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하여
바람이 무섭게 몰아친다.
번개도 무섭게 번쩍이고
천둥도 화난듯 소리친다.
지금 저녁 11시, 그 소리에 나는 무서워 잠이 달아나버렸다.
내가 뭐라도 잘못해서 신이 노한 것인지
내가 무언가 알지못해 신이 답답한 것인지
내가 알아야 할것들을 신이 알려주려는 것인지
하늘이 땅을 가르려는 것인가
번개를 내리꽂고 천둥으로 고함치고 소나기로 채찍을 휘두른다.
나무들은 뿌리를 지켜내려 온 몸을 다해 이리 휘청 저리 휘청 바람을 상대하고
저항할 힘조차 없는 벌레들은 어딘가 은신처에서 몸을 구부리는 안타까움에도 아랑곳없이
대지에 노한 것인지
지금 자신의 위엄과 위력을 제대로 보여줘야만 할 이유가 있는 것인지...
테라스에 나가고 싶었으나 발 한짝 떼지 못하는 인간벌레인 나 역시
은신처안에서 그저 노한 하늘을, 번쩍이는 섬광들을, 무서운 소리들을 그냥 맥놓고 바라만 보았다.
한참을...
그러다가...
루크레티우스(주1)가 천둥벼락이 무섭지 않냐고 마구 소리쳤던 그의 글들에 내 잘못을 떠올리려 한참을 헤매다가 소로우(주2)가 영국산 건초가 되려 하지말고 물풀이면 물풀답게, 고사리면 고사리답게 본성대로 살라고, 천둥이 내리치려면 내리치게 내버려두라고, 오히려 천둥번개치는 날 대지를 즐기라던 글귀가 떠올라 신나게 글을 쓰려 책상앞에 앉았다.
....
내가
이 대자연의 위대한 소동 속에서...
그저 자연의 일부로 너무나 고요하고 조용하게 글을 쓰고 있는 내게 놀라고야 말았다.
전쟁이 나고 누군가는 땅으로 묻혔고 또 누군가는 먼나라로 떠나고
또 누군가는 노느라 즐기느라 재잘대는,
바람잘 날 없는 지구가 오늘은 우주에 놀라 비명을 질러대는 이 소동 중에서
내가
이리도 고요히 침묵을 지킬 수 있다는 것에...
이리도 찬찬히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에...
이리도 태평하게 앉아있을 수 있다는 것에 천둥번개보다 더 놀라고야 말았다.
내가 이리도 변했다는 것이
내겐 천둥번개보다 더 비명지를 일인 것이다.
천재시인들처럼, 고서 속 성현들처럼 대자연을 노래하며 그 속의 인간을 통찰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재주는 없지만 하늘과 땅사이를 번개와 천둥과 비바람이 마치 대지를 갈라놓을 듯 자기 힘을 과시하는 이 시간, 나는 이 작은 방안에서 이 모두를 차단한 채 고요히... 정갈하게... 책상앞에서 노닌다. '아우렐리우스는 어떻게 13년간 전쟁중에 이렇게 깊은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늘 의문이었던 나의 질문에 아주 조금이지만.. 감히.. 하늘과 땅이 전쟁을 치르는 이 시간의 나처럼 인간의 전쟁 중에서 그도 침묵의 시간을 짧게라도 깊게....가졌겠구나....그렇게 그에게서 인간본성을 꿰뚫는 글이 탄생했겠구나....싶다. 그는 그 때 그렇게, 나는 이 때 이렇게... 침묵의 글을 썼겠구나.... 이 기묘한 동질감까지....
자신의 위엄과 위력을 제대로 드러내는 하늘과 땅 사이
고요와 고독을 친구삼아 미약하지만 이제서야 나는...
하나의 우주로서
더 무겁고 당당하고 반듯한 기운품고
내게 들어오는 소리를 거둬내고
날 떨게 하는 번쩍임을 물리치며
침묵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됐다.
번개가 나를 내리쳐 파멸시킬 수 있는, 그같은 높이, 번개를 맞기에 충분한 높이까지(주3) 나도 나를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늘과 땅의 이치가 포착되고 폭풍과 눈부신 번개들이 노래되어(주4) 이들이 무엇을 하는지, 대체 왜 이러는지, 내가 정신놓고 두려울 것이 아니라 내게 많은 것이 이뤄졌더라도 그럼에도 아직 많은 것이 남아있음을, 남겨야 함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그리 해야 하고
그리 하고 있는 것이다...
호라티우스
신들은 잘 찾지도 모시지도 않는 어리석은 지혜에 참여했던 건 나의 잘못이었습니다.
이제 돛에 바람을 싣고 버려두었던 길을 다시 찾아갑니다.
유피테르께서는 자주 구름에 가린 하늘을 번개로 나누고,
고함치는 말들과 날개마차를 개인 하늘로 몰고 갑니다.
육중한 대지와 그 위를 흐르는 강,
스튁스강과 무서운 타에나리스, 아틀라스의 강역도 그 소리에 진동합니다.
위아래가 뒤바뀌고 빛이 어둑해지고, 어둠이 환해진 건 신의 조화입니다.
섬뜩한 괴성으로 모든 걸 앗아가는 운명은, 내주었던 왕관을 가져가길 즐깁니다. (주5)
주1>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아가넷
주2> 헨리데이빗소로우, 월든, 열림원
주3>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주4> 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철학, 동서문화사
주5> 호라티우스, 카르페 디엠,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