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앞에서 내가 취한 한가지 관점
나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힘겨움과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어떻게든 내 인생에 진입된 모든 사태는
다 이유가 있어서 내게 왔다는
수동적인 관점이 내 삶을 이끌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왜 내게 이런 일이 생겼지? 하필이면 지금? 왜 하필 나야?'라는 생각 대신,
'세상이(자연이) 또 나를 상대로 무슨 일을 꾸미시네.'
그저 궁금함만 남겼다.
나의 이런 '수동적 관점'은
‘선택하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나는 선택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라는
내가 삶을 대하는 총체적인 관점으로 진화되어 체화되었다.
가만히 지난 50여 년을 돌아본다.
태어나는 것부터 지금까지,
내가 선택한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일들이 많았다.
나는 늘 선택해 왔다고 믿었지만,
그 선택들 대부분이 내 계획과 상관없이 진행되었다.
나는 무엇이 되려 했는데 다른 무엇이 되어 있고
나는 어느 누구와 이것을 하려 했으나 다른 누구와 저것을 하고 있고
나는 이 시기에 그 자리에 있으려 했으나 이 시기에 이 자리에 있다.
이 모든 결과 앞에서 나는
나의 계획이나 판단이 아닌,
커다란 어떤 움직임이 나를 이동시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도 나는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존재'의 관점을 지니려 한다.
늘 나를 통해 무언가를 시도한다.
자신들의 일에 나를 거쳐 가게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사람으로 나를 빚으려는 것 같기도 하며
혹은 내게 일어날 사태를
미리 언질로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려 다리가 삐더라도,
잘 지내던 사람과 순간의 갈등으로 소원해지더라도,
이리 될 줄 알고 밀어붙였던 일이 저리 방향을 틀더라도,
약속이 취소되거나 기약없이 미뤄지더라도,
이 모든 것은 자연이 '상황'으로 건네는 하나의 언질이자
나의 인생을 당신들의 뜻에 맞게 정리하기 위함이라 여겨
나는 순순히, 거부감없이 순응한다.
‘어떤 의도가 있으시겠지.’ 하면서.
이는 내가 운명론자라서가 아니다.
만일 내가 운명론자였다면
지금 나는 아무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노력이 없으니 기대도, 희망도 품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미 다 정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세네카의 표현으로 나를 대변하자면,
나는 나를 '운명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주1)'으로 규정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내게 본유된 나 자체로
세상이 날 데려가는 길에 잘 어울리는 사람으로 따르는,
그래서,
신이 행운을 준다면 '참 잘 따르는 나'에게 주길 바라며
이런 이유로,
운명조차 나를 어쩌지 못하는,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려 한다.
어느 가을, 바다에서 '아, 내가 바다를 보러온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데려왔구나. 나를 굳이 바다에 맨발로 서게 하며 이 느낌을 알게 하려고, 이 문제를 풀어 주시려고 나를 파도 앞에 세웠구나'했었고 지난 가을, 느닷없이 시골로 들어온 이후 '결코 내 의지로 감행할 수 없었던 우연'을 여럿 체험했었다.
그저 수혜자로서 감사를 느꼈던 몇몇 놀라웠던 순간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내 이성이 재주를 부렸다면
바다에 갈 수 없는 상황이었고
문제도 그리 쉽게 풀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리 아무 계획없이 시골에 날 던져 넣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석처럼 이끌렸을 뿐인데
나는 엄청난 수혜를 지금껏 받고 있다.
모든 자연은 원자로부터 근원되어지는 것이지만
유일하게 우연으로 불리는 일탈도 존재한다(주2).는 루크레티우스의 '우연이라는 일탈',
결국, 활동 및 신성한 실재의 존재에 관련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우리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드는 쪽으로 가야 한다(주3).는 올더스헉슬리의 영적인 울림,
'제비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이라는 햄릿의 대사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전해지면서 톨스토이(주4)가 내게 십수년 전부터 알려준 '영혼이 이끄는 길'이 어떤 길인지
나는 살짝 감지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비로소 난 '선택되어지는 존재'에 깊은 공감의 눈물을 흘렸었다.
