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에선 무조건, 결국 바보된다!

행동리셋 4 -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는 못쓰게 했어요.

by 지담

5년간의 새벽독서를 통해 나를 변화시킨 2가지 - 마인드와 행동.


이를 통해 미래의 변화를 이끌 항목까지 30개를 만들고 오늘은 행동리셋 10가지 가운데 4-'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는 못쓰게 했어요.-를 풀어보고자 한다.


참 재미난 놀이였다.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를 멀리하는 것, 아니 사용하지 않으려는 행동리셋은.

내 입을 틀어막기도 하고 실수로 입밖으로 튀어나오면 허겁지겁 ‘취소취소!!!’하고 소리치기도 하고. 진짜 웃겼던 것은 말이 하고 싶은데 꾹 참느라 애궂은 한숨만 푹푹 내쉬기도 하고 괜히 얼굴만 울그락불그락대기도 했던, 정말 재미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참 요긴했던 행동리셋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언어리셋이라고나 할까.


불평, 불만, 변명, 부담, 부정, 부족, 비난, 비겁, 비참, 비굴, 비웃음, 비아냥, 비애, 비탄...


‘ㅂ’으로 시작되는 이런 단어들이 내 언어나 표현, 표정, 말투에 묻어 있으면 금지시키기로 했다.

우선 나는 불만을 토로하는 여러 가지 감탄사를 많이 자주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IC~~’라든가 ‘어휴~~’, ‘나원참’, ‘뭐???????’ , ‘쳇!’, ‘치~’와 같은 쉽게 터져나오는 이 단어들에는 모두 맘에 들지 않는다는, 상대가 한심하다는, 어이없다는 의미가 묻어 있었다.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서 뭐 대수겠냐 싶겠지만 리셋을 하겠다고 한 것이니 대충 넘어가는 것없이 깔끔하게 고쳐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나의 오래된 습관, 잘 삐친다.

감정의 근육이 약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삐치면 말은 안하면서 괜히 흘려보거나 표정을 굳혀 '나 삐쳤으니까 나한테 관심가져'라고 은근히 티만 내며 상대가 알아주길 바란다. 얼마나 비굴한가? 어린애도 아닌데 말이다. 행동리셋에서 삐치기 금지!!!

일상에서 내 감정이 상하는 경우는 다반사,

삐치지 않는 방법은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말하지?

고민하려다가 그냥 이렇게 말해버린다.

'나 삐쳤어!'라고.

그러니 상대는 '왜?'하며 대화를 시도한다.


이렇게 지금까지 슬슬 삐치는 짓은 하지 않게 되었다. 삐치는 건 사실 좀 많이 비굴하다. 말 안하면서 표정으로 은근히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마음이 담긴데다 상대가 나에게 관심가져주길 바라는 욕구에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너 스스로 알아서 기라는 강압까지.ㅠ.ㅠ 게다가 만약 상대가 이를 무시하거나 못알아채면 애초의 삐친 이유보다 못알아주는 게 더 섭섭해져서 맥락없는 그냥 떼쓰기가 되어버리는, 아무튼 투정같은 건 이제 안부린다.


또 습관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변명이 많았다.

상식선에서 '변명'으로 판명되는 사고는 원래 성격상 거의 없다고 여겼지만 '변명같지 않은 변명', 그러니까 변명인지도 몰랐던 변명, 그것도 비겁한 변명이 내게 있었다. 가령, ‘난 몰랐는데!’와 같은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어쩌면 그럴싸하게 정당하게 보일 지 모르지만 상당히 비겁한 변명이다. 알려고 하지 않았고 몰랐다는 커튼 뒤에 숨어 자신의 안정만을 보장받는, 비겁중에서도 상당한 비겁한 태도였다. 물론,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럴 땐 ‘몰랐어.’라고 말하지 않고 ‘몰랐다는 것조차도 몰랐다. 하지만 알려주면 내 역할을 하겠다.’라고 뒤에 한 문장을 더 말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변명은 단지 언어뿐만 아니라 나의 여러 가지 성향에서 아주 자주 사용하던 방패막이었다.

