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견디지 않는다. 그저 자란다.

나는 나무다

by 지담

나는 나무다.


무한한 우주의 품에서

뜨거운 태양의 양기받으며

차가운 대지의 음기올려서


아래로는 뿌리를,

위로는 싹을, 가지를, 열매를,

나 자신을 온전히 음양의 기운에 적합하게

뻗쳐내는 나무.


나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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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가는 한쪽 가지,

너덜대는 이파리들.

두 발달린 녀석들이 내 가지를 마구 꺾어도

여러발달린 녀석들이 내 온몸에 구멍을 내고

네발달린 녀석들이 내 밑의 흙을 다 파헤치며

심지어 온갖 해충까지 들러 붙어 내게 기생해도


나는 어쩌지 못한다.

그대로 받아내고 겪어내야 한다.

견디지도 버티지도 않는다.


태양이 나보다 친구에게 양기를 더 준들 그리 갈 수 없고

벌레들이 나에게만 들러붙은들 털어낼 수 없고

바람이 내 가지만 꺾어버린들 그저 꺾인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견디지도 버티지도 않는다.

그저 겪는다.


아파도, 힘들어도, 귀찮아도, 버거워도

견디지도 버티지도 않는다.

그저 겪는다.

생명에게 생(生)은 항상 대가를 요구하니까.


내 뿌리를 허락하는 대지에게 감사해서

내 열매를 배당해준 하늘에게 갚아야 해서

그저 감사밖에 할 게 없는

나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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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무리 세찬 바람이 날 밀어대도

제 아무리 차가운 눈이 날 얼게 해도

제 아무리 눅눅한 습기가 날 갉아 대도

동(動)할 수 없이 늘 정(停)할 수밖에,

그렇게

묵묵히 내 자리 지켜내는 것이

오로지 내 할 일의 전부인

나는 나무다.


뿌리와 잎, 가지와 열매

매순간 내리고 뻗치고 올리고 맺는,

그렇게 한평생 돌고 도는 순환.


그 끝에

드디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내 몸을 떠나 동(動)할 수 있는

나는 나무다.


어디에 쓰여질지 나는 모른다.

숙련된 목공의 손에서 여인네의 식탁이 될지

세련된 건축가에게서 누군가 살아갈 바닥이 될지

용맹한 선원의 고기잡이 배가 될지

순수한 아가들과 놀아 줄 장난감이 될지

아니면,

시골에 쳐박혀 땔감찾는 한 녀석의 소중한 온기로 태워질 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자체로 자기 자리에서 썩어 땅의 양분으로 쌓일지...


사는 동안 내가 날 제대로 잘 키워내면

귀한 집의 기둥이 되겠지

커다란 배의 근원이 되겠지

키가 크다면 누군가의 하늘담은 눈 속에 내가 있을테고

나이테가 많다면 사람들의 지혜로도 담길테고

아무 것도 아니라도

딱 자기만큼 땅의 양분으로 남겨지는,

나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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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무다.

넓은 치마폭으로 언제나 날 감싸준 숲의 전령 덕에

나는 오늘도 자라고 있으니

내 자리를 지켜내어

나의 영혼 맑게,

나의 정신 곧게,

나의 마음 깊게.

무한정 받은 보상, 보은을 위해

그저 내 할당된 몫만큼 자라면 되겠지.


그러니

나는 알아야겠다.

내 뿌리는 대지 속 죽은 생명의 양분으로 뻗어진다는 사실을,

내 높이 솟는 가지는 하늘이 내게 내린 점지라는 사실을,

내 지칠 줄 모르는 줄기는 하늘과 땅사이 어디든 흐르는 물의 뜻이라는 사실을.


내 발끝은 죽음을 담고

내 머리끝은 생을 향하고

내 심장은 흐름에 진동하도록


세상의 난잡한 소음, 바람이 잎과 빚는 소리에 묻혀지길

세상의 고약한 내음, 하늘코에 닿은 비가 쓸어주길

세상의 혼탁한 잡음, 풀과 꽃, 내와 숲에 정화되길


나는 오로지 나를 키우는 것말고는

모든 것을 자연에게 의탁해야 하는

나는 나무다.


주변으로 흩어진 나의 불안한 시선과 소란한 정신은

숲의 소용돌이가 다잡아주길 바라는 수밖에

홀로 서 있는 나는 그저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온전히 나를 키우는 것에만 나를 내주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알았다.

내 시선은 나를 키워주는 하늘로 향해야 하는 것을,

내 지식은 나의 뿌리로 더 깊고 진하게 양분을 보내야 하는 것을,

내 정신은 나의 소란한 이파리들까지 진정시키게 넓고 강해야 하는 것을,

내 이성은 나의 정체를 더 세밀하게 분절시켜 내가 나무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을,

내 영혼은 나를 위해 세상 더 멀리까지 자유로워야 하는 것을.



나는

더 높게 깊게 넓게 멀게,

그러면서도 세밀하게 오로지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이로써 에머슨이 말한,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가장 나에게 적합한 자리(주)'임을

나는 알아야 한다.


자체가 되려는 짓이

자체가 견뎌내야 할 유일한 몫이다.


나는 나무다.

나무로 태어났으니

나무여야 하고

나무여야 하니

나무답게,

나무로써

나무로 살아야 한다.


자체가 되려는 짓이

자체가 스스로 떠안은 유일한 고통이리라.


자체가 자체가 되는 것

나는 내가 되는 것.

본질이다.

본성이다.

본유된 그것을 창조하는 것.


그렇게..

나.는.나.무.다.

나.는.생.명.이.다.

나.는. 나.다.


주1> 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철학, 동서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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