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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Oct 31. 2022

마이너뽕삘

순수와 당당함에 대한 소고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 뽕을 맞아야 할 것 같아"

법없이도 사는 분이 김추자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말한다.

김추자는 노래 하나로 법없이도 사는 한 사내를 뽕쟁이로 전락시킬 수 있는 삘(feel)을 가졌다.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못산다 할 것을~~~


진짜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녀가 뱉어내는 소리에는

후회막심이 절절히 느껴진다.


그녀의 소리에는

잘하려는 멋이 없다.

꾸미지도 않았다.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부르는구나 싶다.


고급도 격조도 우아도 없다.

트렌디하지도 세련되지도, 그렇다고 전통적이지도 않다.


세련된 윤형주와 점잖은 김세환 옆의 헝클어진 머리로 서 있는 송창식도,

짝달막한 키에 못생긴 신중현도,

조율해달라고 하늘에 마구 조르는 한영애도, 

그 큰 덩치의 팔다리를 맘대로 휘젓는 싸이도,

헐렁한 옷에 자유롭게 혀를 갖고 노는 김건모도,

골난 사람마냥 툭툭 노래를 던지는 전인권도,

90학번인 내가 기억하는 담다디의 이상은도,

도대체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내가 너무 좋아했던 화가 김점선도,

지금 한창 자기세계를 드러내는 악동뮤지션의 이찬혁도,

이렇게 따지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떠오르는데

그 누구보다 마이클잭슨.... 

다들 자기만의 색깔로 자기만의 삘(feel)을 내뿜는 자들이다.


메이저가 아닌, 그렇다고 평범하지도 않은 이들에겐

경계가 없는 듯 하다.

룰도 없는 듯하고

지켜야 할 기준도 보편적인 세상의 그것과는 다른 듯 싶고

정신에도 우리와 다른 주름이 잡힌 듯하다.


세상의 혼돈이 그들에겐 질서인 것 같고

세상의 질서가 그들에겐 구속인 것 같다.

세상이 참는 것을 그들은 내지르고

세상이 내지르는 것에 그들은 관심두지 않는 것도 같다.


자기 외부에 자발적인 차단을 가해

자기만의 익숙한 공간에 자기를 가둬버린 듯한,

그리고 감히 어느 누구도 그 공간에 침범할 수 없는 독보적인 아우라가 있음에도

그 누구라도 다가가면 술한잔나눌 수 있는 자연스러운 편안함.


마이너도 메이저도 아닌 그들이

그냥 자기 세계안에서 자신의 삶을 살던 그들이 지금은 메이저가 되어 있다.

아무튼 그들에게서는 보편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그런 향? 멋?

표현할 언어조차없는 '거시기'한 삘이 있다.


김추자 노래를 들으면 뽕을 맞아야 할 것 같다는 그 분이 또 한마디한다.

'캬~~마이나뽕삘, 끝내주지?'


아!

'마이너뽕삘'이다!


나는 완벽하려 했다.

부족함을 들키면 못나보일까봐서다.

나는 인정받으려 했다.

인정받는 것이 나에겐 보상이었으니까

나는 아는체 했다.

모르는 걸 들키면 날 무시할 지 모르니까

나는 예뻐보이려 했다.

여자에게 외모는 무조건 플러스였으니까

나는 일부러 웃어줬다.

내 감정을 감춘 채 웃어주는 게 예의였으니까

나는 잘 들어주는 척 했다.

경청은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아껴쓰려고만 했다.

절제하지 않는 것은 곧 사치였으니까.

나는 누구보다 모든 것에 무조건 열심히였고 

질 것 같은 게임은 두려움이 들킬까 애써 관심없는 척 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는 순수함같은 것은 

사회에서 모지랭이로 찍힐 것 같아

내 안에 나를 철저히 감추고

잘난 나, 멋진 나, 예쁜 나, 격있는 나로 세상에 존재하고 싶었던 나였다.


나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멋진데 나는 그걸 몰랐었다.

몰랐다는 핑계 뒤에 숨어 잘나보이려 했던 그 시간을 지나보니

나는 더 못난 모지랭이가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마이나뽕삘.

사전에도 없는 이 단어를 제대로 피팅한 의복처럼 척 걸친 그들이

잘 빗어넘긴 단정한 머리에 명품셔츠를 입고 근사한 명함을 내미는 이들보다

내겐 더 멋져 보인다.

내겐 더 격있어 보인다

내겐 더 고급지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자신있어 보인다.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정한 격(格)에 스스로 도달해 세상과 맞짱뜨는 당당함이 보인다.

그렇게 그들은 시대의 아이콘이 되고 

자기만의 세상에 진입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뽕삘을 마구마구 풍기고 있다.


자신만의 삶을 최상으로 끌어낸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경이로움?

그들과의 리그가 아닌, 자신만의 리그에서 최고의 자신을, 최고로 끌어낸 자의 자연스러운 격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고한 세계를 구축한 자의 장풍?

너무 순수해서 엄마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것 같은 흠잡을 데 없는 민낯의 순진함?

제자리에 있지 않고 삐져나오려는 자신에게 에라 모르겠다! 일부러 져주고 마는 무모한 방사?


오래된 여가수가 전해준 강렬한 이 삘이 나에게도 있지 않을까?

자신의 깊은 내면, 

자신도 관심두지 않는 자신만의 깊은 언더그라운드에

부끄러워서, 잘나보이고 싶어서, 자존심 상해서 등등의 이유로 

드러내지 않았던

그 자연스러운 순수함이 곧 나의 마이너기질이다.

그 마이너에서 풍겨져나오는 삘이야말로

나를 나답게 한다는 걸 나는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김추자노래를 들으며 나는 또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고 싶니?"


가고 싶은 곳도, 갖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별로 없는 나이지만

굳이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진짜 나로 살고 싶다.

아주 간절히..

그것 뿐이다.


다시 한 번 나에게 각인시켜 보련다.

'못난 나를 드러내! 

그러면 오히려 잘나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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