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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May 23. 2023

악마는 항상 너보다 더 부지런하니
더 끝없이 욕구하렴.

'엄마의 유산 20'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바라지. 즉, 소망하고 욕구하지, 추구하는거지.

누군가처럼 되고 싶고 그것을 갖고 싶고 먹고 싶고 보고 싶고 

거기에 가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지.

이러한 '욕구'가 없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어.

인간의 본성은 '욕구하는 동물'이니까.


욕구하지 않으면 '만족'이나 '불만족'과 같은 단어도 소용없어지지 않을까?

바라는 바가 없는데 무엇에 만족하고 또 무엇에 불만족할까? 

또, 충만이란 단어도 존재하지 않겠지. 

바라는 바가 없는데 충분히 만족스러운 그 느낌을 왜 원할까?


여기서 잠깐, 단어를 정리해보고 넘어가면 좋을 듯한데 말야..

욕구, 욕심, 욕망, 탐욕 등에 공통적인

욕(慾)은 (마음 심) + (하고자 할 욕)이야. 

즉,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의미하지.

욕구란 뭔가를 구하는 마음,

욕심이란 하고자 하는 마음,

욕망이란 바라는 마음,

욕구, 욕망. 모두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 즉, 욕심인 것이다.

욕심이 나쁜건가? 아니, 그저 욕구하는 마음이 욕심이야.

이 마음이 지나치면 탐욕(貪慾)인 것이니 탐욕은 바람직하지 않겠지.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이 시작되었다면 충동이 일고 이를 욕구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텐데 

욕구자체는 물론 실체가 없지만 얼마나 소중한 마음이니... 

아무 것도 없는 무(無)에서 무언가가 있길 바라는 유(有)가 된 것이니 내 안에 창조가 시작된 것이지. 

쉽게 말해서 무언가가 잉태된 것이란 말야. 

따라서, 

욕망, 욕구, 욕심은 세상에 없던 것을 나로부터 창조해내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


관심이 있으면 들여다보게 되고 

들여다 보면 볼수록 오래, 깊이 더 보고 싶고

오래, 깊이 더 보니 자세히 알게 되고

자세히 아니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니 갖고 싶어지고

갖고 싶으니 더 소중히, 아끼게 되지.

그리고, 

소중한 이와 나누고 싶어하지...


바란다는 것은, 즉, 욕구한다는 것은 이런거야. 

너무 소중해서 그것을 귀하게 여길 줄 알게 되는 것.

나아가 그것으로 나의 가치가 상승되며 나의 정체성에 또 다른 색을 입히는 것.

또한 지금과는 다른 나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 나아가는 것, 향하는 것, 흘러가는 것,

그리고, 나누는 것.

결국, 욕구가 없으면 공유도, 진화도 이루지 못하지. 


하지만 욕망, 욕구에는 실체가 없어. 

그저 내 안에서 실체가 되길 기다리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닐 뿐이지. 

실체없는 욕구는 너의 의식 속 믿음에 의해서만 실체가 되지.

그래서 우리에겐 믿음이 필요해. 

'원하는 것'을 가졌다는, 이미 지니고 있다는 믿음. 


어딜 여행가고 싶다면 이미 그 곳에 가 있다는 믿음. 

무엇을 하고 싶다면 이미 그런 사람이 되어 있다는 믿음, 

무엇을 보고 싶다면 이미 내 눈앞에 그것이 실재한다는 믿음.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면 이미 그 사람처럼 되어 있다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이 실체가 되어 있는 듯한 의식과 느낌. 

욕구와 욕망은 바로 이러한 느낌을 따라 움직이면서 이 믿음에 대한 마음의 힘. 

즉 욕심으로 실체화되는 것이야.


욕구, 욕심에 대해서는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알려준 바를 언급하는 것이 어쩌면 기준이 될 것도 같아.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욕망이 있어. 가령 목마를 때 물을 마셔야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자연스러운데 꼭 필요하지 않은 욕망이 있어. 이는 사치스런 식사와 같은거야. 사치에 해당하니까 어쩌면 탐욕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자연스럽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욕망이 있어. 어쩌면 씁쓸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욕망때문에 사는것 같기도 해. 명예나 지위같은 것인데 에피쿠로스이 표현으로는 왕관이나 동상같은 것이라고 했어.


