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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an 16. 2023

1000일의 새벽독서로 배운
삶의 '관점' 1

나는 항상 빚쟁이다.

처음엔 새벽 4시부터였고 지금은 새벽 3시부터. 2시간 이상 새벽독서를 실천한지 1000일을 훌쩍 넘겼다. 나는 나를 탐구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고 'ㅅ'으로 시작되는 3가지, 삶, 사람, 사유를 즐기는 최고의 쾌락으로 일상을 보낸다. 이로써 나는, 나의 남은 생을 관조할 수 있는 몇가지 관점을 갖게 되었기에 오늘부터 하나씩 나의 관점을 기록하기로 했다. 


오늘은 그 1번째, 

[나는 항상 빚쟁이다]


나는 항상 자연에 빚을 지고 있다. 


우선, 나는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해하며 생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 돼지, 닭은 말할 것도 없고 매일 먹는 쌀, 소금, 고춧가루, 심지어 좋아하는 과일과 야채, 나물까지. 그 어떤 것도 생명없는 것이 없는데 나는 이것들을 자연으로부터 빚지고 있다. 일정한 대가를 치른다 해도 무방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자연이 이것들을 만들어내는 데 보낸 오랜 시간과 노고가 너무 엄청나 단 몇 푼정도로 상계처리하기에는 도통 계산이 안 맞는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턱없이 부족하다. 무조건 내겐 빚이다.


둘째, 나는 나의 모든 속내를 새벽별을 보며 토해내고 있다. 가끔은 허공을, 하늘을, 바다를 상대하기도 하는데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날 타박하지 않는다. 그저 고스란히 다 받아준다. 내가 아직도 맑고 강건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에는 무조건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에도 이들은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무한정 나에게 베푼다. 어디 말하고 싶어 누구라도 부르려치면 술이라도 사야 하고 심각한 경우 돈내고 내 말을 들어주는 곳도 여럿 있지만 나는 모든 속내를 자연에 쏟아낸다. 당부도, 하소연도, 너스레도, 울화통터지는 속내도, 억울함도, 수줍은 고백도, 잘못의 시인도, 용기없는 비굴도, 나약한 도전도, 민망한 기대도, 꼴같잖은 자랑질도, 심지어 화도 모두 다 받아주고는 원래의 나로 되돌려 놓기까지 한다. 무조건 빚이다.


셋째, 나는 바람을 느끼다, 나무를 보다, 분주한 새들에 정신을 뺏기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하다, 그리고 내 시야에 포착된 모든 것들로부터 영감을 얻는다. 나는 어떤 계획도 의지도 없었는데 느닷없이 불현듯,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이 영감을 넙죽 받아챈다. 값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무상으로 나에게 source를 주니 자연에게 난 항상 빚지는 기분이다. 엉켜있던 현상을 관통할 통찰을, 턱까지 차오른 막막한 정신의 해탈을, 꽉 채워져 터질 듯하던 집착의 해갈을, 암흑같던 심정의 이유까지 자연은 내게 얹혀진 엄중한 숙제를 풀어낼 영감을 수시로 알려주니 이걸 도대체 어찌 계산할 수 있을까?  


넷째, 나는 오늘도 기쁘다가 감동받다가 울컥하다가 어떤 현상에 짜증이 나기도 했다. 나에게 주어진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은 내가 태어나 나의 기술로 만든 것이 아니다. 모두 자연이 나에게 미리 심어놓은 것들이다. 비가 내리면 우울했다가 비에서 눈으로 바뀌는 장면에선 벅차 오르다가 또 구름이 산을 덮는 장관에 놀라다가 또 어떤 때는 꿈을 꾸는 듯한 기이한 현상에 호기심까지 발동해 자연스레 내 이성을 움직이게도 하니 내가 제작하지 않은 수많은 감정과 정서를 무상으로 나는 받았다. 이를 제때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데도 도로 가져가지도 않는다. 한 번 준 것은 영원히 나의 것이라고. 그저 잘 쓰기만 하라고. 나는 이리 큰 것을 받았으니 잘 사용하는 것으로 대가를 치러야만 할텐데 빚만 계속 쌓여간다.


다섯째, 나는 아직도 살아있다. 내 정신과 영혼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이것의 근원은 자연적이었다. 사후세계에 대한 검증이 아직 내게 확실치는 않으나 나는 죽음에서 이 생으로 오는 데에 그 어떤 괴로움이나 고통이 없었듯이 나는 죽음으로 가는 길도 매 한가지라 여긴다. 자연은 아무런 고통없이 나를 이 생으로 데려다놨다. 이 명쾌한 사실 하나만으로 나는 이 생에서 죽음으로 들어가는 문 역시 두렵지 않다. 이 문에서 저 문으로, 저 문에서 이 문으로 통과하는 무통에 대한 대가가 이 생에서 받는 이 정도의 고통이라면 꽤 괜찮은 거래이기에 빚을 탕감하는 자세로 모든 것에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다. 큰 고통이 오면 빚을 한꺼번에 많이 갚게 되니 오히려 즐거울 것이라는 무모함까지 들 정도니 말이다.


