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의 꿈, 나의 일은 각자 자기 길을 간다.
처음엔 새벽 4시부터였고 지금은 새벽 3시부터. 2시간 이상 새벽독서를 실천한지 1000일을 훌쩍 넘기고 지금은 글쓰기까지 보태어 나의 새벽은 더 다채로워졌다. 나는 나를 탐구하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고 'ㅅ'으로 시작되는 3가지, 삶, 사람, 사유(사유하는 사람으로 사는)를 즐기는 최고의 쾌락으로 일상을 보낸다. 이로써 나는, 나의 남은 생을 관조할 수 있는 몇가지 관점을 갖게 되었기에 나의 관점을 하나씩 기록해 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 7번째,
나는 '항상 수혜자'라는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이는 4번째 관점(글 제일 아래쪽 링크)에서 서술한 바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한마디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다시 말해, 나는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라 '선택되어지는‘ 객체라는 의미다. 오늘의 관점 역시 이와 결이 같다. 이러한 관점을 갖는 것은 '모든 것은 (비물질이든 물질이든) 생명을 지니며 모든 것은 나와 연계된 개념일 뿐 나의 것은 없다'라는 인식이 나의 저변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나
나의 일
나의 미래(꿈)
이들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리 배우려, 성장하려는 이유는 나의 욕구때문이다. 욕구란 추구하는 것, 즉,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그러한 내가 되는 길을 가려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적인 욕구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3가지. 나, 나의 일, 나의 미래가 아주 밀접하게 친해야 한다.
여기서 나는 나를 제외한 나의 일과 미래를 따로 떼내어 본다. 이유는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해서다. 지금까지 반백년의 기억을 더듬으면 나는 이 일을 하려 했으나 저 일을 하고 있고 나는 여기로 가려 했으나 저기로 가고 있다. 대부분이 나의 예상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고 '느닷없이', '예고없이' 나에게로 진입한 어떤 사태가 나를 그 때 그 자리에 세워놓은 듯하다. 과연 내가 무(비)계획적이거나 엉뚱한 생각으로 살아와서일까? 천만에! 결코 아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어떤 '이끄는 힘'이 애초의 나보다 더 나은 지금의 나로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가만.. 내가 계획하거나 생각했지만 그렇게 이뤄진 것보다 지금이 더 낫다는 말은, 내가 계획과 생각과 전략과 기타등등을 '이성적'이라는 이유들로 고수했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서서히 어떤 결과들을 얻으며 나는 목적한 방향으로 걷되 계획하지 않고 이끌리며 일을 해왔던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서 습득하여 체화된 상태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경험이 새벽독서를 통해 영성적으로, 학문적으로, 수많은 성공자들의 주장으로 뒷받침되어 이제는 확고한 관점이 되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신성한 무의식?
건강한 무관심?
초월된 이끌림?
영혼의 두드림?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소소하게도 자주 일어난다. 거기서 그것을 사려 했으니 거기까지 가는 길에 저것이 눈에 띄기도 하고 사려한 그것이 팔려서 없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다 된 계약이 엎어지기도 하고 다 만들어놓은 무언가가 몹쓸 것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거창한 무언가가 되어 있기도 한다. 모든 것-앞서 말했지만 물질이든 비물질이든-은 각자가 가는 길이, 자기 인연이 따로 있다. 많은 이에게 질문해봤다. '과연 자기 계획대로 된 것이 얼마나 있는가?' 다들 나와 비슷하게 경험했다고 한다. 별로 계획대로 되지는 않았다고. 계획대로였다면 지금 자기가 이렇게 살고 있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내가 미리 재단해서 설계하고 계획하고 가늠하지 않겠다.고. 창업하는 자들의 90%이상이 거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그들이 설계를 잘못해서, 계획이 서툴러서, 아이디어가 형편없어서? 능력이 부족해서? 천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다.
생각해보라. 창업을 하거나 미래의 꿈을 이루려는 것은 현재 없기 때문이다. 기발한, 독특한, 특별한, 창의적인, 앞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 없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시각으로 현재의 능력으로, 현재 머리속 이성으로, 현재의 이론으로 그것을 계획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여기에는 분명 이성을 너머선 무언가, 능력을 너머선 무언가, 계획에 혼을 넣어줄 어떤 힘이 존재해야 한다. 그들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빠뜨렸던 것이다. 어쩌면 너무 자신을 과신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감은 좋으나, 결여된지 모르는 자신감은 낭패를 더 빨리 끌어당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논리적이지 않아.라고 할 지 모르지만 이는 더 큰 우주의 대법(大法), 오히려 인과의 가장 근간을 무시하는 처사다. 이렇게 과학적인 논리를 말하는 이에게 '당신은 기적과 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역시 어떤 순간에 두 손모아 기도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기도하는 것일까?
철학자 아미엘은 날카로운 비평에 시달렸다. 너무 형이상학적이기만 해서 형이상학자라고 불리지 못한. 한마디로 형이상학은 형이하학이 현실에서 받쳐줄 때 진짜 형이상학이 된다는 의미다. 진정한 철학적 사고는 실천이 병행되었을 때 그리 부를 수 있다. 지금같은 경제위기에 인문학과 철학으로 인간본성을 일깨우자는 목소리는 현실을 살지 말고 허공으로 날아가자고 잔뜩 바람만 불어넣는 현상이 아니다. 보다 초월된 의식으로 현실을 더 큰 눈으로 바라보고 제대로 현실을 걸음하자는 간절한 외침이다.
