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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Aug 28. 2022

철학에서 '부(富)'의 근원을 찾다 - 랄프왈도에머슨2

인간은 부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인간은 부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이 세상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위대함은 욕망을 없애는 데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황폐한 집에서 살면서 마른 콩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부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에머슨의 주장대로 우리는 부자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왔다. 

황폐한 집에서 마른 콩만 먹는 수준으로는 자신의 욕망을, 

더 나아가 자신의 추구(pursuit)에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인간의 본성은 '욕구'하는 것에 있다. 

'욕구'란 지금 나에게서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인지 인지하는 능력이며 

층계와 계단은 더 높아지고 더 여러 갈래의 굽이들이 날 괴롭히겠지만 

욕구하지 않으면 더 나아갈 수 없기에 

욕구는 인간을 성장시키는 동력이자 

나로서 똑바로 서서 더불어 사는 조화에 당당히 한 몫하려 날 움직이게 하는 영향력의 모티브다. 


욕구해야만 생존너머의 삶을 추구할 수 있다. 

욕구한다는 것은 오늘보다 더 큰 나를 원하는 간절함이며 

욕구한다는 것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으로 나를 진입시키는 견인체이며

욕구한다는 것은 내가 꿈꾸며 '희망'을 품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만 한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안주하는 삶은 '먹고 싸고 번식하는' 동물의 삶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 정도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응당 하고 있는, 해내고 있는 본능인데 말이다.

욕구하기만 하면 발타자르그라시안의 말처럼 '거꾸로 선 채 허공에서 두 발만 휘젓는' 꼴이다.

욕구가 현실로 발현될 때 우리는 진정한 '인간 아무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우리에게 '부'는 '생존에서 존재'까지 모두를 이루게 하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기본의무이자 기본권리다.


이 당연한 의무의 시작은 거듭 말하지만, 현실을 살고 현실문제부터 먼저 돌보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무슨 부야?'라고 되묻고 싶다면 이 말을 명심하길 바란다.

'아니, 먹고 사는 것을 해결하려 노력하는 당신이기에 이미 당신의 부는 시작됐다.

 부의 세계로, 당신 꿈의 세계로 이미 진입한 것이니 지금부터 꿈을 향해 걸으면 된다.' 

더 크게 꿈꾸고 더 크게 누리고 더 크게 나누기 위해 지금을 살되 더 큰 나를 욕구하라'

자연은 인간 모두가 '자활'하길 바라고 있다. 

생존을 해결하는 것는 기본, 

하지만 그 너머에서 울리는 대지의 북소리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거대한 자연이 내게 보내는 시그널

부는 비바람을 막아주는 튼튼한 지붕에서부터 시작된다. 
맑고 시원한 물을 충분히 제공해주는 좋은 펌프, 젖었을 때는 바로 갈아입을 수 있는 두 벌의 옷, 땔감, 심지가 두 개 달린 램프, 하루 세 번의 식사, 육지를 횡단하기 위한 마차와 기차,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 일을 위한 도구, 읽어야 할 책
 - 부는 이런 것들에서 시작된다. (중략) 
그리고 우리는 이 시점에서 자연이 이 북방의 대지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철칙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먼저 자연은 모든 인간이 자활하기를 바라고 있다. 


거대한 자연이 나에게 듣게 하려 마구 울려대는 대지의 파동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심장이 가열차게 떨리면서 나의 명치에서부터 위로위로 스스로를 부풀리며 타올라가고

나도 모르게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두 눈은 지그시 감은 채 

머리 속의 빨갛고 가는 혈관들이 마치 새롭게 등장한 손님에게 자리를 내주느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 분주함이 온 세포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난생 처음 겪는 '이게 나야?'라고 웃으며 자신을 용기있게 바라보는,   

마치 지복(至福)으로 가는 이 느낌.


이 가열차면서도 진지하고, 보이지 않는데 뭔가 본 듯한,

감히 혀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두 눈이 보여주는 그 희미한 실루엣의 환영. 

바로 그 느낌, 그 느낌과 함께 전해지는 희열, 

그리고 그 희열에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쥐며 두 입술을 질끈 깨물게 하는, 

이것이 자연이 내게 주는 시그널이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욕구가 내 속에서 나 좀 꺼내달라고 외치는 소리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계획도 방법도 모르지만 

그냥 해야할 것만 같고 가야만 할 것 같고 봐야만 할 것 같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내 뒷덜미를 잡아끄는 강렬한 이끌림을 뿌리치면 안될 것 같은 

완벽한 수동체로서의 내가 되어 있다면 

나는 욕구가 현실로 가는 바로 그 진입로에 발을 들인 것이다.


무엇이, 어떤 것이 나의 뇌리에 침입하여 나에게 이 느낌을 끌어냈는가?

그 '무엇', '어떤' 것을 떠올려 보자.

그것이 내가 진정 바라는 나이며 

자연이 내게 하라고 명령한 나의 과업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왜 에머슨은 부의 시작에

'육지를 횡단하기 위한 마차와 기차, 바다를 건너기 위한 배, 일을 위한 도구, 읽어야 할 책'을 언급했을까?


부는 단순히 먹고 사는 것을 초월한

세상으로부터 부여받은 나만의 과업을 알고 

그것을 위해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에 자리할 수 있는 수단이기에 

무한한 나의 정신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가야만 얻어지는 것임을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왜 많은 사람들이 '부자'를 꿈꾸지만 '부자'는 커녕 현실에서 전전긍긍하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원하지만 '남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시간을 투자하는지

왜 많은 사람들이 '모두의 성공'을 바라지만 '자신의 성공'조차 이루지 못하는지


지금 나는

내가 서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지 남이 세워놓은 자리에서, 그조차도 잃을까 두려워하고 있는지

지금 나는

내가 가야할 곳에 가야함에도 나를 묶어버린 허리춤의 고리를 스스로 끊지 못하고 힘이 없다 소리치고 있는지

지금 나는 

내가 원하는 나를 보았음에도 스스로 가둬둔 한계 속에서 차라리 꿈이 없는 것이 편하다며 자신을 달래고 있는지


자신부터 돌아볼 때다.


나를 더 '나다운 나'로 만들어가는 

이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부자가 되어야만 하며

내가 가장 나다울 때 

세상은 나를 세상의 조화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 것이기에


지금 내가 해야 할 최우선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이어야만 한다.

'원하는 내가 되는 것으로서 세상의 조화를 위해 내 몫을 다하는 것'이 

부자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 이 지면의 에머슨의 글은 랄프왈도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60,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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