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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Oct 30. 2022

시력(視力)은 지력(知力)

안목에 대한 소고

지담의 눈


나는 경영학자다.

경영학을 가르칠 때 성공요인으로 

필히 알려주는 것이 '장기적 안목'이다.

스타트업을 준비하는 친구들에게도,

기업가정신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도,

'장기적 안목'의 중요성은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성공의 필수요인이다.




그런데.

'장기적', 미래를 / '안목', 보는 눈을 

어떻게 갖는가?

어디서 배우는가?

누가 알려줄 수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앞이 캄캄해 헤매이던 그 시간들을 거쳐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장기적 안목이다.


'이 친구, 안목있네!'


안목은 '보는'을 '초월하여 보는' 힘이다.

아는 것을 초월한 앎이 지혜라면

보는 것을 초월한 봄이 안목이다.

아는 대로 보이는 것이 지식의 눈이라면 

아는 것을 초월하여 보는 것이 예지의 눈.

안목이다.


그래서 안목을 갖는다는 것은 '보는'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늘 눈을 뜨고 사니 늘 무언가를 본다. 아니, 늘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보는'감각의 강도는 아는만큼이다.

'아는만큼 보이고 보이는만큼 이해한다'는 진부한 말처럼 말이다.

즉, '사고의 힘'이 '보는'수준을 결정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그저 내 눈에 비친 것들에 대한 감각적 반응일 뿐이며

게다가 이 감각적 반응은 무감각적 반응을 제외하면 모두가 선택적이다.

눈에 익혀 습관이 되면 우리 정신은 사물들과 친근해진다.
눈은 항상 보는 사물에 놀라지 않으며
그리고 그 원인을 탐구해보지 않는다.
                                                                                                                 - 키케로


그저 보는(see, sight)것은 그저 비친 현상을 보는 것이지만

깊이 보는(vision)것은 초월된 세상을 현상화해서 보는 것이다.

이러한 보는(vision)능력은 단지 '눈(eye)'의 기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아니, 어쩌면 장님이라도 보는(vision)것은 가능하다.


그저 보는(see,sight) 것에도 비치는대로 보느냐 아니면 

자발적인 '의도'로 보느냐에 따라 '보는'은 다르다.

'의도'에 의해 '보는' 감각은 '관심'이라는 나의 마음을 활용한다.

이러한 수순은 일상에서 쉽게 접한다.

어느 날 나는 분명 생각을 버리려 몇시간 낯선 곳을 걸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생각에 빠져버렸고

그 가운데 내가 '관심'을 활용해 '본' 것들만 기억에 남아있는, 의도로 선택한 것을 보는 것이다.

관심이 가면 나도 모르게 잠깐 멈춰서 시선을 내리꽂아 '관찰'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의도'에서 '보는 감각'으로, '관심'으로, '관찰'로 이어진 것이

나의 '느낌'에 자리잡히면 '경험'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사고가 도식화되거나 경직되어 있다면 '눈에 비친 현상'만으로 보거나

제 아무리 관찰까지 총동원하여 본다 하더라도 경직된 그 곳엔 관찰의 감각이 들어갈 틈이 없다.

결국, 안목은 내 사고체계의 감각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내 사고체계를 점검, 재고, 숙고, 재구성할수록 

나의 안목이 상향될 것이 분명한데

나의 사고의 시작은 '보는'감각부터이니 

이 둘은 평행하다.


여기에 개입시켜야 할 것이 '보류의 용기'다.

내가 보는 것, 아는 것을 잠깐 보류시킬 수 있다면

내 감각기능으로서의 '보는' 행위와 내 지각기능으로서의 '아는' 것 사이에 

갭(gap)을 만들 수 있고 

이 갭에 점검, 재고, 숙고를 채워넣을 수 있다.

'보류의 용기'는 곧 나의 자발적 '판단의 정지'다.


정지된 나의 판단은 분명

갭에 투입된 것과 기존의 것들을 흔들어댄다. 

흔들면 섞이고

섞이면 재구성된다.

그래서 우리는 섞이는 '혼란'과 '불편함'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 과정을 좀 거창하게 '성찰'이라고 하자.


성찰에도 균형이 필요하다. 성찰은 반성이 아니니까.

반성이 감정이라면 성찰은 이성의 범주다.

'성찰적 균형'은 존롤스가 이름지은 것인데 

이에 대해 김우창교수는 

'경험의 직관에서 출발하여 그 판단의 규범 원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다시 구체적인 사례와의 교환 속에서 수정하고 

또 다른 이론적 가능성과 대비, 검토, 숙고하는 마음의 상태'(깊은 마음의 생태학)라고 했다.

경험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기존의 내가 지닌 사고를 진단하고, 

즉, 사고+경험으로 나의 사고를 수정해가는 마음이 성찰의 균형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나의 사고체계가 재구성되는 과정의 연속이 '보는' 힘을 키우게 되고

'보는'힘이 커진다는 것은 현상 이면의 본질에 더 근접할 수 있는 '안목'이 된다.


따라서, '제대로 본다'는 것은

그저 시야에 포착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도와 정성, 시간, 관심, 관찰이라는 경험의 과정까지를 모두 거쳤을 때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되는, 

그 것이다.


즉, '보는 나'와 '보이는 대상', 그리고 그 것들을 둘러싼 모든 맥락적 범위까지 모두 포함했을 때

'제대로 본다'고 할 수 있다.

시각에 이성과 느낌까지 보태어 보는 것, 

그리고 그 '보여짐'을 현상에 대입할 수 있는 능력까지를 아는 것이

안목이다.


정리하면,

안목은 실천(경험)과 지각(느낌)의 결합으로부터 시작다.

이 과정을 치열하게 지속시키는 힘이 경험+자신의 판단을 섞는 성찰의 역할이며

성찰이 제대로 기능하면서 지속될 때 

비로소 얻게 되는 능력이 '장기적 안목', '예지의 눈', '천리안'이다.


결국, 장기적안목을 갖길 바란다면

내 머리 속의 사고체계가 경직되고 도식화되어 있지는 않은지부터 점검할 필요가 있다.

혹시 모르니 현상을 접하며 '보류의 용기'와 '판단의 정지'기능을 이성적으로 작동시킨 후

이 사이에 만들어진 갭에 

나의 사례(경험)를 채워 뒤섞고

더 나은 사고체계로 승격시키는 과정이 

장기적안목을 갖는 학습이며 훈련이다.


즉, '장기적 안목'은 '눈'이 아닌, '정신'의 수양에서 비롯된다.

시력(視力)은 지력(知力)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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