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삶'에 대한 소고
이쪽에는 저쪽이 없고 저쪽에는 이쪽이 없다.
선에는 악이 없고 악에는 선이 없다.
행복에는 불행이 없고 불행에는 행복이 없다.
불안에는 평안이 없고 평안에는 불안이 없다.
만족에는 불평이 없고 불평에는 만족이 없다.
위에는 아래가 없고 아래에는 위가 없다.
수평에는 수직이 없고 수직에는 수평이 없다.
직선에는 곡선이 없고 곡선에는 직선이 없다.
평면에는 굴곡이 없고 굴곡에는 평면이 없다.
고통에는 쾌락이 없고 쾌락에는 고통이 없다.
이성에는 감성이 없고 감성에는 이성이 없다.
암흑에는 빛이 없고 빛에는 암흑이 없다.
불에는 물이 없고 물에는 불이 없다.
추위에는 더위가 없고 더위에는 추위가 없다.
땅에는 하늘이 없고 하늘에는 땅이 없다.
시작에는 끝이 없고 끝에는 시작이 없다.
기쁨에는 슬픔이 없고 슬픔에는 기쁨이 없다.
과거에는 미래가 없고 미래에는 과거가 없다.
유형에는 무형이 없고 무형에는 유형이 없다.
한계에는 무한이 없고 무한에는 한계가 없다.
열림에는 닫힘이 없고 닫힘에는 열림이 없다.
이쪽이 있어야 저쪽이 존재하고 저쪽이 존재해야 이쪽이 존재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삶의 원리임에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이 자연이 가는 길임에도,
이쪽과 저쪽은 상반되어 있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모든 길목엔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에도
우리는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꾸만 스스로 피하고 외면하며 이탈하곤 한다.
불만을 없애려, 고통을 피하려 한다면 결코 만족을, 쾌락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이치인데 말이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듯이, 우리는 '행위'만을 하는 존재다.
가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우리는 '대응'만을 하는 존재다.
불행에는 불행에 걸맞는 옷을, 쾌락에는 쾌락에 걸맞는 짓을 우리는 '수긍'만을 하는 존재다.
이쪽을 피하거나 외면하면 저쪽으로 달아나질 거라는 착각은 어리석다.
고통이 오면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니 그냥 고통스러워야 한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피하면 안되고 피해지지도 않기에, 따라서 즐겨질 수 없다.
즐기는 것 역시 피하는 것이라 더 고통스러워지는 길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와 같은 말을 도대체 누가 만들어 냈을까....
너무 행복하면 너무 행복에 겨우면 된다.
참을 필요가 없다. 불행의 굴곡을 거쳐 누리는 권리이니 그냥 그 쾌락을 누리면 된다.
왜 쾌락을 자제해야 한단 말인가.
여기에 조금 보태자면,
고통이 지나야 쾌락이 오는 것이니 고통은 의무요, 쾌락은 권리.
의무는 필수지만 권리는 선택이니 쾌락을 어찌 선택하든 자유이며 그 '어찌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환경에 따라 달리 할 수 있다.
여하튼.
그렇게 대응과 행위가 반복되다보면 예측이 가능하고 삶에 원리를 대입하는, 다시 말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과정에 원리를 대입해나가는 실질적인 이해와 실천이 가능해진다.
이해된 것의 실천이 반복되다 보면, '준비'나 '대비'를 할 수 있는, 우리에게 그 정도의 능력까지는 허락되었으니, 잘난 사람은 '준비'가 된 사람이고 못난 사람은 '준비'가 덜 된 사람으로 분류되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것에 '대응하기 위한 준비의 행위'뿐이다.
그렇다면,
항상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길에는 손해와 갈등, 충돌이 동반됨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저쪽으로 가기 시작한 이쪽을 잃는 것부터 저쪽으로 가기 위해 냅두고 내지 놔버려야 할 것들이 '손해'요, 가는 길이 낯설어 겪는 것이 '갈등'이자 '충돌'이니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은 다 일이 갈길가는 증거들이라 나로서는 방해하지 않고 옆으로 비껴서 있으며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다는 이해도 수월할 것이다.
추위에서 더위로, 더위에서 추위로 가는, '계절'이라 이름붙여진 기나긴 흐름에서
이쪽이 저쪽으로 가는 진입로 내지 어중간한 기간, 즉, 봄이나 가을이라 이름하는 그것들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성긴 구름이 잔뜩 모여들며 또는, 모여든 구름이 성긴 방향으로 이동하며 호되게 전쟁을 치를 때 폭우를, 번개를, 천둥을, 벼락을 만나는 것과 같이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모든 길을 우리는 '세월'이라, '인생'이라, '삶'이라 이름붙이고 자의든 타의든 그 안에서 구름의 양이 변하듯 맑았다 흐렸다 시간과 손잡고 때로는 맞으며, 때로는 느끼며, 때로는 환호하며 그리 가면 되는 것을.
그걸 피하려 하니 '천둥벌거숭이'가 되어 '벼락맞을 짓'을 하는 것이다.
하늘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이치를 깨닫지 못한 무지에서 자초된 자행이다.
인생의 시작과 끝이 이러한 원리로 움직이기에
그 어떤 것도 막을 방도없는 무력한 나에게 바라건데,
이치를, 섭리를, 진리를 따르는 것만이
피하고 싶은 모든 것들로부터 피하려는 탐욕의 한계를 넘게 하는 것이며
가기 싫지만 갈 수밖에 없다는 인정을 갖게 하는 것이며
당하기 싫지만 당해야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그 다음 길을 예지케 하는 것일테다.
정신의 두려움은 이치로써만 떨쳐버릴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바일테다.
*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하시기 바라는 글입니다.
https://brunch.co.kr/@fd2810bf17474ff/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