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가 또 퍼붓는다.
바람소리, 빗소리가 새벽을 삼켰다.
그런데 내 안의 소리는 여전히 크다.
바람과 비가 내 안의 소리도 들리지 않게 해 주었으면 싶다가도
이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간절하게 외치는 자아의 소리도 듣지 못할 듯하여
자아의 소리 앞에서 자꾸만 훼방놓는 인식의 소리를 그대로 오늘도 견뎌내야할 것 같다.
내 안의 소리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그 소리가 무엇인지 갸냘프게라도 들리기까지 긴 세월...
외부의 차단은 내부의 소통을 열어 주었지만
그 내부의 소리라는 게 외부에서 지금껏 내게 주입시켰던 관념과 한계에 갇힌 소리들뿐이어서
그 이물감이 날 더 견디기 어렵게 한다.
수년이 걸려 내 안의 소리에 귀기울여봤지만
내 소리가 아닌, 그저 세상에 잘 발맞춰진 행렬의 소리였고
그렇게 번번히 나는 내가 없이 멀쩡한 거죽만 유지하며 지냈다.
어쩌면 아직도 그 이물감에 치를 떠는지도..
내면의 소리를 들으라는데 도대체 어떤 귀여야 그 소리에 민감할 수 있는 것인지...
외딴 곳에 가서 자신을 머물게 하면 내면이 보이고 들린다는데
왜 딴곳에 자꾸만 나를 머물게 하여 내면을 가리고 듣지 못하는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 나를 자꾸만 보고 들으려 하는지
자발적 고립으로 외딴 곳에 날 머물게 한 줄 알았는데
이 놈의 정신없는 정신은 외딴 곳이 아니라 딴 곳에 자꾸만 날 세워둔다.
그래도 정신못차리는 정신에게 이놈하고 야단치는 또 다른 의식은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채근한다.
간절하기 때문이다.
간절은 지독하게 원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지금이 지독하게 싫다는 의미가 전제된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싫음'을 없앨 수는 있는가?
소나기 소리가 더 커졌다.
내면의 소리도 덩달아 커지지만
그 이면에 감춰진 나의 본능의 소리는 여전히 어물거린다....
원하던 간절한 내가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
나는 해냈다고, 증명해냈다고,
그렇게 나를 찾아 그 길을 걸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 말해야 하겠지? 말하려 하는 것이지?
그렇게 난
여전히.. 기꺼이..
지금과 같이 행동하겠지...
기꺼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