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담 Sep 28. 2022

질서=깨지기 일보직전

갈등과 불안에 대한 소고

나에게는 정말 고치고 싶은, 그런데 의지대로 되지 않는 고질병이 하나 있다.

새벽에 잠에서 깰 때, 그러니까 하루의 시작이 '불안감'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나는 정체모를 이 녀석때문에 곧장 테라스로 직행,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별을 보며 꼭 한마디 한다.

"오늘도 잘 부탁해!" 

인간이라는 개체는 누구나 사유(思惟)한다.

사유는 지적활동, 즉, 생각의 결과라기보다 과정의 연속이며

그 시작은 나의 기존지식과 새롭게 진입하는 지식이 만나는 순간부터다.

 

지식이 나에게 주입되는 순간, 

기존지식과 새지식은 서로 섞이기 위한 진통을 

나의 통제밖에서 해버린다.

'섞이는 것'은 파괴와 해체, 융합을 동반하기에

기존지식은 금가고 깨지고 파괴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지식의 질서를 재구성하게 되고 재형성해서 더 진화된 지적활동으로

사유의 흐름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09


이러한 사유의 과정은 모든 생명체들의 본능적인 활동이다.

생명현상은 유기체의 총체로서만 의미를 가지기에 

단면적인 관점, 즉, 점과 선, 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현상의 하나인 사유는 총체적인, 즉, 전체적인 관점 모두를 두루 포용해야 하는 부피를 요구받을 수밖에 없다.


단순하게 살고자 제 아무리 지구 한구석에서 혼자 콕 쳐박혀 점처럼 산다 해도

개체는 환경의 영향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 없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자연이라는 환경은 나의 기존 관념에 좋든 싫든 침입하게 되어 있다.

데이빗소로우는 속세를 떠나 호숫가 외딴집에서 2년이나 홀로 독식하면서 그 유명한 '월든'을 탄생시켰다. '월든'을 쓰려고 고립한 것이 아니라 고립되어서 '월든'이 탄생된 것이다.

자연은 결코 나를 가만두지 않고 내 지적활동에 자극을 준다. 


인간이라는 개체를 이해하기 위해 정연보교수의 '초유기체인간'을 너무나 재미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김우창교수의 책에서는 스튜어트 A.카우프만의 글을 인용했다.

'체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를 통해서 질서를 만들어간다.'

인간도 체계를 이해하면 단순해진다.


보다 넓은 공간에서의 관점으로, 즉, 더 깊은 사유와 더 넓게 확장된 시야(우리는 근사하게 '장기적 안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좀 진부한 언어인 듯..)를 원한다면 체계(system)적인 관점없이는 어렵다.

 

자기조직화. 

내가 나를 어떻게 시스템화하느냐에 의해 나의 시야는 넓어지고 

통찰은 더 본질에 근접할 수 있다.


자기조직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은)

기존에 지니고 있는 지적구성요소의 질서에 새로운 변이를 수용하여 재구성한다는 의미가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질서는 결코 평형이 유지되는 상태이거나 짜여진채로 고정되어 머무르는 폐쇄적인 것이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오히려 질서는 또 다른 질서를 위한 깨지기 일보직전을 암시한다.


한마디로, 

지금의 나는 내가 알든 모르든, 상관하든 말든 

환경의 영향으로 새로운 지식의 침입을 거부할 수 없으며

이 불가항력적인 이유로 나의 사고는 진화되고 사유는 깊어지는 단순한 매커니즘이 나의 지적활동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기존사고가 깨지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불가항력이어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기에

기존에 지니고 있던 사고를 점검하게 되고

이 점검활동이 반성적 사고다. (성찰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성찰이라는 표현은 더 깊이있는 내적점검까지를 포함하는 단어이기에 그저 반성이라는 표현이 적합하겠다.)


반성은 기존의 것을 포기하는 나름의 절단을 의미하며

이 절단하는 과정에 갈등은 당연히 수반된다.

갈등은 또 심리적인 불안을 야기 내지 전제하기에 

결국, 사유의 깊이와 폭을 확장하기 위한다면

갈등과 불안을 패키지로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대개 '질서'라고 하면 '각잡힌 패턴'을 떠올리겠지만

앞서 말했듯 질서란 즉, 평형이 깨지기 일보직전, 개방되기 일보직전의 순간일 뿐, 

곧 새로운 지식의 거부할 수 없는 수용으로 금새 다시 재정렬되는 과정으로 진입한다.

그래서 '각잡힌' 패턴화된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찰나정도이지 않을까?

음...

어쩌면, 질서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깨지기 일보직전보다 더 찰나에만, 그 찰나보다 더 짧은 찰나.

시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질서가 아닐까.

질서가 이런 속성이 있다면 질서에 동반되는 갈등과 불안도 결국, 연속되고 영속된다고 할 수 있다.


왜?

우리는 모두 체계안에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체계란 환경 모두를 포함하는 관점이며

환경은 직.간접적으로 나, 조직, 더 나아가 사회, 국가, 글로벌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나의 정신의 질서를 재구성하겠다는 것은 

내가 나의 사유의 깊이를 더 파보겠다는 것은

내가 나의 시야를 더 넓게 확장하겠다는 것은

혼돈을 의도적으로 야기하겠다는 의지이며

혼돈에 따라다니는 갈등과 불안 역시 수용해야 한다는 불가항력적인 수동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적활동을 위해 일부러 야기시킨 혼돈에서 오는 갈등이라도

단지 지적활동에만 존재하지 않고 실재(實在)적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 있다.

여기서 불안이라는 감각이 가장 먼저 드러나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불안을 극복'하락 말하곤 한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을 극복할 수는 없다.