'내가 내 것이라고 부르는 의지보다도 한층 높은 원인이 존재하는 것을 순간순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나는 자기가 수혜자이지, 그 본래의 유수의 원인이 아니라 다만 놀라서 바라보는 방관자임을 알게 된다. 나는 다만 갈망하고 쳐다보고, 수동의 자세에 몸을 놓을 뿐이고, 눈에 보이는 이 광경이 나 이외의 어떤 아득한 원동력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게 된다(주5).'
그저 나는
바람에도 울리는 악기처럼
세상과 자연의 움직임에 진동하는
하나의 악기여야지...
세상이 흐르는 길에 내가 선택되도록 수동적인 관점으로
나의 처지를 인지하고 연마하는 능동적인 자세로 살아가야지.
그러다 보니 나의 유일한 판단은
'잘 따르자.', '무조건 따르자' 뿐이다.
하지만, 나는
더디고 미진하고 품도 얕다.
게으르거나 꾀를 부리지는 않으니
능력의 부족마저도
선택한 자의 의지와 의도가 담긴 결과라면
그저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내가 만나는 사람, 사물, 대상 모두는
나의 선택이 아니라
나를 선택해 준,
인연이 닿은 존재들이다.
그러니,
잘할 수밖에.
고마워할 수밖에.
겸손해질 수밖에.
'나는 선택되어졌다'는 관점은
말 그대로
'선정된 개인(주6)'으로서의 나를 살게 한다.
날 이끄는 소리에 바로 반응하려면
나는 가슴에서 내지르는 소리를 더 크게 들을 줄 알아야겠다.
이를 위한 영양제도, 촉진제는 없으니
다른 감각들의 기능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감각에도 총량이 있을테니 가슴의 울림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들은 덜어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활동량을 줄이고 되도록 혼자 보내는 시간을 늘이고 영적진화를 돕는 새벽독서에 집중한다.
세상의 요구에 움직여지는 삶.
나는 내가 숙련되길 바란다.
숙련공은 더 숙련을 요구하는 현장으로 보내질테니...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장엄한 질서를 위해 나를 움직이는'.
나는 이제 이 느낌을 안다.
오로지 겸양과 복종에서 착한 삶이 나오는 법이다. 자기의무에 관한 지식은 각자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된다. 이것은 자기 생각으로 선택할 일이 아니고 각자에게 명령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에피쿠로스의 말처럼 우리의 이성과 의견이 어리석고 무한히 잡다하기 때문에, 마지막엔 우리가 우리를 잡아먹게 하는 의무들도 꾸며 내게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신 최초의 법률은 순수한 복종의 법률이었다 복종함은 하늘에 계신 한 어른이며 은인인 분을 알아보는, 사리를 아는 심령의 주요한 직무인 만큼, 이 법은 사람이 알아보고 토론해 볼 거리가 없는 적나라하고 단순한 명령이었다. 오만에서 모든 죄악이 나오듯 복종함과 양보함에서 다른 모든 도덕이 나온다(주7).
주1> 세네카인생철학이야기, 세네카
주2>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루크레티우스
주3> 영원의 철학, 올더스헉슬리
주4> 톨스토이고백록, 톨스토이
주5> 에머슨수상록, 랄프왈도에머슨
주6> 선정된 개인 : 에머슨은 그의 수상록에서 '천재의 성장은 일종 전체적 성질의 것이다.'라며 하늘이 선정한 개인으로 살라 했다.
주7> 몽테뉴, 나는 무엇을 아는가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1766
공연문의 : 건율원 (010-9056-9736)
공연참여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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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담연재]
월 5:00a.m. [짧은 깊이]
화 5:00a.m. [엄마의 유산]
수 5:00a.m. [필사 - 사유의 손끝에 철학을 품다]
목 5:00a.m. [영혼의 노래]
금 5:00a.m. [나는 시골이 좋습니다.]
토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일 5:00a.m. [조용한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