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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Sep 26. 2022

좀 혼내도 될까?

소중함에 대한 소고

"지금 너희들 또래, 평균수명이 얼마인지 아니?"

뜬금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내 수업은 결코 디테일하지 않다.

마치 욕실수납장에 정리되지 않은 수건같다.

색별로 차곡차곡 정리되지 않아 내키는대로 꺼내쓰지만

그 곳엔 수건뿐이다.

1학기간 학생들에게 줘야 할 건 명확하지만 계산하고 순서를 매기기보다 

그 날 그 날 학생들과의 토론으로 주제를 끄집어낸다. 

학생들의 관심사와 질문, 그리고 사회적 이슈를 테마로 

'기업윤리', '경영역량'을 강의하고 있는 나에게 수업시간은 정말 날것 그대로다.


평균수명이 얼마인지 묻는 질문에 몇몇 학생들이 "80?", "100?"한다.

조용하면서도 단호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좀 혼내도 되겠니?"



큰 이변이 없는 한 지금 태어난 아이들은 142세까지 산단다.

감히 감이 안온다.

얼추 계산으로도 지금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100세 가까이 살 것 같다는 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조금 혼내도 되겠니?'라는 내 말에 '화'가 없어서인지

학생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학생들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너희들 평균수명이 얼마인지 아니?'라고 물은

내 질문의 의도를 좀 더 강하게 각인시키고 싶은 욕구때문에 내지른 말이었기 때문이다.


"00야, 혹시 정말 소중한 게 있니? 아무도 모르게, 그냥 그 어떤 것과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그런거"

"일기장이요"

"반지요"

하나씩 다들 있나보다.


그렇지.

남들에겐 아무 것도 아니겠지만 나에게만 있는, 세상에 유일한 거.

그래서 너무너무 소중한 거, 귀한 거... 

그런 거...


이 질문을 하기 직전 

나는 지식(knowledge) - 인지(intelligernce) - 지혜(wisdom)의 단계를 설명하면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만드는 변수가 'universal truth'라는 설명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universal(범우주적인)한 관점에서 한 번 바라볼까?

그 시선에서 정말 소중한, 세상에 유일하기에 정말로 귀한 것은 뭘까?'


똑똑한 몇은 바로 나의 질문의 의도를 알아챘고

한글자한글자 꾹꾹 혀를 눌러 내뱉은 말의 단호한 에너지가 전해졌는지

마스크로 반쯤 가려진 얼굴이지만 벌개진 두 눈을 살짝 들킨 친구도 눈에 띄었다.


순간 강의실의 공기는....

알고 있는데 깨닫지 못한

애써 외면했던

잘못한 건 없는데 왠지 명치가 아픈

너무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에 제대로 가격당한

각자 자신에게 미안하여 난처해하는 이 젊은 성찰자들을 위해

한쪽에선 오랜만에 자신 속으로 빠지도록 외부와 차단된 회오리가,

다른 한쪽에선 자신과 자신의 지능이 차단된 상태에서 냉큼 이성을 호출하라는 외부에서 휘몰아치는 회오리가 느닷없이 일었다.


찰나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렸지만

그저 느낌만으로도 40명가량의 학생들은 각자 유체이탈의 능력으로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기자신 속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수행자나 성직자가 아니기에 긴 시간 고행으로 자신을 몰아가기는 어렵겠지만

가볍게 치부될 지 모르는, 이 '찰나보다 조금 더 긴' 시간만으로도 

세상속의 나를 지금껏 간과했던 진짜 나에게 다시 데려다줄 수 있었다. 젊으니까. 


우리 모두는 

인생은 1번뿐인데! 라며 쉽게 술잔을 부딪혔었고

'이 세상에 나는 유일하다'는 당연한 진리도 남자들 군대얘기나 여자들 출산얘기처럼 흔하게 취급했었다.

우리는 진짜 소중한 것에 대접이 인색했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그냥 '나'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에 대해

'인간이 다 그렇지 뭐'라며 인간이라는 덩어리 속에 나도 퉁치고 묻어가면 그만이었다.


세상에 유일한 단 1명이면서

단 1번뿐인 인생인데

이 '1'이라는 숫자는 

경쟁하며 차지하려는 '1'보다 하찮은 '1'이었다.


소중한 '나'는, 

세상 유일한 '나'는

분명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존재할 것이고

더 큰 이유로 인해서 이런 환경에 놓였을테고

우주가 바라는 바를 내가 아직 이뤄내지 못해 그 많은 사건사고들 속에서도 우주는 나를 여태 살려놨을테다.


얼마전까지 코로나로 지속적으로 사망자가 증가했었고

지구 한쪽에선 전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말도 안되는 사건사고들로 뉴스는 심심할 새가 없는데


지금까지 멀쩡한 육체와 정신으로 살고 있는 이 사실에

감사한 줄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오만한 '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서 있게 하는 데는 

분명한 어떤 메세지가 있지 않을까?


무언가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 한다면, 

아니, 드러나야만 한다면

'내'가 드러내야만 한다면

'나'를 통해서여야 드러날 것이라면

그것이 창조될 때까지 '나'는 분명 메신저여야 하기에 세상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학생들 대다수는 취직을 걱정한다.

그러면서도 게임에 수시간을 빼앗기고

부모탓, 경제탓, 환경탓, 학교탓, 탓탓탓하느라 또 수시간을 잃어버리고

자신으로 시선이 향하기보다 남들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 온통 타인을 정찰하는데에 시간을 내다 던진다.