그저 당연히 받아들인 채 안고 가야 한다. 

버릴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감각에 치중하지 말고(불안을 없애거나 극복하려는 감각)

이성에 치중하는 것이다.

지금 나에게로 온 불안의 줄을 잡고 출발선까지 거꾸로 가보면 분명 거기에는

기존지각과 새로운 지각의 충돌이 있었던 지점이 나타날 것이다.

그 지점에서 기존지각이 얼마나 깨지고 있는지 

제대로 깨지도록 나의 반성적 사고는 잘 운용되는지

새로운 지각은 충분히 그 틈새에 잘 앉혀지고 있는지를 점검, 나아가 검열해보는 것이다.


불안은

이성이 출두할 때 자연스레 사라진다.

불안과 쌍으로 붙어다니는 갈등 역시 여기서 해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단, 앞서 언급했듯 이 해소는 찰나보다 짧은 찰나일 뿐

갈등과 불안은 연속될 수밖에 없다.

이 둘은 결코 내게서 떼어낼 수 없다는 기가막힌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왜?

새롭게 재형성된 그 지각 역시 또 새로운 지식의 침입 내지 난입 내지 자연스런 진입의 타격을 받을테니까.

이는 또 다시 나의 지성과 실재적 삶에 갈등과 불안을 불러올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불안과 갈등에도 질적 성장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불안의 이유와 지금의 불안의 이유는 질적으로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고

이는 내 삶이 야기한 갈등, 더 디테일하게 문제를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능숙한 삶의 기술이

지식의 재형성과정을 통해 질적으로 승화되었기 때문이다.

갈등과 불안에도 급이 있다.


이성과 감각

지성과 감정

지각과 실재적 삶

이 양극의 연합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절단과 교체, 수정, 전이의 연속을 인정하며

모든 과정에서 자연발생하는 갈등과 그에 따라붙는 불안을 떨쳐버리려 복잡하게 이성따로, 감정따로 

에너지를 쏟지 말고

이 모든 연속성의 원리에 따라 이성너머의 이성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이것이 삶이다.


좀 엉뚱한 얘기같겠지만

앞서 말한 이성과 실재적 삶의 길에서 

감정에 의해 감각이 느끼는 불안에 초점을 맞추면 불안이라는 녀석은 관심을 받으려고 더욱 힘을 낸다.

항상 에너지를 쏟는 곳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나는 법이다.


불안에 초점을 맞추는 에너지를 지성, 이성으로 옮겨야 한다. 

'먹이를 주는 놈'의 선택으로 '먹이를 먹는 놈'의 힘이 세진다.

어느 곳으로 먹이를 줄지는 내 선택이다.


관심두지 않는 녀석은 스스로 도태되거나 스믈스믈 소멸되기에

나의 이성이 새로운 지성의 진입->파괴, 해체, 절단 -> 융합 -> 재구성 -> 재형성 -> 더 큰 시야와 더 깊은 사유로의 진화를 돕도록 이성에 먹이를 줘야할 것이다. 


대다수의 문제, 즉, 우리의 실재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근원은 

그 문제와 연관된 지적질서의 한계다.

이렇게 알고 살았는데 어떤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는다면 기존지식으로는 안된다, 새로운 지식이 필요하다는 신호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갈등이 불안으로 가는 관성을 나의 이성으로 옮기는 큰 힘이 필요하다.

기존지식이 해체되는 순간 야기되는 불안의 강도는 제각각이겠지만

문제보다 내가 더 커질 수밖에 없게 하는 지적활동의 활발한 운용덕에 

소소한 갈등은 더 이상 갈등이 아니게 되며 

따라서,

'더 큰 시야를 위한 지적질서의 파괴'는 '단순한' 실재를 위해 지적활동이 운용되는 체계인 것이다.


다양한 지식의 파편들이 서로의 짝을 찾아가는

연합들을 어떤 코드로 서로 묶어내는 작업을 개념화라고 한다면

사유의 진화는 더 큰 범주의 개념화를 위한 연속적인 지적활동결과의 영속을 위한 것이다.

이 개념화가 제대로 이뤄져야만

코드를 분석하여 개체를 날 것 그대로 볼 수 있는 인지 역시 탁월해진다.

이 탁월한 인지가 동반된다면

구석구석 나의 삶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수많은, 그리고 다채로운 갈등 역시

제대로 분석, 비판할 능력이 배양되고

기존지식을 깨기 위한 반성은 내가 다음에 서야할 자리로 나를 안내해주는 믿을 수 있는 습관이 될 것이다.


'체계화된 독서'를 통해 나의 지적활동의 모든 과정을 나에게 체화시켜 왔기에

새벽에 불안으로 눈을 뜨지만 감각에 나를 맡기지 않는다.

그저 오지 않은 하루,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당연한 감정으로서

이 불안감의 정체는 금새 들통나버리기도 하지만

불안은 새로운 정신의 질서로 가려는 신호임을 알기에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오그만디노(Og Mandino)'의 아카바의 별에게 

나의 새로운 하루를 부탁하고 나면 

새벽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느라 지친 나의 감각은 

곧 이성이 이끄는대로 잘 따르는 충실한 종이 된다. 


혹여나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떤 날이 온다면

나는 바보가 되어가는 나를 막을 수 있는 또 다른 지적투입을 해야만 할 것이다.

새로운 질서가 투입되지 않은 채

기존 질서가 고착되고 있다는 증거이니 말이다.

불안이 보내는 신호 덕에 나는 나름 똑똑한 할머니로 나이들어갈 것 같가는 기대도 해볼 수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좀 혼내도 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