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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23. 2022

나선으로 걷는 길.

깨우침에 대한 소고

인간은 누구나 생각하며,

더 정확하게는 사고하고 사유하면서 찰나들을 지나보낸다.

우리는 이것을 지각(知覺)이라 표현하는데

지각한다는 것은 '앎'에 도달한 기쁨이기도 하겠지만

참으로 위험한 경계에 놓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스스로가 '알았다!'는 안심으로

지각에 의존하게 되면

대체로 위험수위에 놓였다는 경고를 받은 셈이다.


나의 지각은 단지 내 현위치를 알려줄 뿐,

거기서 저기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인생의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것이며 어쩌면 고이고 썪는 과정만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비로서

지각은 더 높은 차원에서, 애덤스미스가 알려준 '관찰자'의 시선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이 바라봄은 지각을 깨기 위한 시동이며

시동의 감지는 내게 각오에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이 성찰이다.


지각이 관찰자에 의해 깨어지는 그 순간,

내 앎은 모름으로 변화하고

모름은 새로운 차원의 앎으로 나를 안내한다.


지각에는 틈이 있다.

틈을 찾아 치고 들어오는 또 다른 지각.

기존의 지각과 침입하는 새로운 지각의 충돌,

그리고 이 둘의 연합.

이 찰나의 소름끼치도록 놀라운 경이가 깨우침이다.


관찰자의 시선은

분명 나보다 고차원적이기에

그의 시선에는 도덕과 윤리, 조화와 통일, 통합이라는 거대한 가치가 담겨 있다.

이러한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내가 자리잡은 현주소는 냉정하게 파괴된다.

파괴의 통증은 너무나 괴로워서 이리저리 피해도 보지만

결국 지고 마는, 져야만 하는, 결코 이길 수 없는 감각이다.


이 감각에 순응한다는 것은

올더스헉슬리의 표현대로 '신성한 무관심'을 달성하기 위한 '고행중의 고행'이겠지만

결코 나를 엉뚱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성 이그니티우스 로욜라는 만일 교황이 예수회 신학대학을 탄압한다면 어떤 기분이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25분정도 기도하고는 거기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답했다.
아마도 이것이 모든 고행중에서 가장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부은 이상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신성한 무관심' 을 달성하는 것 말이다.

크게 성공한다면 좋은 일이다.
그리고 실패한다 해도 역시 좋은 일일 수 있는데,
그것이 시간에 속박된 제한된 마음에게
지금 여기에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나기만 한다면 말이다.
                                                                                            -올더스헉슬리 '영원의 철학'

결국,

깨우친다는 것은 '기존의 앎'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외면하고 버리겠다는 의지로 획득한 결과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찰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구체적 언어와 현상의 조합으로서의 앎'의 여백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세상으로부터 내게 스며든 '감각'이 투영되어

'공감'과 '공유'의 질적 누적을 야기하는,

즉, 구체화된 지각이 추상적인 감각과 혼합되면서  

파괴는 해체로, 해체는 재형성의 단계로 연결되는 지각의 운동이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내가 아는 '명사와 현상의 조합으로서의 앎' 안에 세상 전체가 담겨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시력(視力)이 시력(時力)을 너머 지력(知力)으로 치고 나가는 찰나가

곧 깨우침이다.


찰나들의 결과의 누적이 인생이라는 관점에 동의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깨우침은 연속되어 영속성을 지녀야 한다가 명제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지각이 감각으로 인해 평정을 잃고 무너지는 찰나, 즉 깨우침의 순간은 

또 다른 평정을 위해 지각을 재형성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지각이 창조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는 그 위치에서 다시 상향조정을 위해 대기할 뿐, 앎의 도달은 아닌 것이다.


이에 대해,

릴케의 '화살은 살이 나가는 순간에 자신 이상의 것으로 초월하게 되는 것을 위하여 활줄의 긴장을 견딘다.'라는 싯귀는 얼마나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표현인가?

활과 화살이 제 기능을 하기 위해 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의 제대로된 기능, 깨우침을 위해서도 괴로움과 긴장은 필히 동반된다.


현재를 살면서 제대로 기능한다는 것은 전체에서 쓰임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빛처럼 말이다.


깨우침은 영어로 'realize' 또는 'enlightenment'로 표기된다.

real,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이 과정은 en-light, 빛으로써 내 인생을 나아가게 하는 길이다.


'모든 개인은 그 자체가 목적인 것으로 대접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말에는

지속적으로 깨닫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적성을 향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현실'은 내가 목적한 바를 위한 길에서의 찰나이며

'현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의 총체다.

자연에는 문이 없고 하늘에는 천정이 없고 땅에는 바닥이 없으니

내가 서 있는 이 곳, 현실이야말로 내가 사용할 권리 모두를 부여받은 총집합체인 것이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현실탓을 한다면 혼나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주고 나를 깨우치려 애쓰는 자연에게 말이다.

혼나면 알게 된다.

내가 상투적으로, 그저 내 시력에 의존해 봐왔던 모든 것에는

나에게 던져주고자 하는 의미있는 메세지가 담겨 있음을.


매번 혼나면서, 징징 울면서도 목적한 바를 위해 현실의 길을 걷는 이는 지독하게 아름답다.

'아름답다'라는 형이상학적인 단어를 무슨 수로 표현하겠냐마는

현상에 감각이 추가되어 이 틈새의 여백에 새로운 지각이 투입되고

여과와 투사, 혼합을 통해 이뤄낸 통일과 통합은 더 커다란 창조로 세상에 드러나고,

잉여를 즐기려 잠깐 안도하지만 이내 안도를 냉정하게 뒤로 내치며

다시 파괴와 해체와 재형성의 과정으로 나를 진입시키는,

이 괴롭고 더딘 루틴으로 발길을 두는 이의 걸음은

너무 단단하여 경이롭고 숭고하며 감사하기까지 하다.


'제대로 쓰인다는 것'은 사물이나 유한한 어떤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

자연의 일부로서 '나'라는 개체도 제대로 쓰여야 한다.

현실에서의 기능을 숙련시키는 것 말고도

'개인'이라는 개체는 세상의 조화와 통합을 위한 쓰임의 가치를

분명 지니고 있다.


이 조화와 통합은 기능을 너머 초월된 지각의 개입없이는 어설프다.

어설픈 쓰임이 아닌, 제대로 된 쓰임은 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거대한 흐름에 나를 들이밀고 그 흐름의 속도와 방향에 맞춰 현실의 보폭을 유지하는 것이어야 한다.

마치 나선처럼 말이다.


올더스헉슬리는 인간의 영적진화는 나선의 구조라야 한다고 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작은 원이 더 큰 원으로 확장되는,

되돌아가려는 힘을 빼버린 진화의 과정 곳곳에 깨우침은 존재한다.

머물고자 하지만 결코 머물 수 없는 깨달음으로 가는 찰나가 곧 깨우침이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앎', 즉, 지각은 새로운 지각으로 파괴되어 해체되며

이 과정에서 새로운 '앎'은 재형성된다.

이에 실천이 가미되면서

지적세공이 새로운 지각의 재형상화가 되는 찰나의 순간,

바로 스스로 진화하는 깨우침이다.


우리 삶은

자신과 자신을 품어준 세상을 향해,

범우주적인 시선에서 본성적이고 근원적인 깨달음으로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미지수를 품은 채

지속적으로 걷는 길이다.

이런 이유가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깨우침의 길이며

고행 중의 고행이겠지만 이러한 찰나들을 수시로 만들어내는 것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안고 사는 미지수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일 것이다.


릴케 <제2비가>

올더스헉슬리 <영원의 철학>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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