사람을 만나거나 통화를 잘 하지 않는 나의 성향으로 인해 만나자고 하거나 전화가 걸려오면 어김없이 변명을 했었다. ‘미안, --하느라 못 받았어’, ‘아, 그 날은 내가 —가 있는데 미안해’라고.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 만나기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귀찮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이럴 땐 상당히 난처하다. 약간 곤란한 관계에서는 더더욱 통화를 피한다.


나의 회피성향은 아주 심하다.

그럴 땐 전화기 울리는 소리가 내 귀에 안 들리도록 꺼놓기도 하는데.. 물론, 그냥 안 받으면 그만인 것인데 나는 그 자체가 무지하게 신경이 쓰인다. 부재중전화가 들어와 있으면 당연히 전화를 해야 하는데 어쩌지? 하며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변명하는 것대신 문자를 보낸다. ‘내가 전화가능할 때 할게’라고. 이 말은 변명도 아니고 통화하기 싫다는 말도 아니고..


사실, 잘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나의 성향을 바꿔야 하는데 그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며 또 굳이 이렇게 혼자를 좋아하는 내가 성향을 바꿔야 하나 싶기도 하고... 요즘엔 미리 얘기한다.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만나는 것도 별로 선호하지 않고 전화를 거의 받지 않아요. 필요하실 경우 문자 주시면 무조건 답장은 드립니다.’라고. 이렇게 미리 나를 드러내니 대부분의 경우 나를 배려해주어서 변명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다행이다.


‘ㅂ’으로 시작되는 단어 가운데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을 단 하나 꼽으라고 하면 나는

‘비겁’을 택하겠다.

비겁한 거 정말 싫다.

비겁하면 비굴해지고

비굴해지면 비참해지고

비참해지면 스스로를 비난하게 되고

비난하다 보면 다른 경우(상황, 상대)와 비교하면서 자기비애에 빠져버린다.

남들에게는 당연하고 나 자신에게 비겁하게 굴거나 나에게 비겁이 들킨 경우 용서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나는 내가 싫어진다.


나라는 나약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것도 아니기에 커다란 비굴이야 별게 있겠냐마는 내가 나 자신과의 약속을 못 지키는 것 자체가 내겐 비겁한 짓이다. 어떠한 결의가 있고 도전도 했지만 응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고 태만과 나약, 변명따위에 저당잡혀서 결의도 희미해지고 도전도 무색해지는, 이럴 때 나는 비겁하다고 여긴다. 이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기에 정말 비겁한 정신인 것이다.

엄청난 거짓말장이라 세상까지 속일 수 있다 치자, 그렇더라도 궁극적으로 나 스스로는 못 속인다.

내가 비겁한지 그렇지 않은지.

남들은 내 변명에 속을지 몰라도 나는 안다.

나의 태도가 변명인지 진실인지.

그걸 눈감아주는 처사자체가 너무 비겁해서

정말 비겁은 싫다.


아모스오즈(주1)의 말대로 거짓은 짧은 담요와 같다. 머리를 덮으면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덮으면 머리가 나와 결국엔 들통나는. 나를 속이는 비겁한 짓은 몸통은 다 내놓고 머리만 구석에 쳐박은 채 자신이 숨겨진 줄 아는 어린아이의 숨바꼭질같은 짓이다.


다시 말하지만,

변명따위를 늘어놓으면서 비겁해지는 나를 가만냅두면 비굴해지고 비굴은 나 자신을 비참하게 하지만 비참을 들키기 싫으니 또 다른 변명으로 이를 정당화시키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세상 모두가 나를 비웃어도 내가 나를 아니까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만은 정당해야 하리라.

신독(愼獨)이어야 하리라.


사실 모든 시작은 감정의 근육이 약한 것에서 기인한다.

한때 '냉혈인간'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감정이 없는 사람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내면의 부실함을 단단하게 잡아줄 삶의 지식이 내겐 절실했다.

내면의 강인함은 정신의 부(富)와 연관되고

이는 내 안의 평안과 안정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외부로부터의 반응에 민감하게 떨지 않고 내 안의 깊숙이에서 우러나와 드러나는 나의 존재감.

이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결코 삼가야 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비굴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ㅂ’으로 시작되는 부정적인 언행, 표현은

연결, 연계, 연역된다.

무서우리만치.