'내가 하려고 해서' 거창한 아이디어가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경우가 허다하다면 여기엔 기획과 계획과 능력의 부족말고 더 큰 무언가를 잃고 있지는 않은지를 고려해야만 한다. 모든 것은 반드시 상반된 이면을 품고 있다. 나는 햇빛이 비치지 않더라도 그림자를 품고 산다. 선은 악이 존재할 때 선인 것이며 빛은 어둠이 존재하기에 빛인 것이다. 수직과 수평, 앞과 뒤, 위와 아래, 넓이와 깊이, 유한과 무한, 전체와 부분, 생성과 소멸, 나와 나아닌 모든 것, 물질과 비물질, 삶과 죽음. 현상과 본질, 이상과 현실. 모든 것은 상반된 그것을 품고 있기에 '전체', '일체성'이 보장된다. '나'라는 존재도 영혼의 소리를 담은 내면으로 현실에 발을 붙인 외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려' 하지 말고 나를 들어내어 가장 낮은 곳으로 옮겨놓으면 된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미래'라는 새로운 창조에 어울리는 내가 되어야지.
나는 '내가 갖고 싶은 그것'에 자격있는 내가 되어야지.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적합한 내가 되어야지. 와 같이 일과 꿈을 나의 대상으로 나에게서 떼어놓았다.
그렇게 하니
'나'는 내가 조절,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인 '나'로서만 '현실'만 살아야지.
그러면
나의 대상, 즉 미래, 꿈, 일 등 보이지 않는 실체들이 나를 필요로 하겠지. 로 결론이 나버렸다.
나에게 붙여놓고 나의 일과 나의 꿈이 가는 길을 훼방놓던 내가
그들을 놓아주어 그들의 속도로, 그들이 가는 길을 가게 한 것이다.
내가 그것들에게 어울리는 내가 되려고 나를 가장 바닥으로 내려놨던 것이다. 즉, 나의 미래는 내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나를 통해 세상에 창조될 무언가' 라는 관점으로 나는 그것들을 더 격상시켰고 그것을 바라보는, 따르려는 낮은 위치로 나를 이동시켰다.
다시 말해,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내가 원하는 미래의 꿈 역시 그것이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을 나만이 원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나와 비슷한 꿈을 품은 이는 많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자격을 갖추고 내 꿈이, 꿈을 위한 일이 나를 선택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나를 연마하여 단련시켜 적합한 나로 만들어가는 것만이 내가 현실에서 해야 할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현재의 내 능력만큼만 나는 최선을 다하면 되니 말이다.
나의 꿈을 내가 현실로 만든다?
아니다. 나의 꿈이 내가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그 시점에 현실이 되는 것이다.
나의 미래를 내가 만든다?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미래가 나에게 요구한 계산이 잘 들어맞을 때 내가 그 주인공으로 선택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나의 일을 내가 행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 일이 가는 길에 내 쓰임이 용이하다 판단되면 나를 데려다 쓸 것이기에 나는 현실에 서서 나를 연마하고 있으면 된다.
나는 그렇게 나의 미래에, 나의 일에 노예가 되어야만 한다.
노예로서 종속되었을 때 결국 그들의 주인이 되는, 기가막힌 모순이 내 인생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 모순이 현실이 되는 그 날 외치는 우리 인간들의 한마디는
'기적같은 일이야! 어떻게 내 인생에 이런 일이!'가 아닐까.
일은 일이 가는 길이 있고
꿈은 꿈이 현실로 가는 길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 간택되는 존재다.
그 길에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나는 그 옆을 지키는 존재다.
어떻게든 바둥바둥 그것들에게 내가 선택되어질 수 있도록 나를 연마하는 존재다.
그러면
일은 나를 필요로 할 것이며
꿈은 나를 선택해 주인으로 삼을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노예이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섣부른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들이 가는 길에 꼭 쓰임있는 인간이고 싶다.
나는 그들이 탐내는 내가 되고 싶다.
나는 그들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이고 싶다.
그래서,
그들이 딱 나아니면 안된다고,
그래서 무조건 나여야 한다고,
그렇게 나를 데려가길 바란다.
그렇게 노예에서 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장자크루소가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논리정연하게 설명한 것은 결국, '너는 네가 행하고 받는 것에 대해 불평등하지 않고 공평하다 여기며 잘 산다고 생각하니?'라고 우리에게 묻는 것이라 여긴다. 이에 '그렇습니다!'라고 감히 대답할 수 있는 나로 나를 만드는 것. 욕심부리지도 말고 억울하지도 않게 그저 나를 '내가 원하는 일'. '내가 원하는 미래'에 걸맞는 나로 나를 키워내는 것, 그러니 나는 미래를 살지 않고 현실을 살면 그뿐이다.
등가교환의 법칙대로, 보상의 법칙대로, 운명의 법칙대로, 양극의 원리대로. 나는 '나 이외의 모든 것'이 나를 선택해주길 바라며 미래가 지금의 현실을 이끌어주길 바라며 영혼이 실재인 나를 깨워주길 바라며 꿈이 현실로 발현되길 바란다. 이를 위해 나는 '꿈과 꿈으로 날 데려갈 일'이 가는 길에 잘 쓰이는 나로서 그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 내가 꿈을 이루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관점으로 하루를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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