여섯째, 지금 내 정신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움직여주는 스승들은 나와 무관한 삶을 살았던 이들이다. 에피쿠로스도, 루크레티우스도, 그들의 사상을 조용하고 은근히 전해준 몽테뉴도, 세네카도, 에머슨도, 그리고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 영성학자들 모두가 나와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들이 나를 이끈다. 이 역시 무상으로 받은, 받고 있는 것들이다. 그들의 사유가 기록된 책에 지불한 금액이나 그들을 이해하느라 소모한 내 정신의 수고, 또 나의 시간을 상당히 가져갔다 하더라도, 그들을 모른 채 살 수도 있었을텐데 어떤 인과로 그들이 내게로 왔던지간에 내 의지나 의도가 첨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는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어떻게 그들이 내게 왔는지 아직도 여전히 신비스럽기만 하기에 나는 무상으로 증여받은 이 모두가 빚으로 쌓여 있다고 정리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아니, 이들의 삶을 통해 나라는 사람에 대한 탐구의 즐거움까지 얻었으니 오히려 부채가 늘어났다고 계산하는 것이 더 정당하려나. 아무튼, 빚이 자꾸만 는다.


일곱째, 내 살과 피보다도 소중한 나의 자녀들을 나는 무상으로 받았다. '자식을 원하는' 나의 욕구, 즉, 그들을 태어나게 한 것은 순전히 나의 욕구였는데 그들은 지금껏 내게 행복을 주고 있다. 나의 욕구에 대한 보상치고는 과할 정도로 그들은 날 인간으로써 역할하게 하고 '엄마'라는 이름을 부여하며 무한의 행복을 내게 준다. 이 역시 자연이 이러한 자녀를 내게 무상으로 허락했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나와 함께 머무는 모든 이들도 다 마찬가지다. 나는 저기 전쟁터나 신분사회의 노비나, 어떤 장애를 안고 살 수도 있었겠지만 자연은 이리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사람들과 안정된 일상을 계속 부여하고 있다. 이 모든 것에 내가 빚을 지고 있는지라 나는 나의 할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진다.


마지막으로, 자연은 내게 얼마나 강인한 힘이 담겨 있는지를 알게 한다. 나약할대로 나약해진 내 정신으로 내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길을 걷다가 바위를 뚫고 나온 새끼손가락만한 여리디 여린 꽃 한송이 보았다. 꽃의 향기에 끌린 것도, 그 화려함에 매혹된 것도 아니다. 정말 우연히 보게 된 아주 작은 그 꽃은, 놀랍게도!!!! 바위를 뚫고 나와 있었다. 바위를 무슨 힘으로 뚫었을까? 바위가 품고 있던 꽃을 밀어냈다 하더라도 저리 아무런 상처없이 내보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뿌리와 줄기가 바위에 틈을 만들 정도로 단단하단 말인가? 아니면, 억겹의 시간으로 저리 자라 지금 내 눈앞에 있단 말인가? 말도 안된다! 이 길은 바로 지난 계절에 새롭게 단장된 길인 것을... 그 어디에도 해답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를 어떤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 능력으로는 알아내지 못한다. 그저 신비로운 자연의 힘이라 인정할 수 밖에.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저 풀꽃은 내가 아무런 애씀도 없이 두 손톱만으로도 톡!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여리다는 사실이다. 아무런 힘도 필요없다. 그저 손가락 두개 까딱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그 풀꽃은 꺾인다. 바위를 뚫는 그 강인한 풀꽃의 힘보다 살짝 움직인 내 두 손가락의 힘이 더 강력한 것이다! 나는 이리 강한 힘을 지닌 나였던 것이다. 무너질 듯 나약해진 나에게 자연은 너무나 우연한 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여린 풀꽃으로 얼마나 내가 강한 인간인지, 내 속에 강인한 무언가가 있다고 소리도, 그 무엇도 없이 그저 그렇게 어느날 우연히...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수백권의 책으로도 나는 수시로 나약해지는데 가장 미미한 것으로부터 가장 강인한 나를 보게 하는, 그 찰나의 순간. 아.. 자연에게 나는 얼마나 큰 빚을 진 것인가? 


물론 자연은 나에게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실수를 하기도,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저 꼭대기에 나를 앉히더니 어떤 날은 저 나락으로 쳐박기도 한다. 내 이성으로는 도통 해석할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괜찮다. 이리 빚진 것이 많은데 자연이 심심할 때 날 가끔 놀린다 한들 내 어찌 원망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심심할 때도 나에게서 놀아주니 나는 이 참에 빚이나 탕감받으련다. 


이러한 관점이다 보니 나는 늘 수동적이다. 그리고 순종적이다. 

며칠 전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나는 물었다. 

'자연이 또 세상에 무슨 새로운 일을 하시려나?'

가끔 일상이 곤란해서 소란스러우면 또 묻는다. 

'이리 곤란한 걸 보면 자연이 내게 빚을 탕감해 주시려나?'

생각지도 않게 일이 술술 풀리거나 얻은 것이 많아지면 나는 따지듯 묻는다. 

'이건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니 빚이 아니지요?'


이렇게 철저하게 복종하는 삶을 선택하여 살아보니 

이제야 비로소 자연의 깊은 의도를 알아버렸다.

모든 것이 이치대로 가고 있음을,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함을,

모든 것에는 이면의 숨겨진 의도가 있음을,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는, 나만의 독립적인 삶 속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이제서야 자연은 내게 말한다.

"이 소중한 가치를 알아준 것만으로도 너는 빚을 모두 갚은 것"이라고....

"나는 이 단순함을 알게 하려 그리 전부를 베푼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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