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아귀에 쥔 철학-
때로는 네 귀가
가슴으로 보내지 못하고 공기중으로 놓쳐버리는 말보다
흔적으로라도 남는 글이 더 편할 때가 있더라.
엄마는 그래서 오늘도
네게 말보다 글을
너에게 전한다.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요즘 너무 힘들어."
엄마는 어쩌다 이런 너의 토로에 따뜻한 말보다는
단순한 표현밖에 못하는 사람이 됐네.
"그럼 안 하면 되지"
"어떻게 안해?"
"그럼 하면 되지"
"엄마 또 그런다!"
아이야,
네 손을 한 번 펴봐.
손에 무엇을 쥐고 있니?
해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손아귀는 단단하단다.
반면, 손을 폈는데
부스러기만 잔뜩 쥔 흐물거리는 손도 있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지켜도 그만 못 지켜도 그만인
부스러기만 잔뜩 쥔 그런 손.
부스러기는 어디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갔는지도 모른 채 사라지지.
부스러기의 잔재를 쥔 손이 오래 되면
손아귀의 힘은 다 빠져서
정작 꽉 쥐어내야만 할 것이 왔을 때 쥘 힘이 없어.
그 때 공허하지.
할 일이 없을 때 미련이란 게 날 잡지.
할 일이 바빴을 때 참 좋았는데..
그 때, 조금 더 해낼 걸... 하면서 말이야.
항상 네 손에 꽉 쥐어진 채
손아귀에 더 힘을 주라고 외치는,
상황, 사람, 관계, 이들이 만들어낸 것이
'일'이란다.
세상은 현상을 만들고
현상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은 행위를 남긴다.
'일'이란,
계속 손아귀에 힘을 줄, '때'를 요구하고야 말지.
그 '때'가
'일'이 자라나는 증상이야.
일이 네게 행위를 요구할 때지.
'행위'를 통해 '일'은 자라.
그리고,
일이 자란다는 것은
그 구성요소들,
사람부터 사물, 비물질적인 모든 것들도 함께 자란다는 전제가 가능하지.
네가 일을 키우는 게 아니라
일이 커지면서 네 행위의 강도와 집중도도 필요하고
그렇게 네가 키워지는 것이고
그래서, 그 '때'에
네가 손아귀에 힘을 풀어버리면
일은 바닥으로,
부스러기처럼 흔적없이 사라져.
언제지?
가슴에 얹은 꽉 쥔 주먹은 '맹세'이고
주머니 속에서 꽉 쥔 주먹은 '저항'이고
엄마처럼 책상위에서 다부지게 쥔 주먹은 '다짐'이나 '각오', '선언'이겠지.
손아귀에 힘을 준다는 것,
무언가를 부수거나 무너뜨리려는 행위가 아니야.
무언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네 안의 어떤 존재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반사야.
손아귀가 아파서 조금 힘을 덜고 싶을 때도 있어.
엄마도 그럴 때 많아.
그래도 더 힘을 내지는 못하지만 그 힘을 유지하는 것만이라도 해보는거야.
잡은 놈 못 빠져 나가게.
유지하려는 의지는 힘을 지속시키고
지속은 유지를 가능케 하고
유지되면 힘을 더 이상 줄 필요가 없어.
그리고 그 때 이 말을 이해할거야.
아이야...
빼앗기지 마라.
힘도, 정신도, 너의 마음도 모두.
빼앗기지 마라.
네가 잡고 있기에 지켜지고야 마는
시간도, 능력도, 물질도 모두.
빼앗기지 마라.
네가 잡고 있기에 지켜지고야 마는 것을 유지시켜 줄
권리도, 책임도, 가치도, 미덕도...
흙을 꽉 움켜쥐면 결국 딱딱한 돌이 되듯
네 손에 잡고 있는 빠져 나가려던 시간과 의지도
결코 손아귀의 힘을 풀지 않는 한,
단단히 구축된 너만의 삶의 '구조'가 된단다.
우리는 이를 '습관'이라 불러도 좋겠구나.
빼앗기지 않으려 손아귀에 힘을 줬지만
더 이상 힘을 주지 않아도 지켜지고 지속되는,
네 일상의 '구조'.
그 때엔 '극복'이란 단어조차 제거된 일상이 된단다.
어쩌면,
거대하고 위대한 창작물의 탄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거야.
거대와 위대를 창작하기 위해
애초에 네 손에 쥐어진 자잘한 흙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 꽉 쥔
그 시간의, 손아귀의 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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