이 동네 사는 얘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힘을 키운다.

진짜 이 동네에서 놀면 안된다.

이 동네에서 놀면 결국, 무조건, 곧 바보된다!


상황이나 현상에 불안해지면 이에 대한 방어기제로 현상을 부정하게 되고

부정은 불쾌한 감정을 통해 불평이나 불만섞인 언어와 행동으로 드러나며

이는 사실을 왜곡, 오류화시킬 가능성을 높여 결국,

자신의 안전한 공간으로 비겁하지만 숨겨줄 수 있는 변명을 찾게 된다.


변명은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것이기에 옳게 포장되기 위해서 현상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

관계란 정당성의 대립이니까

대상을 비난 내지 부정하면 자신의 정당이 상승한다.

비교에 의한 일시적인 상승은 곧 추락을 예고한다.


비난변명의 몸집을 더 강하게 키우고 수습이 안될 정도의 비굴한 아첨꾼으로 자신을 내몰며

스스로가 비참해지는 꼴을 면치 못하게 되어

결국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스스로 자신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스스로를 빵부스러기 취급하며 비탄에 젖은 심연의 자아는

자신을 배신한 현실의 자아에게 보복하기 위해

강인함을 버리고 불쌍한 자아를 자처한다.

이렇게 불쌍하고 부실하고 부진해진 심연의 자아는

현실의 자아가 무너지든 말든 아랑곳없이 자아를 부정하며 비애속에 자신을 가둔 채

현실적 자아와 심연의 자아를 분리시켜 버리기도 더 악하게는 분절시켜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연관성과 인과, 상관관계로 인해 애초에

시작은 사실을 사실로 인지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정과 수용, 진실에 기준하되

진실을 표현하기 어려울 경우에는 그저 침묵,

침묵이 아니라면 불평이든 비난이든 남들이 욕을 하든 오해를 하든 나의 말을 하면 된다.

남들은 불평처럼 비난처럼 변명처럼 들을지 몰라도 나에게 그것이 진실이면 되는 것이다.


원래가 진실, 깊은 내면을 전하는 것에는 비난과 칭찬이 동시에 따라붙는 법이다.

오래 묵혀둔 진실일수록,

농익은 관계일수록,

난해한 현상일수록 그러하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같이 동조해주지 않으면 나만 소외되겠지?

뭐 어때, 이 한마디쯤이야, 나 하나쯤이야, 이번 한번쯤이야,

이런 사고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내가 ‘ㅂ’으로 시작되는 그 한마디 안했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지만 나는 바뀐다.

점(點)만큼이라도 내가 바뀐다는 것은 아주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다.


점만큼이라도 내가 바뀌면

관계의 연결성과 사회전염에 의해 내 주변이 바뀌고 내 주변이 바뀌면 전체에 딱 그 점크기만큼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전이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엄청 탁월한 누군가가 이 점을 거대한 구(球)로 변화시킬지 모를 일이다. 난 내 몫을 다하고 더 큰 몫으로 이어갈 누군가에게 바통을 건네주면 된다.


점이 또 하나의 점을, 점과 점이 연결되어 선을, 그렇게 한 번의 점이 찍히면 드디어 선은 면으로, 면은 점이 더 많아지면서 입체로, 그렇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수록 원이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원은 밀도와 부피가 가해지면서 구(球)로, 그것에 채도와 순도와 밀도가 채워지는 것이 결국 변화와 진화로 이어진 조화인 것을.


결국,

내 혀끝의, 눈빛의, 손짓의 작은 점하나가 거대한 구로 이어진다...


따라서

나같이 작은 하나의 점이 구를 이루는 원리는

이기는 이타로

변화는 조화로

하나는 일체로

찰나는 영원으로 가는 세상의 원리인 것이다.


나부터 지키면 되고

나라도 지키면 되고

나니까 지켜야 하고

나만이라도 지켜보자.

그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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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금요일 연재되는 '나는 나부터 키우렵니다'의 시리즈, 마인드리셋/행동리셋/미래리셋을 한권의 책으로 엮었습니다. '나를 변화시키는 30단계'를 한번에 읽고 싶으신 분은 아래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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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북살롱]

책, 글, 코칭으로 함께 하는 놀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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