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에 지담북살롱을 만들겠다고 결정한 후
1주에 1번정도 양평을 오간다.
볼일은 잠시,
거의 반나절을 강옆 벤치에 앉아 글을 쓴다.
그러다 문득...
강물에 비친 나무와 하늘과 구름과 새들이 눈에 들어왔다.
강은 제자리를 지키며 고요할 뿐인데
참으로 많은 것들을 담았다 흘려보낸다.
이 구름에서 저 구름을,
처음엔 한마리였는데 잠시 후 V자로 줄맞춘 여러마리 새들을,
아무 것도 없이 하늘만 가득하다가도 곧
바람이 나무잎을 흔들어
자신의 평온을 깬 요동까지 모든 것을
담았다 흘려보냈다 하며
그저 오가는 모든 것에 참견하지 않는다.
늘상 봐왔던 장면인데 이 날따라 내 가슴은 유난을 떤다.
강물이 나무와 새와 구름을 좇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와 새와 구름이 강물을 지나갔던 것이었다...
강물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줬을 뿐.
지나가고자 하는 것에 그대로 길을 허용했을 뿐.
열어놓은 채로 모든 것을 수용했을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신이 품은 생명체를 지키며 자기 갈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다.
나도 이러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매일 나의 입으로 나를 위해 흡입시키는 생명체들 -쌀도, 상추도, 김치도 모두 생명이 있었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은 에머슨이 말한대로 '보은하지 않는' 천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그것들을 내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시켜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라는 사람이 가야 할 길을 향해 나를 위해 희생된 모든 생명들을 그저 품은 채
나를 지나가는 모든 것들, 모든 이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제 갈길을 가는데 힘을 보태어 보내야 할 것이다.
강은 그대로인데 강표면이 변화하는 것.
고요하지만 유동적인 움직임을 갖는 것.
나도 강물처럼 일관되고 고요하게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겠다.
내가 고요를 지킨다면 현상은 나를 거쳐 자기 갈 길로 갈 것이기에.
현상에 감각을 곧추세울 필요도
내가 어찌 잡아보겠다 힘쓸 필요도
오지 말라 막을 필요도 없음이다.
강물이 맑다면 있는 그대로를 담을테고
혼탁하다면 오는 것조차 비추지 못하니
나의 모습도 이러해야겠다.
나의 자세는 나의 내부가 드러나는 표현이다.
괴테가 어린 시절 동화를 상영한 후 느낀 것처럼 '어릴 적부터, 내가 나 자신이나 세상을 바라볼 때의 내적인 성실함이 나의 외모에도 나타나' 있는 것이 자세다.
즉, 나의 자세는
움직이는 나의 지성과 심성이 어떻게 연합하고 진화하는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고요하면 고요한대로 내 육신의 연합은 세상 모든 것에 애쓸 필요가 없을 것이며
요란하면 요란한대로 내 육신의 연합은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당할 지 모른다.
자세란. 이런 것이 아닐까?
나에게로 온 모든 것들이 지나간 흔적들의 누적.
역사라고 표현하는 그 찰나들의 총합이
지금 나의 눈빛, 말, 글, 손짓, 나의 외적인 모든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닐까.
평소 스스로의 정화력으로 맑아진 강물이 모든 것을 그대로 담아내듯이
지금 나의 탁도는 내 역사의 결과다.
'기본적인 자세'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삶의 기본,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부여잡으려는 애처로운 심정의 외면화다.
'자세가 모든 것이다.'라는 말은 진리다.
누가 보든 안보든 강물은 스스로를 정화하고 있었다.
신독(愼獨)이어야 한다.
나 스스로 나를 얼마나 검열하고 정화해내었는지는
지금 나에게서 나가려는 모든 분출물 -말,글,표정,행위- 들이 증명하고 있다.
퇴계는
실천, 즉, 행위로 드러나는 것은 윤리적, 도덕적인 것을 말한다기보다
일상의 모든 행동거지에서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성공적인 수행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가 김돈서에게 주는 서한에 앉고 눕는 자세, 궤좌(跪坐), 위좌(危坐), 언와(偃臥)까지
상세하게 알려준 것을 보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행하는,
이미 내 몸에 배어 있는 작은 행동거지,
즉, 몸가짐에는 사물과의 상호작용뿐만 아니라 마음 자세까지 모두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외적자세, 한마디로 언행은 나의 지적, 심적 연합의 드러남이다.
오관(五官)으로 들어온 현상이 머리로,
머리에 각인된 지각이 가슴으로,
가슴의 주관으로 모든 세포가 반응하는 미세한 움직임은 다시 감각으로,
이 각각의 운동들이 어지럽지도 엉키지도 않게
자기 자리에서 자기 기능을 수행하도록
주관하는 철학이 자신에게 심겨져 있을 때
내 육신의 연합은 철학의 지휘 아래 말 그대로 '효율적'으로 연동되어 외적으로 창조될 것이다.
내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창조이기에
창조는 곧,
신독의 지속과 지성, 마음, 감각, 그리고 행위의 효율적인 연합의 결과이다.
'열려있는 마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인 듯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제각각 움직이게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각과 인식이 통제하고 조율하는 기능까지 받아들이겠다는 더 깊은 의미까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마치, 강물이 미생물부터 암모니아까지 모두 품으면서
스스로 조율하여 정화시키며
모든 것을 담기 위해 자신을 열고서
표면의 고요함을 지독하게 고집하듯
나는 그것을 닮아야 한다.
모든 것에 열려 있되 '기본으로써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는 정화에 민감하고 분주해야 하는,
결국, 지적수행을 통해 드러나는 몸가짐이며 마음가짐이 실천과 연합되었을 때
우리는 '바른 자세', '갖춘 자세'라고 인정할 수 있겠다.
나에게 나무를 베는 데 6시간이 주어진다면
도끼날을 가는데 4시간을 쓸 것이다.
유명한 링컨의 명언이다.
링컨이 도끼날부터 갈았다는 실천은
나무를 베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수용과
주어진 조건 모두를 이해한 지각과
그것들을 오로지 받아들인 그의 열린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방향을 지목했기 때문이며
이 마음은 목적하는 바를 위해
시간의 함수 안에서 기본-도끼를 가는-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결과를 위한 효율적인 실천이었던 것이다.
흔히들,
'제대로 칼을 갈았네'라고 한다.
무언가를 결단하고서 기본기에 엄청난 힘을 쏟았다는 표현이다.
날카로운 칼에 손을 베이는 일은 없다. 제대로 용도에 맞는 재료를 베는데 용이할 뿐이다.
'칼을 간다'는 의미는
왜 칼이 필요한지에 대한 목적과
칼이라는 도구의 이해와 위험성과
칼을 휘두를 때의 시기적절함이 모두 연합되었을 때
'칼을 가는' 행위에 혼을 담을 수 있다.
제대로 날세운 칼 앞에
우리는 '서슬이 시퍼런' 기(氣)를 느낀다.
기본 자세란 이렇게 '서슬이 시퍼런' 경지를 만들어낸다.
제 아무리 엉뚱하고 기이한 현상들이 오더라도
그 모두를 담아내어 정화시키는 혼란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꼿꼿하고 일관되게 드러낼 수 있는 기(氣).
무언가를 향한다면
무언가를 갈구한다면
무언가가 간절하다면
우리는 '서슬이 시퍼런' 기를 위해
내면의 '칼'을 가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시와 진실, 2007, 동서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