물론, 젊은 날엔 남들이 알아주는 직업을 갖고 싶고, 명예도 탐나고 썩 있어보이는 명함을 선호하기도 하지. 그래서 그 욕망은 필요하지 않아! 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겠어.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너에게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너의 소신이나 정의와 맞바꾼 것이라면 그것은 탐욕을 넘어 죄가 되지 않을까?

남의 것을 부정한 방식으로 택해서 취한 것이라면 이 역시 죄가 되겠지.

또한 정당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라도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정의와 소신을 버리고 타협과 손잡는다면 이 역시 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꼰대같은 말들을 하는 걸 보면 아마 우리 사회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모습들에서 혹여 너희들이 왕관이나 동상을 위해 정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취급하여 내다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때문이겠지. 


가랑비에 옷젖듯.. 

그렇게 너에게 젖어들고 있는 이 탐욕의, 물욕의, 소유의 문화가 되어버린 이 사회가 

약간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되기까지 기성세대인 우리가 알고 행했든 모르고 행했든 일정부분 기여한 것에도 

책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읽는 너를 비롯한 청춘들은 결코 그러지 않길 바래.


그저 감정적으로, 우려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리로서 조금 더 부연설명을 해볼께.

지금 당장 좋아보이지만 짧게 끝나는 삶이 있고

지금은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라도 점점 좋아지면서 끝까지 좋은 상태로 삶도 있어.

당연이 이 말만 들으면 후자쪽을 누구나 택하겠지.

그런데 사람은 자극이, 감정이, 이성을 종종 마비시키는지라 눈 질끈 감고 부정과 손잡곤 하거든.

정말 잘 지켜갔지만 그 순간이 나락으로 가는 길임을 잊어버리는거지. 

꼭 명심해. 

악마는 항상 너보다 더 부지런히 열심히 일한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전 욕심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만 할까? 

에피쿠로스가 말한 1번째 욕망, 자연스럽고도 꼭 필요한 욕망이 물론 생존을 위한 욕망이라지만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

바로 꿈에 대한 욕망만큼은 꼭 욕구하길 바래.


꿈이란 내가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내보내주길 기다리는 세상의 명령이야.

꿈이란 나를 통해 세상에 조화를 이루고자 창조주가 심어놓은 씨앗이야.

꿈이란 너의 의식, 그러니까. 관념과 일치되었을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네가 잉태한 자식이야.

네가 아니면 안되기에, 너여야만 하기에, 너로부터 태어나 

네가 오로지 너의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또 다른 너의 실체라고 할 수 있지.


익숙한 관성대로 살기에도 버거운 세상이지만

네 안에서 꿈틀대는, 마구 소리치며 네 가슴을 두드려대는 그 정체를 위해

무엇이든 시도해보렴. 

실체없는 욕구가 충동으로 요동치는 그 진동을 결코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회피하지 말렴.

처음 시도하는 것들,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때론 보편적이지 않아 보이겠지만 

지속적으로 영원히 점점 나은 삶을 보장해 준단다.

왜냐면, 

세상이 원하는 거니까. 

그것이 실체화되기 위해 세상이 네게 보탬을 줄 테니까, 

세상이 널 보호해주고 세상이 너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

어쩌면, 

이러한 욕구야말로 가장 이치에 맞는, 자연이 원하는 욕망이지.


그러니, 

욕심내고 살렴.

욕구하는 마음을 끝까지 억누르지 말길 바래.

욕망 자체본성은 너의 창조물인데

그것을 품은 사람의 됨됨이나 그 내용물이 잘못되어 있다면 잘못이 창조돼.

너 자신과 네 안에서 널 통해 나오려는 너의 가치로운 꿈이 일체를 이루도록

끊임없는 욕심으로 욕구하고 또 욕구하렴.

그렇게 궁극의 행복과 쾌락을 너 자신의 인생에 선물하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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