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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l 31. 2024

길을 잃을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데나 머무를수는 없다.

'소신 / 원망'에 대하여

굳이 복수하지 마라, 썩은 과일은 알아서 떨어진다.

누군가 당신에게 해악을 끼치려거든 굳이 앙갚음하려 들지 말고

강가에 고요히 앉아서 강물을 바라봐라

그럼 머지 않아 그의 시체가 떠내려올 것이다(주1).


오늘 새벽 독서토론에서 배신, 기만, 원망, 복수 등과 관련된 얘기를 나눴다. 시작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등장한 악타이온의 이야기를 내가 꺼내면서부터였다. 


음..

내겐 참으로 원망이 많았다...

'원망'이란 단어를 사용하면 왠지 안스럽고 부당한 일을 당한 듯 싶겠지만 '원망'의 다른 이름은 '남탓'이다. 내게서 그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고 타인에게서 찾으려는 순간 '원망'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그 감정에 불의가 섞이면 '앙갚음', 좀 더 심한 표현을 들자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며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근사한 표현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정당성을 따져보니 '원망'이 생기는 것인데 과연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나? 합리적이라면 원망이 아니라 그냥 처리하고 해결하면 될 일인데 인간의 속내에 합리적이지 않다 여기는 마음이 가세되니 원망이라는 감정으로 발아하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나는 합리적이고 정당'하다는 자기기만일수도 있고 점만큼이라도 포함된 오류는 질끈 눈감아버리는 비굴함일 수도 있다. 왜냐면, 인간의 합리라는 속성은 인간으로서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비합리가 무조건 묻어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에 '원망'이 많았다는 것은 

나는 정당하고 상대(또는 대상)은 부당하다는 

나를 우위에 세운 지배논리가 내 안에 잣대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리석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사건에 의해서, '배신감'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는데 그 때 나는, 내가 그간 쏟았던 정성을 배신으로 돌려준 것에 그(녀)를 응징(?)하고 싶어졌고 원망과 한탄과 비애와 심지어 '왜 나에게 사람을 믿지 못하게 해?' 하며 내 마음을 짓이겨놓은 당사자인 그(녀)를 탓하며 괴로웠었다. 

나는 침묵으로 갈 길을 가고 있었고 그(녀)는 여기저기 이말저말 하는 걸로 봐서 갈 길을 잃었던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 때 알게 되었다. 

길잃은 양에게 복수하거나 가르치려는 것을 시도할 필요는 없다. 

길을 잃은 자체가 그(녀)에겐 벌이니까. 


이러한 명제하나가 강력하게 생긴 이후로 내 안의 원망이나 비애, 불안감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감정이란 녀석은 나의 정신에 또 하나의 '자각'을 위해 온 것이라는 사실,

그렇게 자각하는 순간 순식간에 자기 할일끝낸 후련함으로 내게서 떠난다는 사실에 경험증거를 하나 보탰다.


그런데 오늘 새벽 악타이온의 이야기에서 나는 이 명제를 더욱 선명하게 각인시켜줄 근거 하나를 더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또 살짝 이야기를 옆으로 비껴 세우고 한마디 하자면, 나는 가늘고 나약한 실오라기 하나 붙잡고 가는 중인 듯하다. 철학자도 사상가도 아닌 내가 뭔가를 주장, 제안, 권유, 나아가 담론으로 제시하고 명제로서 설득하고 이를 사상으로 구축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언제 끊어질 지 모르는 가는 실과 같다고 여기며 글을 쓴다. 


가는 실을 굵게 만들어가는 이 과정이 내겐 너무 어렵고 버겁다.... 그래서, 가는 실을 굵고 단단한 실로 만들기가 어렵다면 가는 실들을 여럿 모아보자. 그러면 제 아무리 가는 실이라도 뭉치면 단단해지고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이렇게 내가 받아들이고자 또는 만들고자 하는 명제에 보탬이 될만한 근거 하나를 발견하고 뒷받침이 될 사례 하나를 더 알게 되는 것은 가는 실하나 더 보탠 느낌으로 내게 에피파니(epiphany)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신화 속 인물인 악타이온은 여신의 벌을 받아 사슴으로 전신했다가, 제 손으로 기른 사냥개들에게 물려서 찢겨 죽었다. 그런데 악타이온이 이런 변을 당한 것이 팔자가 그래서지 딱히 어떤 죄를 범해서는 아니었다. 그에게 죄가 있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다(주2)... 


길을 잃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에서 시작된 새벽의 호기심은

나는 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가? 로 이어지더니

기어이 악타이온을 죽게 만들고서야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힌 아르테미스의 원망이

내 안에서 날 괴롭히는 원망과 무엇이 다른가? 로 줄기를 뻗어

악타이온이 길을 잃은 것만으로도 죄를 받은 것을 보니

결국, 노자의 가르침대로 운명이 벌할 것이니 인간인 내가 굳이 앙갚음할 필요가 있는가... 에서 멈췄다.


앙갚음을 하겠다고 미워하고 탓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하고 가다가 넘어지라고 빌고... 

이런 악수를 기원하며 내 운명에 나 스스로 죄를 보태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 잘 몰랐고 지금도 여전히 잘 모르는 나이지만 

내 안에서 원망과 같은 미운 감정들을 해석하고 사라지게 할 힘이 이제 생겼구나. 하며 나는 신화속 이야기, 성현의 말씀을 내 삶에 대입해낸 나를 발견했다.


책속 하나의 이야기가 내 삶으로 이어지는 경험.

수천, 수만년전의 사람, 사건이 지금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연결과 동질성.

수차원의 우주 속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사태는 지금 나의 삶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일체성.

이 광활한 우주 속 누군가가, 어디에서든 겪었다면 나 역시 겪을 수 있을 것이라는 연속과 순차성.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진짜 책이, 배움이, 안다는 것이 참으로 내게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늘 새벽의 독서는 내게

나의 사상에 힘을 줄 가는 실하나를 선물했고

원망이나 복수와 같은 무서운 감정이 해석에 의해 내게서 멀어졌고

시공간을 초월한 일체의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다 배움이라는 사실에 감사했고

진정한 앎이란 삶에 대입되었을 때에 가치가 더해진다는 사실을 경험케 했다.


나 역시 길을 잃는다면 누군가로부터가 아니라 내 운명이 날 벌할 것이다.

길을 몰라 잃을 수는 있다. 하지만

길을 헤맬지언정 아무 곳에나 들어서는 일은 없어야겠다.

이를 지켜주는 덕(德)은 소신이다. 

타협하지 않게 이끄는 힘.

내겐 있다.


헤맬지언정 아무 곳에나 머무르지 않을 힘.

늦을지언정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을 수 있는 힘.

잘못갈지언정 돌아서, 물어서라도 당도할 것이라 믿는 힘.


내겐...

있다...


주1> 노자 도덕경

주2>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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