일기장도, 반지도 너무 소중해서 먼지가 쌓일까, 누가 훔쳐볼까, 닳을까, 없어지면 어쩌나 애닳는데

우주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 소중한 '나'의 단 1번뿐인 인생에서

나는 얼마나 나의 행동거지들을 함부로 취급해왔는지 

나와 우주만은 알고 있다.


착하게 살 필요없다.

그저 쓰임있게 살면 된다.

애쓰며 열심히 살 필요없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때에 맞춰 하면 된다.

긍정적이고 능동적일 필요없다.

그저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자기몫을 하면 된다.

열정적이며 투지에 불타오를 필요도 없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그 자리를 지켜내면 된다.

용기도 의지도 필요없다.

그저 세상이 원하는 사람의 길을 묵묵히 걸으면 된다.

비결과 노하우를 원할 필요없다.

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기에 내가 유일한 비결이고 노하우다.

뭘 해야 할 지 망설일 필요없다.

'나'를 통해 세상으로 흘러갈 그 정체는 자력(自力)으로 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정체를 '사명'이라고 부른다.


하다 못해 작은 집을 하나 지을 때도 조감도라는 것으로 기일을 정하고 시작하는데

어찌 소중하면서도 유일한 '나'의 인생설계에 조감도가 없을 수 있나.

조감도가 머리 속에 그려져야 설계가 될텐데 말이다.

공사기간, 공사대금, 공사주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디테일한 설계도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그림은 그리고 걸어야 하지 않을까.


절대 다시 갈 수 없는 단 1번의 여행에,

우리는 여행지도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스케쥴짜는 데 골몰해할까?

두 번 다시 갈 수 없는 여행지라면 어떤 한 순간에도 매정해지거나 외면하거나 방관하면서 시간을 

소홀하게 보내진 않을 것이다.


우리 인생은 몇박며칠에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서 감이 안온다고 위안해도 괜찮다.

어느 누구도 아닌, 인생의 주인인 자신이 그 위안에 납득된다면 말이다.


강의대상이 청년일 때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자기가 무엇을 원하며 어디로 가야할 지 방향을 정하는데에

자신의 꿈을 찾고 그 꿈을 위해 어떤 시기에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대해

20대를 통털어서라도 꼭 알아내길 바란다는 말이다.


진로야 바뀔 수 있겠지만 이 진로 역시 삶의 방향내에서 그려지는 곡선이어야 한다.

나를 알지 못하고서는 제 아무리 충실히 진로학습을 받고 진로교육전문가의 훈수를 들어도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좀 혼내도 될까?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것에는

아마 이러한 간절함이 있었다 하겠다.


뻔한 말이겠지만

진정 자신을 소중하게, 

자신의 단 1번뿐인 인생에

단 1번 가는 그 길에서 

자신이 남기고 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 모든 것을 멈추고 내면과 대화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설사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떠난다 하더라도 하등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겠다.

나를 통해 세상에 나오도록 부여받은 그 정체

내 육체가 떠나더라도 스스로 세상에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린 그라본'이 말한대로 '우주가 약속한 것'이다.


무엇을 남기든 남는다.

내가 남기든 스스로 남든 남는다.

스스로가 숙고에 투자한 시간과 간절함만큼 남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것도 남지 않더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구나'라는 진리가 남긴다.


남은 그것이 세상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출동한다.

어떤 조화를 위해 무엇을 남길지는 내가 무엇을 숙고하는지에 달렸다.


내 일기장을, 소중한 내 반지를 누구에게 준다면

이는 단지 일기장이며 반지라는 물질의 가치를 너머 초월된 아름다움을 상대에게 주는 것이다.

만약 지금 나의 삶을 그대로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 줄 것이며, 그는 무엇때문에 원하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의 대답에 자기 스스로를 설득해볼 필요가 있겠다.


내 삶을 누군가가 탐낸다면

나의 초월된 아름다움을 닮고 싶다면. 

이 역시 세상에 해야할 몫은 다 한 셈이다.


사명을 품고 산다는 것

비장함이나 특별함이 아니라 오히려 평온함이며 단순함이다.

안간힘을 뺀,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기에 나만 잘 알면 된다.

사명을 지니고 사는 것이 고통이라면 

사명없이 살아지는대로 사는 것은 지옥일 것이다.


사명을 품고 산다는 것

내가,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이 대자연이 

꼭 쓰임이 되는 사람으로 나를 돕는 것에 대한 보은이며

이러한 삶의 길은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의 그 어떤 빛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머무른다는 것은 하나의 분명한 사건이다.

이 하나의 분명한 사건은 단 1번만 존재하면서

단 1명인 나를 주인공으로 전개되는 것이니

이 모든 우주의 에너지 역시 '나'의 생명력을 위해 존재한다는 우주의 대법(大法)에 따라 

항상 내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내야 하는지 나의 사명에 따라야만 할 것이다.


50이 넘은 나는 뒤늦게 

사명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살아보기로 했다.

언제 내게 자리했는지 모를 두 글자의 정체에

내 혼(魂)을 담으려는 시도는 결코 머리나 일상의 습관에서 해결할 수 없어 

많은 시간 애닳아 하지만

힘을 버리니 

내게로 오는 수많은 느낌-메세지-들이 감지되는 듯 하다.


힘을 버리니 말이다.


내가 주입하는 힘을 빼니

나를 이끄는 그 힘을 따르게 되더라. 

묵묵히.. 천천히.. 고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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