're on the way. I’ll come right away."(잘 들어. 다음번에 이런 일이 생기면 가장 가까운 경찰서로 가. 그리고 가면서 나한테 전화해. 내가 당장 달려갈게.)


내가 왜 멀쩡한 내 남편을 놔두고 리로이한테 전화를 해야 하는지 논리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의 제안에 무한한 안도감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가 내 편이라는 것만으로도, 그날 아침의 재수 없는 에피소드에 마침표를 찍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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